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주다 (1)
인간은 자신이 아는 정보에 따라,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 판단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시야는 협소하고, 좁기 때문에 지향성을 가졌다.
나도 인간이기에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약탈자들을 냉정하게 죽였던 것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행동을 주저하게 됐다. 바이러스의 여파로 냉정하게 행동했던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냉정해야 해.’
이런 상황에서는 냉정해야 했다. 후회는 없었다. 다만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다보니 이들 자매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풀어주는 것이 최선일까? 다시 생각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간하고 조교하고 지배하면서 신경을 예민하게 쓰고 싶지 않았다.
강간하고 죽여 버린다면 내가 죽였던 약탈자들과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심리적 안정을 포기하는 짓이었다. 내 행동에 대한 정당성은 이 미친 세상에서 내가 미치지 않게 해주는 버팀목이었다.
그랬다. 그래서였다.
이 두 여자가 고기방패로 전락하든 아니면 이 기회를 살려 순수하게 살아갈 기회로 만들든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이용이든 기회든 선택권이 그녀들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피식-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를 죽였다. 남자친구를 죽였다. 남동생을 죽였다.
그래놓고 두 여자에게서 뭘 원하는 걸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인정받고 싶은 건가?
“하- 빌어먹을...”
그녀들이 제 발로 구렁텅이에 빠지길 원하는 건가?
아니면 양쪽 모두일까?
선택을 맞기고 내 손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은 걸까?
예상했던 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이 여자들을 왜 살려뒀을까?
여자들이 저항했더라면?
끝까지 싸웠더라면 죽였을 것이다.
그래 아마도 죽였을 것이다.
저항하지 않았기에 살려줬다.
그렇다. 나는 단순한 살인자나 약탈자가 아닌 것이다.
이들을 살려준 것은 이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었다.
후읍- 숨을 몰아쉬었다.
흐트러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딸그락. 얼음이 투명한 크리스털 잔에 부딪쳤다. 별빛을 담은 위스키 잔에 둥실 떠있는 동그란 얼음. 얼음송곳으로 동글게 깎은 얼음은 호화롭기까지 했다. 피식-이렇게 비싼 술을 세상이 이지경이 돼서야 먹어보다니 아이러니했다.
“후-좋기는...”
한 숨을 내뱉었다. 욕만 느는 것 같았다. 입에서 위스키 특유의 향이 났다. 조금 부족했다. 위스키 몇 방울을 향수 뿌리듯 여기저기에 발랐다. 훅-하고 짙은 주향이 퍼졌다.
술 냄새를 풍기며 작은 여자가 혼자 갇힌 방에 들어갔다. 이제 모든 것은 이들에게 달렸다. 진실을 보거나 보이는 것을 믿거나. 살거나 죽거나. 하아- 일그러진 미소가 한숨처럼 지어졌다. 술 냄새를 풍기며 썩은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들어온 나를 보고 작은 여자가 뾰족한 목소리를 냈다.
질리지도 않고 겁도 없는 녀석이었다.
“언니는? 언니에게 무슨 짓을 했지?”
작은 여자는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으르렁 댔다. 이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면 제법 먹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나 싶었다.
“무슨 짓이라니? 정중하게 대했다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주자 작은 여자가 미소와 함께 퍼지는 술 냄새를 맡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언니’를 중얼거리는 작은 여자였다.
“네 언니 덕에 나가는 거다. 나가서 말 잘 들어라.”
‘언니 덕’이라는 말이 방아쇠를 당겼다.
“뭐... 뭐야! 너... 우리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깨를 으쓱하고 술기운이 남아있는 침을 삼키며 느릿하게 진실만을 말했다.
“아무 짓도.”
그렇게 작은 여자와 나는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알콜 기운 때문인지 후끈한 열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술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증오 때문인지 작은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잘하라고.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하아-"
"......."
작은 여자는 내 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가 나 찢어질 것처럼 질린 입술과 노려보는 눈동자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철컥. 끼이이익.
창문은 달빛과 별빛으로 파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큰 여자는 내가 방에 들어가자 바짝 긴장을 했다. 바짝 긴장했던 모습도 내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보고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점점 가빠지는 호흡. 그녀는 자기의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밖으로 튀어나와 흔들리는 것처럼 숨을 색색 몰아 쉬웠다. 숨을 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털어내듯 그녀에게 말했다.
“댁 동생 말이야. 대가 너무 드세더라고. 그래서야 어디 사랑받겠어?”
술 냄새와 열기가 뒤섞인 내 말에 큰 여자가 파르르 떨었다.
“무... 무슨 짓을... 걔는 아직 학생이라고요.. 고등학생인데.”
“무슨 짓을 하긴, 그저 단 둘이 진지한 대화를 했을 뿐이라고."
진심을 담아 느릿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큰 여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고등학생이라고요. "
큰 여자는 동생이 여고생이라는 것만 반복했다. 모른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고 중얼거렸다.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뭘 몰라? 아주 드세기만 하더라고, 요즘 고등학생은 전부 다 그런가?”
“이... 이... 더러운 자식.”
