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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20화 (20/261)

살아남은 자 (4)

살아남았다고 살인자란 말인가? 내려오려고 했으면서? 살인자? 그래 웃기는 소리지만 사람을 죽였으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저 가증스러운 년들을 갑자기 죽이고 싶어졌다. 미치도록 죽이고 싶었다. 삭초제근하고 싶었다. 그냥 콱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

근데 그럼 정말 뭔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미 사람을 죽였기에 더 이상 잃어버릴 게 없음에도 주저하게 됐다. 내 주저함을 알아챘는지 포로의 주제를 잊고 대드는 작은 여자였다.

“어떻게 알아. 우리가 내려가려고 했을 지, 당신이 어떻게 아냐고?”

“하- 진짜. 됐다. 그렇게 뻔뻔하니 오래 살아남을 것 같구나 너. 내가 정말 살인자라면 너희들을 살려줬을까? 그걸 생각해 봐라.”

한 가닥 남아있는 마지막 선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 함부로 범하지 않겠다는 그 마지막 선이 언제 끊어질 지 매일 위태로웠다.

다른 생각이 나지 않게 매일을 혹사하다시피 일을 찾아서 했고 만들어서 했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욕구 불만은 쌓이고 있었고 작은 불씨만 떨어져도 폭발 할 것만 같았다.

“너와 언니. 어떻게 할래? 내 얼굴 보기 싫잖아. 아니, 날 죽이고 싶잖아. 나도 그런 너희를 보면 불편해.”

솔직히 그냥 죽여 버리고 잊고 싶은 적도 있었다. 매일 방에 가두는 것도 귀찮았고 이렇게 살려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왜? 죽....”

죽이지 않느냐는 뒷말이 나오기 전 내가 먼저 말을 받아줬다.

“그럼 죽여줄까?”

죽고 싶다면 단 번에 죽여줄 용의가 있었다. 지금도 정말 미치도록 죽여버리고 싶었다. 말 속에 담긴 진심을 느낀 작은 여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피가 살짝 배어나왔다.

“선택권을 주지.”

“......”

“하나. 여기서 살면서 방을 치우고 정리하는 일을 한다. 그냥 먹여줄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물론 치우고 정리할 때 이외는 아래층 빈 집에서 갇혀서 살아야겠지.”

작은 여자는 날 쏘아봤다. 인아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둘의 반응을 무시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둘. 지하실 정리를 돕고 여기를 떠난다.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문을 완전히 틀어막을 생각이다. 틀어막기 전에 내보내 주마. 둘이 사나흘 정도 먹을 식량을 줄 테니,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차를 타고 떠나라.”

“아저씨 잠깐만요.”

나를 보고 놀란 토끼눈을 하고 인아가 말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묵묵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 남을 건가? 아니면 떠날 건가?”

“.......”

“.......”

“자동차 라디오를 틀면 피난처를 안내하는 방송이 나올 거다. 거기로 가라. 거기서 원수를 갚겠다고 사람들을 모아와도 좋다. 그 땐 확실히 죽여주지.”

“아저씨 미쳤어요?”

인아가 옆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아는 처음부터 이들을 죽이자고 했다. 처음에는 나도 죽이려고 했지만 인아가 죽이자고 하자, 오히려 죽이기 힘들어졌다. 인아가 죽이자고 말할 때 꼭 앞으로 변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죽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인아를 통해 보이면 답답해졌다. 나도 저렇게 쉽게 사람을 죽이자고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인아의 그 과감함 잔혹함의 진실은 두려움과 겁에 질려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아저씨 무슨 생각이에요. 풀어주면? 이년들이 고마워 할 것 같아요? 아니라고요. 원수를 갚겠다고 몸 팔아서 남자들 데려 올 거라고요.”

인아가 극렬하게 반대했다. 작은 여자는 슬그머니 현실적인 문제를 언급했다.

“도로가 막혔을 거라고...”

