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혹은 믿음의 조건(1)
발상의 전환이었다. 바비가 올라왔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바비를 전혀 신뢰하지 않으니까.
인아는? 최소한 아니 제법 많이 신뢰하고 있었다. 자다가 목에 칼을 꽂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건으로 인해 인아가 흔들렸을 가능성은 있었다.
하나는 자매를 풀어준 사건. 그녀의 노골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자매를 고대로 풀어줬다. 딴에는 풀어준 것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지만 인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내가 주도하면 자신이 위험해진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을 더욱 강하게 부채질 한 것이 바로 바비인형이었다. 인아가 바비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팍팍 티를 냈음에도 바비인형을 그대로 뒀다. 인아의 마음을 잡으려고 했다면 자매들을 내보낼 때 바비도 같이 내보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나는 인아와 바비가 서로 견제하기를 원했다.
그걸 알아차리고 인아가 마음을 고쳐먹었다면? 바비와 인아의 사이가 나쁘지만 나라를 제거하는데 의기투합을 했다면?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다.
후우-
‘진정하자.’
심호흡을 하고 진정해야 했다. 어쩌면 바비의 농간일 가능성도 있었다. 시체를 치우면서 엉킨 부분을 살짝 풀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시체가 사후경직을 일으키며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놀란 인아가 시체가 살아난 것으로 착각 도망쳐 온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시체가 사후 경직으로 꿈틀거리는데 바비가 옆에서 비명을 질러대면 인아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가능한 상황은 둘에서 셋으로 늘어나나?’
펜트하우스는 독립된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지하2층, 지하1층, 1층 로비 그리고 곧바로 펜트하우스 이렇게 버튼이 4개였다. 주욱 지하 2층을 향해 내려가는 도중 1층 로비를 눌렀다. 인아가 어째서 중간에 내리느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바비가 관리실 음, 창고 경비실로 숨었다고 했지?”
“네...”
“내려가기 전에 cctv좀 보자.”
“아?”
창고 관리실이라면 1층 로비에 있는 관리실에서 cctv확인이 가능했다. 인아의 말대로 바비가 관리실로 도망쳤다면 cctv에 보일 것이다.
“없군.”
“......”
cctv에 없었다. 고정형 cctv라 주변을 살필 수 없었지만 텅 빈 관리실만 보였다. 작은 컨테이너 크기의 관리실이었기 때문에 따로 숨을 공간도 없었다. cctv의 위치는 안쪽에서 통유리로 된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통유리가 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괴물이 바비를 잡아간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다시 상황은 둘로 나뉘었다. 바비가 들어왔다가 제 발로 다른 곳으로 나갔거나. 아니면 바비가 관리실로 들어갔다고 인아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전자라면 상관없지만 후자라면 바비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던 인아가 바비와 결탁했다는 어이없는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인아야.”
“예?”
“이거 앞 타임이 녹화 됐을 거야. 틀어봐.”
나는 슬쩍 그녀에게 녹화된 영상을 확인해 보라고 시키며 옆에서 뭔가를 확인하는 척을 했다. 컴퓨터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 들고 있던 창도 내려놔야 했다. 인아가 주저한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었다는 소리였다. 슬며시 가스총 그립에 왼손을 얹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이 무색하게 인아는 털썩 자리에 앉고는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거 처음인데.”
‘내가 너무 긴장했었나?’
바짝 긴장했던 것이 풀리며 자연스럽게 인아가 조작하고 있는 마우스에 손을 얹으며 설명하려는 순간,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은 것처럼 갑갑해졌다. 죽을 정도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느껴졌던 감각이었다. 가슴이 급작스럽게 갑갑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뒤로 몸을 날렸다.
팍!
다리를 박차며 뒤로 점프하듯 몸을 빼는 것과 인아가 왼손에 쥔 무엇인가를 내 가슴에 찌르는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얼음송곳이었다. 맨 처음 바비인형에게 줬던 얼음송곳이었다. 내 눈은 얼음송곳을 보고 있지만 내 손은 이미 가스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빠으어엉!
-뻐으으응!
처음 쏴보는 가스총인데 첫발은 최루제가 나가지 않고 고무탄(?) 같은 것이 나갔다. 최루제를 대비해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인아는 묵직한 통증에 놀라 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자기 팔뚝을 봤다. 연속해서 쏘아진 2탄에는 제대로 최루제가 들어있었다. 최루제가 앞으로 뿜어지면서 다시 굉음을 냈다.
가스총의 소리만큼은 정말 위협적이었다. 하얀 최루제가 뿜어지자, 인아는 고무탄에 맞아 놀라 내렸던 팔을 본능적으로 들어올렸다. 최루제를 팔뚝으로 막았지만 팔뚝으로 최루제를 막을 수 있다면 가스총이란 이름이 아까웠을 것이다.
인아는 최루제를 전신에 뒤집어쓰고는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인상을 살짝 쓰더니 송곳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차하면 달려들 자세였다.
내가 가스총과 망치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한 4~5초? 정도 대치가 이어졌을까?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인아가 눈을 깜박였다. 눈을 깜박이는 것과 동시에 눈물이 주룩하고 흐르더니 맑은 콧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그걸 닦겠다고 소매로 자기 얼굴을 쓱 닦는 순간 발작하든 몸부림을 쳤다.
“으아아앗!”
얼음송곳을 떨어뜨리고 그녀는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려댔다. 두 손으로 얼굴을 대지도 못하고 절절 맸다.
“어으으흑!! 으으으윽!!”