피식-웃음이 나왔다. 큰 여자의 파리한 안색이 분노로 물들었다.
“뭐. 믿거나 말거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말이지. 여기서 나가면 부디 잊고 살라고."
"......"
파르르-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우리가 만난 건 그냥 운이 나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잘 살라고.”
큰 여자는 밖으로 나가는 내 등을 향해 저주 섞인 울음소리를 내 뱉었다.
"그래.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운이..."
후끈후끈 몸에서 기이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두 자매와 개별 면담(?)을 하고 올라오자 인아가 쪼르르 달려왔다. 내 안색을 살피는 것이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어땠어요? 좋았어요?”
“좋기는.”
“설마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던 건가요? 큰 애? 작은 애? 설마 둘 다?”
“됐다. 이제 그렇지 않아도 한계거든.”
한계라는 말에 인아의 표정이 확 뭉개졌다.
“안했어요? 안했죠? 안 한 거죠? 왜 안했어요?”
내가 하지(?) 않은 것이 인아의 뭘 건드렸는지 인아는 흥분하고 있었다. 술 냄새까지 풍기고 있는 것을 보고는 뭔가를 오해한 것 같았다. 정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흘러가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아저씨 왜 안했어요? 왜 참아요?”
“.......”
“술까지 먹고 이게 뭐에요? 이런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서 정말.”
인아는 분노인지 회상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인아는 배신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을 더 이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남자는 다 똑같아야 했다. 내가 이런 세상에서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지키는 것이, 두 자매를 고이 내보내는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더 참담하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래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이런 세상에서 자신의 욕구에 충실했던 자들을 만났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차이를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안타까웠다.
“왜 그러는 거죠? 뭐가 문제에요? 이런 세상에서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건데요? 네?”
그녀는 화까지 냈다. 화를 내야 겪은 일에 위로가 되는 것처럼 말했다.
“마음에 들면 그냥 눌러버리면 되지 바보같이 왜 그러는데요?”
“.......그만 해라.”
“뭘 그만해요?”
상처 받은 사람은 둘로 나뉜다.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이 받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자신이 상처를 받았기에 다른 사람도 자신 만큼 아파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전자보다 후자가 더 많은 것이 안타까운 진실이었다.
만약 세상에 전자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면, 여러 가지 폭행 사건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 그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 이러지 말자.”
“아저씨가 믿지 못하게 그러니까 이러죠. 아저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알 수 없어요.”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고 있으니까 이만 하자.”
인아가 포기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그녀의 입장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무너지면 똑같은 꼴을 당할 것이다.
인아가 가진 공포는 경험에서 기인했다. 남동생, 아빠, 남자친구에게 두 달 간 보호를 받은 자매들은 모르겠지만 인아는 폭력적으로 돌변한 남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직접 경험한 피해자였다.
그렇기에 지금 이 평화로운 상황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것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죽지 않더라도 이곳에 다른 남자들이 오면 어떻게 하나? 도망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공포.
이곳을 지키려면 혼자로는 무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필요했다. 인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설마 진짜 그냥 풀어줄 생각이에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
인아에게 내 생각을 말해주면 당장은 안도하겠지만 길게 보면 더 좋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일반인들과 조금 달랐다. 어쩌면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변했을지도 몰랐다.
눈을 감자. ‘정말 미치겠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들은 사람들을 데려올 것이다. 놔주는 것은 그녀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변한 세상은 그녀들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은 그녀들이 하는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게 다 핑계라는 것을 난 내가 변하는 게 두려울 뿐이었다.
*
따로 하루 동안 갇혀 있던 두 자매는 서로 보자마자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울어댔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지만 그걸 정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언니... 흐윽... 언니...”
“괜찮아?”
“난 괜찮아. 언니는? 훌쩍. 언니...”
“그래 언니도 괜찮아. 괜찮으니까.”
“아니야. 나 때문에...”
훈훈한 모습이었다. 두 자매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날 노려봤다. 나는 가방을 내밀었다. 2리터짜리 생수 두 병과 통조림, 즉석식품이 약간 담긴 가방이었다.
“여기 자동차 키. 지하1층 주차장 A3라인에 있는 차다. 지금 갈 건가?”
“당장 나갈 거야.”
작은 여자가 소리치듯 말했다. 큰 여자는 자동차 키를 꼭 쥐었다.
“그래? 그럼 내려가지.”
내려가서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인아가 방화격벽을 차단시키고 용접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볼 수밖에 없었다. 용접을 하던 인아는 두 여자를 보고는 인상을 썼다. 지하주차장으로 나가는 문을 열며 말했다.
“봐서 알겠지만 전부 폐쇄했다. 주차장도 막을 거고 나가면 돌아오지 못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획-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가는 두 여자였다.
두 여자가 탄 차량이 떠나는 모습이 cctv화면에 잡혔다. 곧바로 지하주차장 방화격벽을 내리기 시작했다. 지하주차장도 화재에 대비해 구획별로 차단이 되는 구조였다.
위이잉-소리와 함께 서서히 지하격벽이 차단됐다. 지하주차장과 건물이 연결되는 부분을 모조리 차단하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