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 (1)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온몸에 잡지를 넣은 사내가 떠올랐다. 중무장이었다. 전신과 팔뚝에 잡지와 책을 둘둘 말아 붙이고 있었다. 결코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벨소리 몇 번 울릴 시간에 그런 준비를 한다?
그렇게 빨리?
불가능했다.
사내들 전부 그렇게 전신을 갑옷처럼 감싸고 집에서 생활한다?
그럴 리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비상구를 차단했다가 다시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오기 직전이었다는 소리였다. 비상구를 열고 내려오기 전, 여자가 많은 우리가 올라가는 소리를 듣고 안으로 유인한 것이었다.
내가 약탈자 그룹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처럼 펜트하우스의 사내들도 우리가 들어오도록 유인한 것이었다.
나도 약탈자들이 있냐고 벨을 눌렀을 때 사람이 있다고 대답해줬다. 대화를 하기 싫다면 꺼지라고 해줬으면 그만이었다.
이들은 그러지도 않고 습격했다.
정말 단순한 운이었을까?
불안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위층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저들이 먼저 내려왔다면?
만약 그 아이 셋만 있는 집을 확인하고 있을 때, 뒤를 잡혔다면?
약탈자 일행인 두 여자를 앞장세우지 않고 내가 먼저 들어갔다면?
저들이 조금 더 일찍 내려와 내가 약탈그룹과 싸우고 난 직후나, 직전에 밀고 들어왔다면? 나는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어영부영 시간을 끌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불안감을 무시하지 않아서 살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은 일순 갈라졌다.
서늘하게 식은 심장. 차가워진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살았다는 기쁨도, 펜트하우스를 차지했다는 성취감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날카롭게 갈린 경계심이었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빨리 판단했기 때문이야.’
뜸들이지 않고 곧바로 위를 확인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화? 이런 상황에서 대화를 하겠다고 어영부영하다가 죽기 쉬웠다. 차갑게. 더 냉정하게 사태를 살피고 더 합리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동료? 노예? 지금은 사치다.’
무난한 인간관계? 조금씩 개선되는 인간관계? 물렁하게 대했다가는 언제 죽을지도 몰랐다.
안으로 들어가자 시트콤은 아직도 촬영중이었다. 바비인형은 내 경고 때문인지 기절한 여자의 다리를 케이블타이로 묶으려고 하고 있었고 작은 여자는 필사적으로 바비인형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시체만 다섯 구다. 죽고 죽이고 다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데 묶니 마니 하면서 서로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은 비정상적이었다. 꼭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들이 이상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가기 전이었다면 웃고 그냥 지나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장난쳐?”
내 나지막한 한마디에 바비인형과 작은 여자가 동시에 날 쳐다봤다.
“이게 지금 장난이냐고!”
그대로 바비인형을 걷어찼다. 킥복싱의 라운드 킥처럼 휘둘러 찼다. 정강이에 맞은 바비인형의 몸통이 붕 떠서 벽에 처박혔다.
같은 편을 그대로 걷어찬 것에 놀랐는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작은 여자가 굳었다. 그대로 작은 여자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단련되지 않은 주먹 끝에 보드랍고 연약한 살결과 갈비뼈가 느껴졌다.
퍼억!
“끅-”
명치를 강하게 맞아본 사람은 안다. 호흡이 멈추는 느낌. 숨통이 틀어 막히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기이한 감각은 공포를 동반했다.
작은 여자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숨을 쉬기 위해 끅끅거렸다. 눈동자에 어린 것은 원수에 대한 증오가 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래 이게 당연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너 죽고 싶어?”
“히으윽.끄으.”
아직 숨이 돌아오지 않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버둥거리는 작은 여자를 발로 밟아 누르며 다그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고개를 끄덕여.”
고개를 끄덕이며 버둥거렸다. 발로 다시 한 번 밟았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여자의 몸이 바닥을 튕겼다. 간신히 진정되고 있던 호흡이 다시 막히며 작은 여자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정신이라면 시트콤을 찍고 있었을까? 내가 자리를 피한 이유는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작은 여자의 몸을 뒤졌다. 청바지에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작은 여자는 내가 몸을 더듬어 확인해도 제대로 반항하지 못했다.
작은 과도가 작은 여자의 허리춤에서 나왔다.
“하?”
“흐윽!”
“이게 어디서 나왔을까?”
작은 여자를 살포시 밟으며 가만히 생각을 해봤다. 본래부터 허리춤에 과도를 숨기고 있었다면? 식칼을 잡겠다고 팔을 뻗었을까?
‘아니.’
칼이 있는데 또 칼을 잡겠다고 하다가 바비인형이 그대로 송곳으로 찌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고 보니 뭔가가 어색했다.
“설마?”
완전히 모르는 사람인데 작은 여자가 바비인형에게 반항을 했을까? 최소한 안면을 텄다는 소리였다. 아는 사람이 자기 손목을 묶으려고 하니 자연스럽게 반항을 한 것이었다.
설마 나를 죽일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했기 때문에 반항을 한 것이다. 아니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자기 아빠와 남동생을 죽인 사람과 한패였다는 배신감에 눈이 돌아가 저항을 했을 수도 있었다.
어찌됐든 둘이 아는 사이라고 가정하면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내가 나갔다고 오는 동안 작은 여자에게 바비인형이 과도를 건네 줬다는 것도 그랬다.
