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죽이고 (1)
윙윙- 위협적으로 망치가 돌아가고, 여자들과 내가 팽팽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살기가 피어오르고 언제 피바다가 될 지모를 정도로 긴장감이 올라갔다.
그 살기를 흩으려는 것처럼 여학생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나에게 달라붙는 여학생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여아는 벌써부터 울고 있었고 5학년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은 눈이 빨갛게 변해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들이었다.
“애들이라고. 애들끼리 있다고!”
울컥했다. 이것들을 풀어준 게 실수였나? 지금이라도 쳐버릴까 하는 생각이 수십 번도 들었다 말았다. 도와줘야 하는가? 도의적으로 보면 도와주는 게 맞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도의를 따질 수 있을까? 결코 아니었다. 자기들도 알면서 나에게 도의적 책임을 묻는 여자들이었다. 그 행태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라는 건가? 애들이라고 안심하기는 힘들었다. 밖으로 나가겠다고 중앙현관을 열고 나간다거나, 더 심각하게 망치 같은 것으로 중앙현관을 깨고 밖으로 나가겠다고 설치면?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었다.
애들이라서 더 큰 문제였다.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책임 질 자신이 없었다. 이기적이라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두기도 뭐했다. 아이들이 배고프고 춥다고 불이라도 피우다가 홀랑 태운다면? 창문 밖으로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외쳐서 주변 생존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면?
기괴한 성벽이 있는 자들이 이곳으로 올 것이고 온 김에 다른 집도 털어보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이런 잡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층에 올라가자고 했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렇게 나오면 곤란했다.
“꼭 그래야겠어?"
"이대로 두면 애들 굶어 죽을 텐데?”
“애들인데?”
“어쩌라고? 굶어 죽으니까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와-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네."
"그럼 나보고 먹여 살리라고? 아니면 굶어 죽기 전에 깨끗하게 죽이라고? 이런 씨발- 진짜. 내가 이해가 안 되게 말했니? 너희들 하고 싶은 데로하고 가자고 난 그냥 지켜보겠다니까 왜 날 엮는데?"
"우리가 뭘 엮었다고 그래? 그래도 애들인데 이대로 버리고 가자고?"
"죽고 싶어? 왜 자꾸 신경을 긁어?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잘도 죽여 놓고?”
“그러니까 당신 말은 이 아이들 굶어죽든 말든 그냥 두자?”
야구방망이를 든 여자가 날 노려봤다. 식칼을 든 여자는 숨 쉬는 것이 불편한지 인상을 찡그리고 짜증을 냈다. 바비인형은 구석에서 눈알을 대굴 굴리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얼음송곳이 바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바보 같았다. 이것들이 이런 식으로 머릴 쓸 줄 몰랐다. 혹시나 위층 사람들과 싸우게 될 지 몰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뒀더니 피곤하게 됐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여기서 한 판 하자고?"
이번에는 그냥 두지 않을 요량이었다. 망치를 꾹 붙잡고 여자들을 노려봤다.
“사. 살려주세요.”
“우에에에엥. 언니이이이 울지마아아아 언니...”
"그래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는 거지?"
"본성은 무슨... 개소리 하지 말고 난 위에 위협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하면 그만이거든. 어쩔거야? 나랑 싸우겠다는 거야?"
두 여자가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저었다. 강하게 나가자 꼬리를 마는 여자들이었다.
“너희들이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인지 몰랐어. 그런데 왜 날 죽이려고 했는지 몰라.”
“........”
“........”
“뭐 어쩌겠어?”
“사...살려주세요.”
“이야기 중이니까 조용히 해.”
“제발... 살려주세요... 뭘 시키시든 말 잘 들을게요.”
하- 이거야 원 모를 일이었다.
“씨... 하... 진짜... 누가 죽인대?"
"......"
애초에 죽일 생각도 없었다. 약탈자 여자들이 애들 죽이고 쌀을 뺏겠다고 해도 그냥 지켜 보고 있을 생각이었다.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게 무슨 엉망진창인지 모를 일이었다.