통곡을 하는 것처럼 울어대는 그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울면서 호흡이 거칠어진 상황. 그 때 발차기가 들어가자 컥-소리를 내며 꼬꾸라졌다. 절로 욕이 나왔다.
“이런 썅.”
괴물을 잠시나마 구속하려고 챙겼던 케이블타이 수갑을 채움에도 인아는 반항도 못하고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숨을 쉬기 위해 꺽꺽거렸다.
적당히 거리를 뒀지만 서로 최소한의 신뢰는 주고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대체 뭐가 문제일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의 몸을 탐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놈들이었다면 자신의 배를 쑤시려던 여자를 이렇게 잘 대해줬을 리가 없었다.
강간은 당연했고 목숨이나 붙여 놓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나를 죽이겠다고 칼질을 했었어도 이런 세상이니까 이해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 이해하려고 했다. 다른 놈들처럼 욕정을 풀겠다고 들이대지도 않았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
마음에 안 든다고 죽이려고 해?
"씨발!"
바닥에 떨어진 얼음송곳을 보자 살심이 저절로 뭉클 피어올랐다. 내가 그 이상한 감각이 없었다면? 송곳에 찔렸을 것이다. 내가 조심하지 않았다면? 인아를 의자에 앉히지 않고 내가 앉아 영상기록을 뒤지겠다고 모니터에 집중했다면? 뒤통수에 얼음송곳이 박혔을 것이다.
“아오- 썅!”
간신히 추슬렀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일순간에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안전하게 요새화를 시켰더니 이 따위 짓을 해?
“개년이!”퍽!
그대로 찍어 버렸다. 도장 찍듯 내려찍자, 가녀린 몸이 바닥에 박혔다가 고무공이 튀어 오르듯 튕겨 올랐다. 가슴 속에 울분이 터질 것만 같았다.
“뭐야? 왜 그랬어? 뭐가 문제야?”
“쿨럭-커흑으윽...”
“엉? 안전하게 살아보자고 같이 좀 살아보자고 그러는데 뒤통수를 때려? 왜 그랬는데?”
“죽여... 그냥 죽여 개... 새끼야.”
“죽여? 그래 소원이야? 소원대로 죽여주지. 씨발 좀비새끼들이 갈가리 찢어 먹게 미끼로 써줄게.”
내장이 흔들렸는지 인아가 숨을 몰아쉬다 구토를 했다. 인아는 구토를 하면서도 내게 욕설을 뱉었다.
“우웩- 비겁한 새끼.”
뭐라고? 누구에게? 뭐라고? 그냥 머리통을 걷어차고 지근지근 밟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여기서 그냥 죽이면 시체를 따로 처리하기도 짜증났다. 지하에 있는 좀비들 잡는데 미끼로 쓰는 게 나았다.
찌이이익-
케이블타이로 만들어진 수갑이 눅늘어진 그녀의 양손을 우악스럽게 묶었다. 최루제의 효과 때문인지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처연한 얼굴로 인아가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당신은 자기 자신만 생각했어.”
어디서 개소리에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지 모르겠다.
“하? 뭐라고...... 그래?”
마지막 가는 길인데 개소리라도 지껄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 뒀다.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자 토사물과 눈물 콧물에 범벅된 그녀가 늘어진 낙지마냥 딸려 올라왔다. 제 발로 갈 년은 아니었다. 끌고 가는 것도 힘 낭비였다.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혀 의자를 밀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바퀴달린 의자가 앞으로 움직였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
무시했다.
“쿨럭쿨럭- 내가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도 않고 당신 생각만 했어!”
“그러면 니 생각대로 싹 죽였으면 그럼 속이 시원했냐?”
“왜 안 죽였는데? 왜?”
"......"
"그렇게 깨끗해? 당신이 그렇게 고고하냐고? 너도 사람 죽였잖아. 이 고자 새끼야."
"......"
"죽여서 살아 놓고 뭐가 그렇게 착한 척이야. 어? 뭐가 그렇게 잘났나고!"
기분이 더럽다 못해 구겨졌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소원대로 이제는 그냥 죽이기로 했으니까 걱정마라.”
“쿨럭-흐호호홋. 그래 당신은 그렇게 혼자 살아남을 거야. 전부 죽이고 혼자 자위나 하겠지. 크크쿨럭... 누굴 믿겠어?”
“뚫린 주둥이라고... 하? 마음대로 씨부려봐.”
차갑게 식은 정신은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미끼를 쓸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지하2층 관리실에 2마리가 있으니까. 그 놈들부터 정리해야겠지? 아무래도 3~4마리가 있는 지하 1층 다목적 홀은 혼자 처리하기 힘들었다.
“당신 단 한 번이라도 날 믿은 적 있어? 아니 날 마음에 품으려고 해 보기는 해봤어?”
“네년을 믿었으면 진즉 죽어 나자빠져 시체가 됐겠지.”
“아라가 그년이 어떤 년인데. 그년하고 나를 붙여놔?”
“니들 사이가 어떤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그렇게 싫다고 했으면 왜 싫어하는지 물어보기라도 했어? 어? 어엉엉엉.”
“.......”
“그년들을 놔주지 말자고 그렇게 했는데도.... 그년들을 놔주고.... 아라 그 개 같은 년을 살리겠다고 날 이용한 거잖아.”
“.......”
“아니야? 처음부터 날 이용한 거잖아.”
“.......”
“왜 그랬어? 내가 더러워서 그랬어? 나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띵동 문이 열립니다.]
인아의 절규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무감정한 안내음이 울려 퍼졌다.
“날 더러운 년 취급한 거잖아. 겉으로는 웃으면서 언제 죽여도 뒤끝 없게 다가서지도 못하게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