황당한 장면도 마찬가지, 둘이 뭔가를 작당하는데 불쑥 내가 들어오자 그 어설픈 시트콤 연기를 한 것이었다. 위화감을 느꼈던 이유가 둘이 알던 사이라는 가정으로 깔끔하게 풀렸다.
“너희들 아는 사이구나?”
“히끅-”
나지막한 내 목소리에 바비인형의 딸꾹질 소리가 화답했다.
아주 친한 사이였다면 사내들과 엉겨 붙어 싸우고 있을 때 송곳으로 날 찔렀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았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생판 처음 보는 내 말에 따르기는 껄끄러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나간 사이에 두 여자 사이에 무슨 작당이 있었을까? 간단했다. 바비인형과 짜고 나를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아니면 작은 여자에게 필사적으로 자신과 나는 상관이 없으며 탈출할 수 있게 돕겠다고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히죽- 내 미소에 바비인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발에 밟혀 있는 작은 여자의 호흡이 다시 고르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퍽! 다시 걷어찼다. 꺄흑! 작은 여자는 간신히 피던 등허리를 다시 새우처럼 말고 컥컥댔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됐다. 단호하게. 단호하게 행동해야 차후 불필요하게 피를 묻히지 않았다. 어설프게 행동했기 때문에 두 여자가 날 물로 보고 이런 유치한 짓거리를 계획한 것이었다.
“그래. 맞아. 그런 거야.”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 내린 것이지만 너무나도 명확해 보였다.
“히끅 그게... 그게 아...”
뭐라 변명하려는 바비인형의 배를 걷어찼다.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꼬꾸라지는 바비인형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발로 차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한 방에 장파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장파열로 죽으면? 죽으라지. 독한 마음이 들었다.
남학생도 살려주겠다고 마무리를 안했더니 그새 뒤를 찔렀다. 이놈의 집구석은 죽일 생각만 하는 놈의 집구석일 것이다. 대체 무슨 정신이면 이러지? 내가 그렇게 순하게 생겼나? 어지간하면 같이 살아보자고 했더니 속여? 뒤에서 작당을 해?
바비인형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가볍다. 여자의 몸은 이렇게 가벼운 것인가? 한 손으로 멱살을 움켜쥐고 잡아당기자 손아귀에 잡힌 부분의 옷이 찢어질듯 늘어났다. 교수형을 집행하는 것처럼 매달린 바비인형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바비인형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 일그러진 표정.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만 같은 살인자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과거로 돌아갈 길 없는 막다른 얼굴이었다.
으지직-찌이이익- 멱살을 잡은 부분을 거질게 휘두르자 옷이 찢기며 바비인형이 내팽개쳐졌다. 콜록거리는 기침소리와 숨을 고르는 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채웠다.
기분도 더럽고 세상도 더럽고 모든 게 더러웠다. 혼자 뒤치닥거리 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내 배를 찔렀던 용감한 여자가 생각났다.
*
바비인형과 작은 여자, 기절한 큰 여자를 끌고 내려왔다. 셋을 모두 묶어 작은 방에 몰아넣고 내 배를 용감하게 쑤셨던 여자를 풀어줬다. 오른손 바닥에 베인 상처는 피딱지가 붙어있었다.
“먹어.”
복숭아 캔 하나를 던져줬다. 여자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캔을 따서 꼭꼭 씹어 먹었다. 확실히 이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달랐다.
“그놈들하고는 원래 알던 사이였나?”
고개를 흔들고 먹는 것에 집중하는 여자였다.
“그럼 왜 날 그렇게 공격했지?”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여자가 먹던 통조림을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남자니까.”
“남자라서 일단 찌르고 봤다고?”
어이가 없었다. 여자는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다시 통조림을 먹기 시작했다.
“그럼 난 남자니까 또 찌르겠네?”
내 물음에, 피식-하고 여자가 웃었다. 그 웃음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미소였지만 가식적이지 않았다. 내가 정색을 하고 쳐다보자, 여자는 샐죽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가로 저였다. 당장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이야기는 해볼 만 했다.
앙큼한 바비보다, 원수관계가 된 두 자매 보다, 차라리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목숨을 걸고 나와 싸웠다. 여자가 그렇게 싸우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뒤 끝 없는데, 너도 뒤 끝 없지?”
씨익-웃는 여자였다. ‘이놈 진짜 골 때리는 놈이네.’ 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노골적인 표정이 차라리 나았다.
“잘해 보자.”
“날 믿는 거야?”
“언제 봤다고 믿어?”
“풉-장난쳐?”
“지금 당장 믿는다면 거짓말이고. 서로 믿어보려고 노력 하자는 거지. 어차피 혼자 살아남긴 힘든 세상이잖아. 안 그래?”
“......”
여자는 침묵으로 동의를 했다.
“비번 알아? 너한테도 알려줬어?”
바비인형은 무조건 모른다고 했었는데.
“쟤는 모른다고 하던데?”
“그래요?”
여자는 바비인형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것 같았다. 그냥 싫다는 표정이 아니라 일종의 애증, 어쩌면 증오에 가까운 감정으로 보였다.
“일단 물건 같은 거, 필요한 건 집에 들어가서 가져와야 하니까요. 일일이 남자들이 가져오지도 않았고.”
약탈을 하던 무리들은 자신들이 턴 집의 비빌 번호를 전부 4885번으로 일괄 고정했다고 한다. 식량을 넣어둔 집만 빼면 말이다. 식량을 모아둔 집의 번호는 남자들만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남자들을 전부 죽였으니, 그 집만 토치로 열면 됐다. 말이 나온 김에 식량부터 챙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