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31화 (31/261)

지하 underground (1)

“난 지하실에 내려가 정리를 할 생각이다. 넌 어떻게 할래?”

“예?”

“음 그러니까 나와 같이 할 건지 아니면 너 혼자 독립해서 살 건지 결정해야지.”

“예......”

여고생은 눈을 굴렸다. 생긴 건 고급스럽게 생긴 녀석이 하는 행동은 참 저렴했다. 악연이라면 악연인 이야기를 짧게 설명해줬다.

“결국은 그렇게 틀어진 거지.”

“흐음.”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됐든 지하실을 정리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 그러니 나와 같이 살든 따로 독립해서 살든 이곳에 산다면 지하실 토벌에 손을 보태줘야겠다.”

“예?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요?”

지하실을 정리하겠다는 내 말에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괴물이 엘리베이터 통로를 타고 올라오면?”

“으으으으”

“혼자 사는 널 잡아먹은 괴물이 체력을 회복해서 날뛰면?”

“그만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여고생은 인상을 팍 썼다.

“괴물을... 잡아야 하는 건 알겠어요. 근데 그 언니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어떻게 하든 네가 왜 걱정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하실 건가요?”

“뭘 어떻게 해? 아주 망상에 날개를 달았구나?”

“망상이 아니라, 설마 그냥 죽어버리게 방치하실 생각은 아니신 거죠?”

아마도 나와 둘이 있다는 게 무서워서 그럴 것이다. 바비가 나쁜 여자라고 내가 말한다고 그대로 믿을 녀석도 아니었고 녀석도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같은 여자가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1층 로비에 가면 그 여자가 만든 시체가 있으니까 그거나 보고 이야기하자.”

“시. 시체요?”

인아의 시체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 지 궁금했다. 같은 여자라고 자매애가 생기거나, 같은 남자라고 형제애가 샘솟는 세상이 아니었다. 같은 여자끼리 의지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착각이었다. 인아와 바비는 원수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그 둘이 서로 죽고 죽이기까지 했다.

이런 세상에서 성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남자라서 여자라고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무턱대고 아무 생각 없이 1층 로비에 있는 인아의 시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1층 로비에는 검은 봉지에 싸놓은 여고생의 배다른 동생이었던 그것의 시체도 같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여고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것으로 변한 동생, 남동생을 잡아먹은 괴물이 된 여동생에게 가족애를 가지고 있다면, 안타깝지만 여고생과 내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

천장이 뜯겨 구멍이 뚫린 것도 부족해, 금속 문짝이 반쯤 틀어박힌 엘리베이터 천장을 보고 여고생이 멍한 표정을 했다.

끼기기기긱!

[문이 닫힙니다.]

끄드드드득!

엘리베이터가 살짝 떨렸다. 여고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안전한 거죠?”

“일단은?”

“방금 의문형이었죠? 비상계단으로 걸어서 내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비상구는 전부 방화격벽을 내리고 용접해 버렸다.”

“에엣? 어째서요? 왜요?”

“그게 안전하니까.”

“엘리베이터는 이거 하나라고요. 아니, 이삿짐 엘리베이터 그러니까 화물엘리베이터가 있었지. 그럼 전기라도 끊기면 어떻게 하려고요. 아? 왜 엘리베이터가 되죠? 정전인데?”

혼자서 묻고 답하는 녀석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공용 전기는 태양광발전으로 전력을 충당하니까 당분간 엘리베이터에 전기걱정은 없다. 그리고 시끄러워.”

“.......”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고 묻기 전에 입을 막았다. ‘네 동생이었던 그것이 이렇게 박살을 냈다.’고 말하면 그 뒤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연상됐기 때문이었다.

1층 로비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는 그 무심한 목소리로 내리라고 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피 냄새가 났는데 1층 로비로 나가자 피 냄새가 더욱 짙었다. 검은색 비닐봉지에 둘둘 말린 것은 척 봐도 ‘난 어린아이 시체요.’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창에 꿰인 인아의 시체가 의자 위에 얹혀있었다.

“욱-”

구토를 할 줄 알았더니 구토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토할 것도 없이 전부 소화를 시켰는지도 몰랐다. 어찌됐든 헛구역질 몇 번을 한 뒤,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시체를 외면하는 여고생이었다.

검은 비닐에 돌돌 말린 시체는 작았다. 그 시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떻게 된 건지 묻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고생도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고생은 검은 비닐에 둘둘 말린 시체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것처럼 아니, 알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묻지 않겠다는 건가?’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굳이 변이 가능성에 대해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바비가 변했다면? 죽여야 했다. 이성을 가진 괴물, 그것도 인간의 모습을 한 그것이 됐다면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죽이는 것이 좋았다. 근거리에서 45구경 ACP탄이 통했으니, 위기상황에서 여고생이 방패로 한 번 정도만 막아주면 해 볼만 했다.

엘리베이터 천장에 박힌 금속 문을 전기 절단기로 자르고 용접해 붙여, 두툼한 방패를 만들었다. 무게가 20kg은 족히 될 정도로 두툼하고 묵직한 방패였다. 척 보기에도 무식한 방패를 들이밀자 여고생이 인상을 썼다.

“설마 이걸 들라는 건 아니죠?”

“맞아.”

“이 무식하게 생긴 걸 어떻게 들어요?”

“일단 들어봐.”

으잉-이라는 기묘한 기합소리와 함께 방패를 들어본 여고생이 의외로 들만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어떻게 하라고요?”

“너 둔기로 머리통을 겨냥해서 한 방에 부실 수 있겠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면적이 넓은 방패로 잘 막고 후려쳐. 그냥 확 휘둘러버리란 말이지.”

