지하 underground (3)
그것의 미소가 길게 늘어졌다. 어두운 환풍기 구멍 안쪽에서 그것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바비의 얼굴로 그렇게 웃지 말라고.’
‘사람처럼 그렇게 사람처럼 웃지 마라.’
분노도 한탄도 아닌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 찰나의 순간 그것의 미소와 마주쳤다고 생각한 그 순간, 콰득-환풍구가 박살나며 하얀 팔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머리 숙여!”
내 고함소리에 여고생이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빠가가강!
여고생이 쓰고 있던 자전거헬멧이 폭탄이 터진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지는 파편과 핏방울.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파편과 핏방울이 허공에 둥실 떠있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끈 떨어진 연처럼 여고생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손에 쥐고 있던 콜트 45에서 불꽃이 뿜어졌다.
탕!
탕!
끼이이약!
그것이 비명을 지르며 천장으로 몸을 숨겼다.
드다다닥! 다다다닥!
천장 안쪽에서 그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반사적으로 총을 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드다다다닥!
바로 머리 위를 돌아다니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들렸다. 근처에서 요란한 소리가 날 때마다 방아쇠에 건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이려했다.
‘참자. 보이면... 보였을 때!’
이를 악 물고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천장에서 흘러나왔다.
“아- 이래서 싫었어.”
뭔가를 떠올리며 안타깝다는 듯.
“부산하게 소리까지 내면서 움직였는데.”
나른한 것 같은 바비의 목소리.
“하아- 안 쏘네.”
어딘가 조금 높게 변한 바비의 목소리가 구멍 뚫린 천장에서 새어나왔다.
“짜증나게...”
뚝-
천장에 뚫린 검은 구멍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투명하고 미끌거리는 점성을 가진 것이었다. 타액? 침인가? 침이었다. 그것은 극도의 허기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총구를 겨눴다. 동공이 어둠을 보기 위해 수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방아쇠에 닿은 손가락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총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것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왜 저러지?
무엇 때문에 흥분하고 있는 거지?
생각해라 생각해.
큼. 큼. 내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
말라비틀어진 역한 향기와는 다른 신선한 향기. 그래 후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이제 막 쏟아진 신선한 피가 자신의 존재감을 퍼뜨리고 있었다.
꿀꺽-침을 삼키는 소리가 검은 구멍에서 들렸다.
바비의 목소리에는 나른함이나 짜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조급한 감정만 남아있었다.
“거기... 그년... 두고 가.”
“.......”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말을 못하는 일반적인 괴물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보내 줄께.”
뚝-
타액이 길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꼬르르르륵
뱃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귀지옥에서 나는 소리처럼 깜깜한 구멍 속에서 흘러나왔다. 점점 참기가 힘든지 그것이 나를 종용했다.
“가... 보내 줄테니... 가버려....”
꼬르르르륵 꼬륵꼬륵
창자가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
구멍을 쳐다봤다. 정말 보내주겠다는 건가? 이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협상을 할 정도로 이성이 있다는 건가? 아니 저건 바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가?
“꺼-지-라고-오오오....”
그것은 식욕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점점 말꼬리가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쓰러진 여고생을 쳐다봤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와있었다. 헬멧을 쓰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통이 날아갔을 것이다. 헬멧이 산산조각 날 정도의 충격이라면 살아있기 힘들다고 보였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냥 눈을 꾹 감고 엘리베이터에 타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여고생의 시체를 향해 달려들 것이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끝이었다. 이 압박감과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럼. 그 뒤는?
그것이 배를 채우고 얌전히 지하에만 있을까?
아니었다. 기운을 차린 그것은 나를 사냥하겠다고 올라올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지 몰랐다.
탄창에 남은 탄은 다섯 발.
