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underground (2)
위기감응이 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진하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딸깍- 비상등에 전등을 끼워 넣으면서 바비가 안으로 숨었던 자재창고를 향해 이동했다. 자재창고 방향으로 가는 복도는 사방이 피칠갑이었다. 뚝뚝 떨어진 혈흔은 바비가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고생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피를 많이 흘렸네요.”
“그러게..."
자재창고 문고리는 붉게 물들어있었다. 피로 범벅된 손잡이를 보니 이미 늦은 건 아닐지 싶었다.
"어쩌죠?"
"내가 부르면 경계를 할 테니, 네가 불러봐.”
“예? 음. 알겠어요. 어... 언니... 많이 다치셨다면서요. 문 좀 열어보세요.”
“......”
“우리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피 많이 흘리셨잖아요. 빨리 치료해야 해요.”
“......”
여고생이 자재창고 앞에서 바비에게 문을 열라고 종용하는 동안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문 뒤에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 가만히 확인했지만 당장 위험한 느낌은 없었다.
“그만. 그냥 문을 열자.”
“예? 옛? 열 수 있어요?”
대답을 생략하고 마스터키를 댔다. 삑-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자재 창고는 불이 꺼져있었다. 여고생이 불쑥 들어가려는 것을 막고 불부터 켰다.
팟- 불이 들어오자 자재창고 내부가 보였다.
창고 바닥 여기저기에 피가 칠해져 있었다. 사방에 피칠갑을 한 흔적이 있었지만 정작 바비는 보이지 않았다.
*
자재 창고는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자재들이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건축자재와 인테리어자재 남은 예비부품들이라든지 태양광발전기 부품 같은 것들이 쌓여있기도 하고 벽에 기대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넓은 자재창고를 한 바퀴 돌았는데도 바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불을 껐고, 비상등의 전구까지 뺐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상처입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가능성은 없었다. 위기감응이 발동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았다.
“그쪽에도 없지?"
"예. 이쪽도 없어요. 어디갔죠? 상처가 심해 보였는데."
"일단 나가자.”
“예? 그냥요?”
내 심각한 표정에 여고생은 입을 다물고 내 뒤를 따라왔다.
설마 어느 구석에 들어가서 죽어버린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자재 창고 한쪽 구석에 들어가 죽어버렸다면 자재들을 들어내지 않는 이상 찾기 힘들 것이다.
“일단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자.”
“예? 여기 언니는요?”
“어딘가 꼭꼭 숨었나보다.”
“예에? 왜요?”
“기계실에 괴물이 두 마리나 있고, 상처를 입었으니까 안전한 곳에 숨었겠지.”
“그럼 어쩌죠? 피 진짜 많이 흘렸던데.”
순간. 팟-소리와 함께 복도에 불이 꺼졌다.
“까-”소리를 지르려는 여고생의 입을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어둠이 우리를 집어 삼켰다. 읍읍-여고생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조용히.]
내가 귀에 대고 속삭이자. 여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어두워졌기 때문에 잠시 시야가 좁아졌지만 녹색으로 빛나는 비상등의 불빛 때문에 완전히 시야가 마비된 것은 아니었다.
콰직-
복도 꺾인 부분에 있던 비상등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복도 끝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어째서?’
위기감응이 발동하지 않은 거지? 죽음의 순간에 발동하던 위기감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두려움과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불규칙하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느낌.
진정하자 진정해.
이렇게 흥분하면 안됐다. 위기감응과 흥분을 구분해야 했다. 여고생은 내 중얼거림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기는 했지만 불이 꺼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복도 끝에 있는 비상등이 깨져나가지만 않았다면 나도 우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이 꺼지고 비상등이 깨진다? 웃기는 소리였다.
겁을 주기는 싫지만 대비를 하지 못해 개죽음 당하는 건 피해야 했다. 여고생의 여동생이 그것으로 변했을 때도 성인 2~3명은 거뜬할 정도로 힘과 민첩, 내구가 늘어났다. 고작 초등학교1~2학년의 몸뚱이가 그 정도의 효율을 보였다면 성인 여성이 그것으로 변했다면? 그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 여자가 ‘그것’으로 변한 것 같다.”
“예-에?"
여고생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고글 안쪽의 눈동자가 혼란과 두려움으로 수축된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것으로 변한 배다른 동생이 떠올렸을 것이다.
난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두려움에 떨면 끝이었다. 1+1이 2이상의 결과를 얻으려면 최소한 공포에 질려 패닉에 빠지지는 않아야 했다. 패닉에 빠져 앞뒤 분간을 못하면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해졌다.
“지금부터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히 움직여야 해.”
“네.”
“말하지 않고 손으로 표시할 테니 기억해둬. 이렇게 세우고 주먹을 쥐면 정지. 손바닥을 펴고 앞으로 향하면 전진. 손가락을 활짝 펴면 산개... 산개는 그러니까 거리를 벌리라는 소리야. 나머지는 몸짓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정지, 전진, 산개, 집중 같은 간단한 것을 알려줬다. 설마 불을 끌 줄이야. 이런 수(手)신호를 쓸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혼자가 아니라 둘이 다닌다는 것은 생각보다 생각할 것이 많았다.