생존자를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애들 밖에 없는 상황. 주의상황만 말해주고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 살아라. 그럼 되는 거야. 뭐.... 너희들 여기서 불 피우지 말고 있어라. 불 피우다 불나면 119도 없고 타죽는다. 그리고 건물 밖에 돌아다닌 괴물을 봤지?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
“으아아아앙”
초등학교 여아가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다. 물도 많이 마시지 못했을 텐데 어디서 저런 수분이 나오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면 산채로 뜯어 먹힌다. 다 봤겠지만. 그리고 살려달라고 고함지르고 그러지 마, 사람들이 오면 큰일 난다. 여기 이 여자들 봤지? 아래층에서 날 죽이고 식량 뺏으려고 했어. 너희들도 쌀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아껴서 먹고 그래. 가자 앞장서.”
내가 한쪽으로 자리를 잡자 두 여자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 어쩔 거냐고?’
'굶어 죽는다고?"
개소리도 저 정도면 대단했다. 아마 내가 먼저 손을 쓰는 놈인지 아닌지 간을 본 것일 것이다. 아니면, 죽은 놈들이 주도적으로 사람을 죽였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두 여자가 풀어주자 마자 딴소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그냥 둬야 하나? 아니면 그냥 우환을 없애는 게 좋은가? 생각이 복잡해졌다. 빈정이 확 상했다.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싸우는 것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았다.
힘이 조금 강해졌지만 초인도 아니고 어설프게 죽이니 살리니 싸우다 상처라도 나면 감염으로 갈 수도 있었다. 물리는 것 외에, 공기나 물로도 번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벨부터 눌러. 뭐하고 있어?”
아래층에서 처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두 여자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최상층, 펜트하우스 정문을 우두커니 쳐다봤다.
“여기 확인하고 나면 끝인가?”
식칼녀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통증이 계속되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난 너희들처럼 약속을 씹는 사람이 아니야.”
야구방망이를 든 여자가 토치로 도어락을 지졌다. 이제는 벨도 누르지 않고 토치로 지지는 여자였다. 빨리 확인하고 그냥 갈길 가겠다는 것이 보였다. 웃기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보고 확신한 것이다. 내가 먼저 자신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치이이익-
"벨부터 누르라고 우리가 약탈자야? 확인하러 왔잖아 확인."
치이이익-
내 말을 무시하고 토치에 불을 붙이는 여자들이었다.
“이런 미친...네가 눌러.”
“예? 예.”
바비인형이 화들짝 놀라. 벨을 눌렀다.
띵동-띵동-
“불러봐.”
“여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으세요.”
바비인형의 낭랑하고 고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치이익-토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이 전자식 도어락을 달구기 시작했다.
‘배신하고 붙어먹으니 좋냐?’
‘걸레 같은 년.’
번갈아 가며 토치로 문을 지지던 여자들은 바비인형을 욕했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용케 들렸다. 그리고 안쪽에서 사람소리도 났다. 부산한 발자국소리와 작게 말하는 소리였다.
토치로 지지며 바비인형을 욕하고 있는 두 여자는 못들은 것 같았다.
'사람이 있는데 왜 대답을 안하지?'
어쩌면 이 집도 약탈자들에게 점령된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경우의 수가 많아졌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위층을 전부 확인해야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최소한 나를 죽이러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라도 받아야 했다.
[삑삑-화재경보. 외부온도가 올라갑니다.]
[띠리리리리리링]
[안전장치 작동. 문이 열립니다.]
소리와 함께 육중한 현관이 열렸다. 확실히 구조가 달랐다. 나는 두 여자를 앞장세웠다. 두 여자에게서는 처음과 같은 긴장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대충 확인하고 말겠다는 것이 확연히 티가 났다.
안으로 들어가자 복도처럼 양쪽에 신발장이 늘어서 있었고 간접조명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정전인데 펜트하우스라서 그런가?’ 밖은 정전이었지만 복도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복도를 지나가니 중문이 있었다. 강화유리와 금속으로 멋을 낸 중문은 고급스러웠다.