크르르르르륵
그것은 이제 거의 본능적인 식욕에 지배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나를 쫓아내기 위함인지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복도를 가득 채우는 괴이한 소리가 전신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꿈틀-쓰러진 여고생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살아있다? 사후경직이나 반사와는 달랐다. 분명히 그것의 소리에 반응한 움직임이었다.
“방패를 잡아.”
꿈틀-여고생의 사지가 움직였다.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여고생의 그 움직임에 자극 받은 것처럼 그것이 천장을 뚫고 내려왔다.
“방패로 막아!”
고함을 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팍-
떨어져 내리는 그것의 등판을 맞췄다. 공중에서 45구경 ACP탄에 적중되자 앞으로 붕 밀려나는 그것이었다. 앞으로 쏠렸지만 그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누워있는 여고생을 노렸다. 여고생은 간신히 방패로 몸통을 가렸다. 마치 거북이처럼 몸통과 머리를 가린 여고생위로 그것이 떨어졌다.
콰직!
금속으로 된 방패가 움푹 들어갔다.
“꺄윽.”
여고생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일단 떼어내야 했다. 총구가 불꽃을 토하며 45구경 ACP탄을 뿜었다.
탕!
뻐엉.
그것의 뒤통수에 틀어박힌 총탄이 금속 헬멧에라도 맞은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총에 맞은 그것의 고개가 튕겨지듯 앞으로 꼬꾸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총탄의 충격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꼬꾸라진 채, 여고생의 얼굴을 물어뜯기 위해 입을 쩍-벌렸다. 기괴하게 벌어진 턱은 마치 뱀의 턱처럼 쩍 벌어졌다.
“꺄아아악!”
여고생은 자라가 머리를 숨기듯 방패 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텁- 허공을 물어뜯은 그것이 방패를 뜯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어댔다. 끄직-끄기기긱! 방패를 긁어대는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벌써 4발이나 쐈는데 소용이 없었다. 탄창에 남은 탄은 셋. 세 발로는 승부를 보기 어려웠다. 탄창을 빼 재빨리 탄을 보충하고 다시 슬라이드를 당겼다.
철컥-
“아저씨!”
여고생이 애처롭게 날 불렀다. 방패를 쥐어뜯던 그것이 여고생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아저씨이이.”
“아아아악.”
그것은 고작 몇 미터 뒤에 내가 있음에도 날 무시했다. 마치 여고생만 보이는 것처럼 여고생에게 달라붙었다. 피 냄새를 풍기는 먹이에 눈이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뒤통수를 정확히 쐈는데도 소용없었다. 그렇다면 약한 부분을 쏴야 한다는 소리였다. 눈-안와가 있는 부분이나 입천장을 쏴야 한다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슬슬 발걸음을 옮겨 여고생의 머리채를 잡아 뜯고 있는 그것의 옆쪽으로 이동했다. 여고생의 머리가 방패 밖으로 조금 삐져나오자 그것의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끌려 나가지 않으려는 여고생과 뽑아먹으려는 그것이 방패를 사이에 두고 엉겨 붙어 있었다.
쩍 벌어진 입이 조금 나온 여고생의 머리통을 호두과자 먹듯이 씹으려는 순간 놈의 관자놀이에 탄환을 먹였다.
타앙!
퍽! 머리통이 옆으로 홱 꺾였다. 밑에서 바동거리던 여고생이 그 틈을 타 방패로 그것을 밀쳤다.
끼이이이이익!
그것은 여고생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손을 휘저었다. 그 휘젓는 손에 여고생의 긴 머리카락이 잡혔다.
“아아아악!”
그것은 악착 같이 여고생의 긴 머리채를 붙잡고 늘어졌다.
서걱!
허리춤에 차고 있던 삼정도를 뽑아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대로 그것의 목젖에 칼을 꽂았다.
푸그그그그극!
‘칼이... 안 들어가?’ 매끄러운 피부가 마치 도자기처럼 칼날의 날카로움을 비껴냈다.