“그것의 반응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뭔가 접근한다 싶으면 무조건 방패를 휘두르고 봐.”
“알겠어요.”
*
‘그것’ 내가 죽인 그것은 분명히 이성이 있었다. 떠올려 보면 초등학교 꼬마 정도의 이성이었다고 생각됐다. 그러니까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며 인터폰을 누르고 다녔을 것이다. 그럼 정말 바비가 그것으로 변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여우를 삶아먹은 것 같았던 여자가 그것으로 변했다면?
‘젠장. 더럽게 꼬였군.’
제발 그것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냥 지혈에 성공해, 엘리베이터로 탈출하려고 나오고 보니, 엘리베이터가 잠겨있어 내가 내려올 때까지 근처에 숨어있다. 불을 끈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코너를 돌아야 했다. 주먹을 쥐자 왼 쪽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여고생이 발걸음을 멈췄다. 제대로 집중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두 눈을 표시하고 코너를 지목했다. 조심해서 먼저 살핀 뒤 코너를 돌겠다는 뜻이었다.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여고생이었다.
위기감응이 발동되지 않고 있었다. 살기가 없다는 소린가? 아니면 위험이 너무 많아서 직접적이고 근접한 위기 아니면 발동하지 않는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기계실에는 동면(?) 상태인 괴물이 두 마리나 있었고 지하 1층 다목적 홀에는 3~4마리가 있었다.
건물 밖에는 셀 수 없는 좀비나 괴물이 득실득실했다. 전부 반응하다가는 내가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직접적이고 근접한 위기에만 반응하게 된 것일 가능성이 있었다.
‘위기감응의 범위나 조건 같은 것을 알아봐야 했어.’
육체능력이 좋아졌다고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쪽에만 집중하다니 멍청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위기감응 때문이었다. 가장 큰 능력인 위기감응을 최대한 자세히 파악하고 있어야했다.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고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전진!’
손으로 표시하자 여고생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
코너는 완전히 암흑이었다. 비상등마저 전부 깨진 상황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미미한 달빛만 있어도 포장지에 적힌 성분분석표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해진 시력이었지만 이런 어둠에서 제대로 조준하기란 쉽지 않았다.
랜턴을 켰다. 권총의 총구 방향으로 빛의 기둥이 쏘아졌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일단 가서 결정해야 했다. 불을 켤 수 없다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내가 죽인 그것은 시력이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꼬마의 모습을 한 그것은 후각이나 청각을 이용해 반응했었다. 시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인간이었을 때보다 시력에 의존하는 것이 비중이 적었다.
내 밤눈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난 보통 사람들처럼 시력에 의존했다. 시력에 의존하는 사람과 시력의 의존도가 낮은 그것이 어둠 속에서 싸운다면? 사람이 아무리 밤눈이 밝다고 하더라도 어둠은 그것에게 유리했다.
사박-
사그락-
전진에 둘둘 감은 잡지와 테이프에서 소리가 났다. 발소리를 죽이고 말도 하지 않자 사박거리는 종이 쓸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느낌이었다.
‘젠장.’
긴장과 짜증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고작 50m도 되지 않는 이동거리를 몇 분에 걸쳐 조심조심 움직이다보니 조급함까지 고개를 들었다.
‘정지.’
엘리베이터가 앞에 보였다. 지하2층에 내려온 채로 그대로 대기하고 있는 엘리베이터였다. 닫힌 문을 열려면 열쇠로 돌려 잠금을 푼 뒤 버튼을 누르면 됐다. 랜턴을 비춰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시야에 들어오는 별다른 것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을 노리려는 건가?’
어딘가 몸을 숨기고 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순간 뛰쳐나오려는 것일 수 있었다. 일단 전진을 했다.
열쇠를 꺼내들고 여고생에게 랜턴을 넘겨줬다. 여고생은 랜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방을 경계했다. 엘리베이터 잠금장치에 열쇠를 넣으려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묵직하게 눌리는 느낌. 갑자기 튀어 나온 것 같은 죽음의 느낌.
권총을 들어 어두운 복도를 겨냥했다. 여고생은 내 반응에 화들짝 놀라 내가 겨냥하는 방향에 랜턴을 비췄다. 빛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데. 분명히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감각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찌릿찌릿 전신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아우성쳤다. 여고생은 두툼한 방패를 내밀고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어디냐? 어디 있는 거냐?’
자명종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처럼 전신이 경고음을 내는 데, 아무것도 없었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깊고 짙은 어둠 뿐.
열쇠로 열고 들어가면, 여고생을 미끼로 삼으면 도망칠 수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는 여고생을 힐끔 쳐다봤다.
여고생은 방패를 들고 복도를 보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여고생의 팔이 보였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내 말대로 앞을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계속되는 경고음을 묵살하고 주변을 다시 확인했다.
여고생은 내가 겨눈 방향에 랜턴을 비췄다.
천천히 이동하는 불빛. 복도는 분명히 텅 비어있었다.
‘복도가 비어있다?’
자재창고도 비어있었다.
그럼 어디?
사스락- 미미한 소리 아주 작은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설마?
환풍구?
내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순간.
천장 환풍구 구멍 속에서 바비가... 아니, 그것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