“어. 어떻게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여고생이었다. 연습이 필요해 보였다.

“자 연습해 보자. 내 쪽으로 휘둘러봐 알았지?”

“예.”

콱-!

“이이양!”

묘한 소리를 내며 방패를 휘두른 방향으로 몸이 딸려가는 여고생이었다. 이건 생각하지 못했다. 방패가 묵직하니 괜찮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 체중이 몇이냐? 45? 43?”

“뭐. 뭘 물어보는 거에욧!”

“그게 아니라. 방패가 대략 20~23kg 정도 나가는데, 네 체중이 너무 가벼워서 방패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원심력을 이용해봐. 전신의 근육을 쥐어짜듯이 돌려서. 이렇게.”

부와아앙! 온 몸을 비틀어 만든 원심력을 이용해 몸을 던지듯 방패를 휘둘렀다. 20kg가 넘는 강철 방패가 회전하자, 주변의 공기가 흔들렸다.

“와. 엄청 무식해 보여요.”

“그래. 그럼 딱 잘됐네. 앞으로 네가 해야 할 행동이다.”

“.......”

*

하룻밤 사이에 체력을 회복한 불가사의한 능력. 여고생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 몸이 변한 것을 깨닫고는 적잖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과도하게 부산스러운 행동이나 저렴한 모습도 그런 불안감을 은연중에 표출하는 방법이었다.

“왜? 불안해?”

묵직한 방패를 붕-붕-휘두르는 여고생에게 말을 걸었다. 입이 툭 삐져나와 방패를 흔들던 여고생은 짜증나 죽겠다는 표정이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는 숨겨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조금 많이 먹었네. 양이 늘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보니 무섭더라고 뭔가 이상해 진 건 아닌지.”

“.......”

“힘도 막 세진 것 같고.”

“.......”

“혹시 나도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닌가? 솔직히 겁도 나고.”

“.......”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걸 걱정한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괴물이 됐다면? 괴물로 변한다면? 뭐가 바뀌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민해 봐야 답이 없는 고민이라면 하지 않는 게 낫더라.”

“...... 고마워요.”

방패를 휘두르고 막는 연습을 한 시간 가량했더니 얼추 모양이 나왔다. 몸을 움직인 여고생은 땀을 뻘뻘 흘렸다. 5월 중순이라 따뜻한 날씨임에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컨디션은 어때?”

“좋아요!”

“이제 내려가자.”

“.......”

“왜? 내려가자니까 싫어?”

“.......”

“그냥 나중에 괴물이 오면 오는가 보다 하면 되겠지 뭐. 괴물들도 야들야들한 여고생을 더 좋아할 텐데.”

“.......우.... 비겁해요.”

“비겁하긴. 우리가 이렇게 웃고 쉬는 동안 지하 2층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당장 편하자고 미래를 지옥으로 만들고 싶어?”

“아... 진짜. 나빠.”

“일단 이것부터 입어봐.”

여성용 바이크 슈트였다. 꼭 전신 타이즈처럼 생긴 옷을 보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여고생이었다. 인아나 바비를 입히려고 챙겨놨던 건데 여고생이 입게 됐다. 대충 사이즈는 맞을 것 같았다.

“이... 이걸 왜 입어요?”

“그거 보기보다 방어력이 좋은 옷이다. 주요 부위에 티타늄합금으로 보강됐고.”

“아. 아저씨는 왜 안 입어요?”

“나라고 안 입고 싶겠냐? 여성용 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헬멧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오토바이 헬멧은 따로 없더라. 그러니까 이거라도 써라.”

“이건 또 뭐에요?”

“아동용 같은데 자전거 헬멧이다. 크기 보니까 머리에 맞을 거 같은데 대충 써. 그리고 이것도 쓰고.”

“고글? 스키고글?”

“눈에 뭐라도 튀면 위험하잖아.”

자전거 용품과 바이크 슈트를 섞어 여고생을 중무장(?)시켰다. 안타깝게도 남성용은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맨 몸으로 가는 것은 위험했다. 잡지와 얇은 책으로 덕지덕지 전신을 두른 뒤, 스키 고글을 썼다.

바이크 슈트를 입고, 금속 방패에 묵직한 둔기를 든 여고생은 뭔가 있어보였지만 잡지를 테이프로 둘둘 말아 전신을 보호한 나는 꼭 야만인 같았다. 여기저기 반짝이는 박스 테이프 옆으로 삐져나온 잡지들... 여고생은 그걸 보고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킥-”

“후-너 그거 쫄쫄이 같다고 싫어했지? 입기 싫으면 벗어라 나처럼 잡지를 붙여주마.”

“아니요. 풉-”

무겁고 딱딱했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

지하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눈앞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딸깍-불을 켜는 소리가 텅 빈 복도를 가득 채웠다. 불이 켜지자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이 보였다.

“우선 비상등부터 다시 낄 테니까 방패 내려놓지 말고 내 옆에 붙어있어.”

“알겠어요.”

고글 안쪽에 있는 눈동자가 제법 단단하게 빛났다.

“아!”

“뭐에요? 무슨 일이에요?”

“아니다. 혹시나 모르니까 잘 보고 있어.”

“예.”

여고생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위기감응을 확인하는 것을 잊고 그냥 내려 버렸다. 후- 작게 한 숨을 쉬고 찬찬히 비상등에 전구를 다시 끼워 넣으며 감각을 관찰했다. 죽을 만한 위기가 있다면 특유의 압박감이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이동했다.

다행히 위기감응이 발동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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