탕!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지근거리에서 눈알을 향해 쐈지만 총탄은 이마를 때렸다. 총탄의 충격으로 그것이 벌러덩 뒤집어졌다. 그것이 벌러덩 뒤집어지자. 머리채가 잘린 여고생은 허겁지겁 기어서 피했다.
벌떡! 근거리에서 두 방이나 맞았음에도 벌떡 일어나는 그것이었다. 그것도 조금은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 나를 경계했다. 하지만 본능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를 노려보면서도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여고생을 계속 힐끔힐끔 쳐다봤다.
“움직일 수 있어?”
“예.”
“내가 매고 있는 둔기 있지. 그거 들고 어떻게든 막아. 저놈은 널 노린다.”
“예.”
여고생이 내가 등에 매고 있던 둔기를 풀러 손에 잡는 순간 그것이 발을 박차 달려들었다. 삼정도를 앞으로 찔러 전진을 막았다. 푸국! 쩡! 이마에 틀어박힌 삼정도가 두개골을 뚫지 못하고 부러졌다. 빛나던 검신이 허무하게 비산했다.
칼이 안 통하는 건 알고 있었다. 칼은 총을 쏘기 위한 견제였다. 곧바로 그것의 눈을 향해 총을 쐈다. 고작 1m가량의 초근접 거리.
탕!
퍼억.
그것은 엄청난 반사 신경을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틀었다.
‘총구 방향을 읽어?’
눈을 노렸던 총탄이 그것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몸이 휙 틀어진 그것이 총에 맞은 반동을 이용해 여고생을 향했다. 슬라이딩 태클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총을 겨누자 그것은 몸을 빙글 돌려 여고생의 몸통을 내 쪽으로 디밀었다.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끼아아악! 저리가!”
퍽! 퍽!
태클에 엎어졌던 여고생이 상체를 일으킨 뒤 5kg이 넘는 둔기로 그것의 등판과 머리통을 후려쳤지만 잠시 시간벌이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고생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으적!
흔히 말한다. 맹수는 사냥을 즐긴다고. 맹수가 강한 먹이에게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건 먹을 것이 강한 것 밖에 없을 때의 이야기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본적으로 맹수는 어리고 약하고 상처 입은 사냥감을 노린다. 강한 상대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상대. 상처 입은 상대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맹수에게 있어 사냥이란 유희가 아니라 생존이자 생활이기 때문이다. 빠르고 확실하게 배를 채우면 그만. 사냥함에 있어 어미보다 새끼를 노리는 것이 당연했고, 생생하게 힘이 남아있는 것보다는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강한 것과 싸울 이유도 시간을 끌 필요도 없는 것이 맹수의 행동원리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새끼를 지키는 어미나 마찬가지였고, 여고생은 상처 입은 새끼였다. 그리고 그것은 맹수처럼 움직였다. 상처입고 약해보이는 여고생을 집요하게 노린 그것은 결국 이빨을 박아 넣는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으직!
“꺄아아악! 아저씨이이!”
단 한 번 물어뜯었을 뿐인데 허벅지 뼈가 드러났다. 마치 갈비찜의 갈비를 발라 먹은 것처럼 깨끗하게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잘린 근육조직 사이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이런 썅!”
총을 겨누자 여고생의 몸통에 박아 넣은 손톱으로 여고생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으직!
“끄아아앗!”
허벅지가 뜯겨졌다. 끔찍한 고통으로 인해 힘이 빠졌는지 내리치던 둔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땡그랑! 5kg짜리 둔기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처량한 금속음을 냈다.
히죽-입술에 묻은 피를 혀로 핥은 그것이 나를 힐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여고생은 버둥거리며 그것의 머리통을 밀어내려고 했다. 이미 하반신 여기저기 파 먹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늦었다. 아프리카 초원이라면 어미는 새끼를 포기하고 떠났을 것이다. 초식동물이라면 더 이상 무의미한 저항을 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어미도 아니었고 초식동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죽인다. 죽여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