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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13화 (13/261)

포로들과 (2)

처음 남자들을 죽였을 때, 느꼈던 것은 살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느껴지는 흉부의 통증이 다른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도망칠 수도 없다. 이 세상에서는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 두 가지 선택지 밖에 남지 않았다.

의외로 그 전의 세상과 똑같은 선택지였다. 세상은 항상 죽거나 아니면 살거나 두 선택지가 놓여있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세계는 죽음을 교묘하게 치환했다. 죽음에 대해 ‘죽을 각오로 살거나.’ 혹은 ‘죽지 못해 살거나.’라는 것으로 바꿨다. 죽음을 은폐하기 시작했다.

죽음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세 모녀 자살사건으로 방송에서 떠들어댔지만 사는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감정적으로는 안타깝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죽음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누구도 죽이지 않은 시체에 대한 사인은 자살이었다.

사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됐을 때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를 속이기 마련이었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것도 사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은 모로 가다 죽을 경우를 제외한 말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행동. 생각. 도덕. 윤리. 사회는 죽음이 방긋 웃는 지금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기보다 죽음과 친해지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내가 죽음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현실적이었다. 그저 단지 현실적일 뿐이었다고 되새김질 했다. 평화로운 시대에 자기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현실적인 사람들처럼 나도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고 현실적이 된 것뿐이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안 풀어주나요?”

바비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풀어 줄 수 없지.”

“여자들이잖아요.”

여자들이니까 이길 수 있다고? 아니면 괜찮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저 여자들은 독기를 숨기고 있었다. 저것들은 물불 가리지 않아 보이는데, 바비인형은 위기상황이 닥치면 어버버-하다 칼 맞게 생겨 놓고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여자들이 덤비기라도 한다면? 바비인형을 빼면 3:1로 싸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저쪽이 기습이라도 한다면 두 명은 모르겠지만 셋은 확실히 힘들었다.

이런 생각들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은 겉보기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바비인형이 겉보기 외모처럼 아니면 눈물을 쉽게 흘리고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인 것처럼 정말 그럴지는 겪어봐야 알 일이었다. 그래서 내 생각도 말했던 것이고 지금도 말을 아끼는 것이었다.

“여자들이라고 얕보다 어이없이 죽는 건 사양이다.”

“네에-”

내 배를 찌르다 자기 손을 베인 여자는 본래 팀이 아니라고 했다. 본래는 남자가 5명이나 있었지만 2명이 죽었다고 했다. 하긴 마흔 집 가깝게 털면서 한 명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지 않았다.

*

작은 방에 구금해 놓은 세 여자 가운데 두 명을 데려왔다. 빡빡하게 케이블타이가 묶였던 손목에 빨갛게 자국이 남아있었다. 두 여자는 빨갛게 된 손목이 아팠는지 손목을 쓰다듬었다.

“야구방망이와 식칼을 주지.”

무기를 주겠다는 말에 두 여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근력이 약한 여자가 알루미늄방망이를 들어봐야 실제적으로는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리치가 짧은 망치나 과도 보다 금속으로 된 야구방망이가 위압적으로 보이기는 했다.

짝! 짝!

손뼉을 쳐 환기를 시켰다.

“자-그럼 옆집부터 확인하고 그 다음에는 위로 올라가도록 하지.”

"위로 왜 올라가려고 하죠?"

"너희들처럼 약탈하려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확인하자는 거야."

위만 생각하면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방패로 삼겠다는 거야?"

“당연하지 않나? 그럼 너희들을 뒤에 둘까? 뒤에서 날 찌르면? 그러니까 너희둘이 앞장을 서.”

“.......”

“.......”

“싫으면 다시 묶이든가.”

한 여자가 야구방망이를 홱- 채갔다. 망치에 맞아 갈비뼈가 상한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힘겹게 식칼을 들었다.