“군인들이 왔던 것 봤을 텐데? 그건 도로가 어느 정도 뚫렸다는 소리다. 운이 좋으면 살아서 다른 생존자를 만나겠지.”

“......”

“진짜!!! 아저씨 돌았죠? 정신이 없는 거죠? 군인? 지금 군인이 남아있나요? 얘들이 무장한 사람들을 데려오면 어떻게 하려고! 군인은 총가지고 있잖아요! 자살을 하려면 아저씨 혼자 하지 왜 나까지 끌어들이는 건데요?”

인아가 부르르 떨었다. 인아는 남자들에게 또 윤간을 당하지 않을까 겁에 질려있었다. 대담한 농담을 하고 첫 인상이 무표정했던 것은 감각을 감정을 스스로 차단했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며칠 동안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 남자들이 몰려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가 느끼는 것은 순수한 공포였다.

그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인아가 날 만류한 데에는 나를 걱정하기보다 그녀 자신을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와 나와의 관계는 딱 그 정도의 거리를 가진 관계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거리를 좁힐 마음도 의지도 없었다. 적당히 위로를 주고받는 거리 거기까지가 공전궤도였다.

두 자매를 풀어주면 또 다른 비극을 만들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비극에 나는 없을 것이다. 그녀들은 복수를 하겠다고 만나는 자들에게 이곳에 식량이 많다고 할 것이다. 그녀들을 과함께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두 자매는 지하실을 차단하는 것을 보고 지하주차장을 통해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면 1층 로비가 있는 방향으로 올 것이다.

1층 로비. 그렇게 두 자매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약탈자들을 데려 오면 그들을 반기는 것은 좀비들일 것이다. 그것도 군인들도 철수할 정도로 빠르고 단단한 좀비. 좀비들을 전부 죽일 정도로 강력한 무장을 한 사람들을 데려온다면 나만 노릴까? 이곳에 온 김에 아파트 전체를 뒤집을 것이다. 그렇게 강력한 세력이 있다면 벌써 진작 좀비를 몰아내고 회복한 지역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결말이 분명했다. 그녀들이 데려오는 사람들이란 비루하고 굶주리고 욕정에 가득한 자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자들을 모아서 와 봐야 널려있는 좀비들의 숫자를 늘려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좀비들이 많아지고 강해지면 이 요새는 더 안전해 질 것이다.

두 자매를 풀어주는 것은 그녀들의 복수심을 이용해 이곳을 더욱 안전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인아는 이런 내 생각을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챘다면 그녀도 나를 악마라고 생각 할지 몰랐다.

이건 이대로 이렇게 넘어가는 것이 좋았다.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실망할 테니까. 또 날 믿지 못하고 인아가 엉뚱한 짓을 한다면 그 또한 그 뿐일 따름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씁쓸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작은 여자는 이를 앙다물고 노려봤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언을 해줬다.

“여기에 남든 떠나기로 결정하든 잊어라. 잊고 살아라. 그래야 살 수 있다.”

“이...익...”

“다른 사람들이 너흴 도울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그들은 너흴 보자마자 욕구부터 채울 확률이 높으니까.”

“세. 세상에는 당신처럼 악인만 있는 건 아니에요.”

입을 다물고 있던 큰 여자가 힘을 쥐어짜는 것처럼 대꾸했다. 악인이라. 뭐라고 하더라도 저들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악인이었다. 저들의 가족이 날 죽였다면 날 죽인 가족을 악인으로 매도했을까?

날 죽이고 식량을 약탈해 자기들이 배불리 먹게 된다면 기뻐했을 것이다. 그랬을 때도 악인을 찾았을까? 그래 단지 그뿐이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럴 것이다. 그뿐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보다 좋은 사람들 많을 것이다. 담담한 내 말투에 작은 여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큰 여자는 퀭한 눈동자로 있다가 숙였던 고개를 스윽 올리더니 날 쳐다봤다. 텅 빈 눈동자에는 끝없이 가라앉은 허무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알겠어요. 지하실 정리하는 것을 돕죠. 풀어주신다는 말 믿겠어요.”