중문을 열기 전 붙박이장처럼 된 신발장을 열어본 두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자 신발이 백화점 진열대처럼 착착 진열되어있었다. 다른 쪽에는 남성화가 전시되어있었다.
‘와.’
‘이거 **사의 한정판 아니야?’
‘새 건데?’
‘여기 단지에 좀 산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여기가 거기?’
‘직통 엘리베이터도 따로 있잖아.’
두 여자들은 신발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하지만 나는 중문을 뚫어져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멋들어진 중문의 장식 뒤에서 살의가 느껴졌다. 심장이 조이는 느낌. 중문 안쪽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히 살의였다.
그래 여기다. 위층만 생각하면 묵직하게 억누르던 내 불안감의 정체를 찾았다.
하아- 가슴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만 같았다.
“구경하고 있을 시간 있나? 나중에 구경하고 조심하지?”
“쳇-”
"앞에 똑바로 살펴!"
"아 진짜."
“아!”
잔소리에 짜증을 내는 여자들이었다.
"계십니까? 싸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눴으면 하는데요."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소리가 났었고 살기도 있었는데? 가슴이 무겁게 짓눌렀다.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건가?
"조용히 해!"
"소리는 지가 질러 놓고는..."
"계시냐고 물어보면 퍽이나 여기 있다고 하겠다."
식칼을 든 여자가 이죽거렸다.
"죄송합니다. 혹시 위층에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부득이 하게 올라왔습니다. 아래층 사는데, 약탈자들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옥죄는 것 같았다.
"약탈자들은 전부 제압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
"얼씨구?"
"뭔 소리래?"
"들으셨다고 생각하고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야- 그냥 나와."
"아 진짜- 여기까지 확인하기로 했잖아."
"사람 없으면 이거 전부 우리가 갖는다?"
"그냥 여기서 살자. 여기 시설 작살이다."
두 여자가 히히덕-거렸다. 약탈하던 습관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냥 나오라고!"
"소리 지르지 마!"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야!"
욕심에 빠진 두 여자가 짜증을 내며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중문 옆의 사각에서 검은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우두둑!
푸욱!
검은 그림자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들이쳤다.
으직!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정육점에서 돼지를 통으로 해체할 때 들었던 소리. 그 소리와 가장 비슷한 소리가 났다.
“허..”
비명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야구방망이를 어깨에 걸치고 대충대충 들어가자는 포즈로 들어가던 여자의 몸이 석고상처럼 굳어 입만 뻐금거렸다.
우두둑!
칼날이 갈비뼈를 뚫고 들어가는 서늘한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바로 옆에 있던 식칼녀는 그 상황에서 얼음처럼 얼어 붙어있었다.
그림자가 날카로운 칼을 뽑아내기 전, 내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마치 본능처럼 손에 쥐고 있던 망치를 있는 힘껏 던졌다. 망치는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화살처럼 쏘아진 망치가 여자의 가슴에 칼을 박은 그림자의 머리통에 직격됐다.
뻐억!
피가 튀며 그림자가 꼬꾸라졌다. 속박됐던 초침이 움직이는 것처럼 여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지아야!”
“칼... 칼...”
식칼을 들고 있던 여자가 가슴에 칼이 박힌 친구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미친년 숨통을 끊어야지!’ 이 상황에서 다친 사람을 붙잡아서 어쩌겠다고? 어이가 없었다. 친구를 찔렀는데 그 자리에서 호들갑만 떨면 다인가? 내 배에 칼을 쑤셨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라면 곧바로 쓰러진 놈의 멱을 땄을 것이다.
머리통을 망치에 맞은 그림자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역시 단순히 망치를 던지는 것은 힘도 무게도 조금 부족했다. 끈을 잡아당기자 던져졌던 망치가 손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망치를 돌리기 시작했다. 쥐불놀이를 하는 것처럼 윙윙 돌아가는 망치. 공기가 일그러지고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웅!
빠아아악!
원심력을 더한 망치가 일어서려는 그림자의 뒤통수에 틀어 박혔다. 피가 튄 그림자가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