“약속하지.”

“아저씨!!!”

“언니!!!”

인아와 작은 여자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지만 결정은 변복되지 않았다.

*

그렇게 4명이 지하실을 정리하고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아라는요?”

인아가 바비인형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바비인형에 ‘아라’라는 이름이라니 어쩐지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인아와 아라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운은 그 둘이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세계에서 안면이 있다는 것은 친해지거나 아니면 원수거나 둘 가운데 하나로 흐르기 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둘은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고 있었다.

“바비는 그냥 둬.”

인아의 표정이 순간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출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였다. 뭔가 빈 정 상했다는 것처럼 일그러졌던 표정은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도 바비인형을 특별하게 대한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있어 봐야 문제만 일으킬 걸.”

“......”

예상대로 지하실에는 좀비가 별로 없었다. 주차장 방면에는 많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주차장에 많든 말든 신경 쓸 것이 없었다.

끼이이이-

고작 두 달이 지났을 뿐인데 경첩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지하실도 공용 전기라서 그런지 불이 들어왔다. 다행이었다, 랜턴으로 비춰야 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수영장에는 없어요.”

“그럼 다목적 홀로 가자.”

“네.”

인아가 쇠파이프에 식칼의 칼날을 용접해 붙인 창을 들고 대답했다. 나도 5kg짜리 바벨을 철근에 용접해 만든 둔기를 들고 살폈다. 두 자매는 문짝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앞장을 섰다.

그그극. 그그극.

다목적 홀 안에서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났다. 방패를 든 두 여자도, 나와 인아도 모두 긴장했다. 다시 찬찬히 내 가슴에 집중을 했다. 죽을 정도의 위기라면 흉부에 압박이 느껴질 것이다. 후우- 찬찬히 심호흡을 하고 가만히 신체 변화를 관찰했다. 확실히 약간 묵직한 것을 보니 안에 뭔가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압박이라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좋아. 처리하자.’

[들어간다.]

[방패는 밀리지 않게 꽉 붙잡고 늘어져.]

두 자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에 문을 연다. 문을 열면 방패 둘이 붙어서 한 번에 들어가.]

끄덕. 끄덕.

[인아는 창으로 견제하고 마무리는 내가 한다.]

[목을 노려라. 눈이나.]

인아가 내 눈을 마주봤다. 그녀의 얼굴은 처음 내 배를 쑤셨을 때처럼 무표정으로 변해있었다. 믿음직스러웠다.

[하나.]

[둘.]

[셋.]

끼이이익.

방음처리가 된 문이 열렸다. 주로 파티장으로 활용되는 다용도 홀이었기 때문에 방음시설이 되어 있었다. 묵직한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동면에서 막 깨어난 동물들처럼 몸을 비틀기 시작하는 그것들의 윤곽이 보였다.

[불부터 켜!]

인아가 재빨리 불을 켰다. 넓은 홀에 몸을 뒤틀기 시작하는 것들의 숫자는 모두 다섯이었다.

‘다섯.’

처음치고는 많았지만 이쪽은 병과가 분류된 넷이었다. 충분히 가능했다. 사고를 예감하는 감각도 그렇게 크게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저 단순한 좀비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우선 외양이었다. 흔히 알고 있는 좀비는 죽었다가 되살아난 시체를 의미했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뜯긴 자리가 그대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팔이 뜯겼으면 팔이 뜯긴 채로 움직이고 내장이 빠진 상태로 움직이고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좀 달랐다. 오랫동안 굶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바짝 마른 모습과 약간 회색빛으로 변한 피부색을 제외하면 사람들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상처를 입은 곳도 없었고 결손된 신체부위도 없었다. 말 그대로 사람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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