어찌됐든 2:2라면 여자들도 함부로 뒤돌아서 기습을 하지 못할 것이다. 바비인형이 내 편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줬으니 두 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배신자년과 원수가 등 뒤에 있는 모양새였다.

띵동-

띵동-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너희들은 벨 눌러서 사람이 없으면 없나보다 그러고 지나갔나?”

“칫-그래서? 따기라도 할 건가?”

“말이 짧군. 뭐 됐다. 어차피 일이 끝나면 서로 볼 것도 아니고 말이야.”

두 여자를 앞장세웠기 때문에 둘은 현관 앞에서 투덜거렸다.

“투덜거리지만 말고 토치로 문을 따라고.”

내가 토치를 건네자 식칼을 들고 있던 여자가 겨드랑이에 식칼을 끼우고는 토치를 켰다. 치이이익-제법 한참을 달구자 [띠리리리리링 화재경고-잠금이 해제 되었습니다.]라는 기계음과 함께 전자식 도어락이 풀렸다.

“뭐해 빨리 들어가.”

내가 뒤에서 말을 하자. 야구방망이를 든 여자가 금방이라도 풀 스윙을 할 것처럼 폼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에 식칼을 든 여자가 그 옆으로 들어갔다. 바비인형이 멀뚱거리고 있어 턱짓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바비인형은 두 손으로 얼음송곳을 꼭 쥐고 먼저 들어간 여자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망치를 들고 윙윙 돌리기 시작했다. 2kg짜리 망치가 끈에 묶여 윙윙 돌아가는 소리는 무시무시했다.

거실은 깨끗하고 평범했다.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 사람의 온기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흩어지지 말고! 방을 수색할 때도 전부 같이 움직인다.”

먼저 안방을 살폈다. 4명이 안방에 들어간 뒤 붙박이장과 안방 부부화장실까지 전부 뒤졌다. 다음으로 작은 방 2개를 확인하고 화장실과 베란다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에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화장실 욕조에는 물이 받아져 있었다. 신혼부부는 초기에 농성을 포기하고 자동차를 타고 빠져나가는 것을 선택했거나 그랬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바로 위로 올라가자.”

“위층 전부 확인하면 우리 풀어 줄 거지?”

“약속은 지킨다. 풀어줄 생각이 없었으면 너희들 손에 무기를 들려줬겠어?”

“칫-”

띵동-

띵동-

2103호 역시 벨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토치로 열고 들어가자 아수라장이었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사방이 흩어진 잔해들은 아마도 접시들이었을 것이다. 아그작-아그작- 체중이 가벼운 여자들이 앞장서서 들어갔음에도 바닥에 깔린 유리조각 밟히는 소리는 신경을 거슬렸다. 찢어진 커든 사이로 환한 햇빛이 명랑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거실창문은 닫혀있다.’

안이 난장판인 이유는 둘 가운데 하나.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떠나면서 깽판을 쳤거나.

“너희들이 턴 집은 아니지?”

세 여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저쪽은 아래에서 위로 차근차근 올라왔다고 했었다.

‘윗집이나 옆집에서 털었을 가능성도 있군.’

바짝 긴장하고 안 방문을 열자 찌이이익- 테이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에서 붙여놓은 테이프가 떨어지며 확 역겨운 냄새가 났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 시체가 썩는 냄새였다.

우웨에엑!

먼저 들어간 야구방망이가 구토를 했다. 식칼을 쥔 여자도 부들부들 떨며 구토를 참으려고 했지만 게워내고 말았다. 위에 올라간다고 햄을 구워 먹였는데 먹었던 것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있는 두 여자였다. 바비인형은 먹었던 두유가 올라오는지 화장실로 달려갔다. 안방은 커튼이 쳐져 있었다.

우웨에엑!

컥컥!

“다 토했으면 커튼부터 열어봐.”

야구방망이와 식칼이 나를 노려봤지만 두 손에 든 망치를 꾹 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시 말했다.

“어두우니까 커튼부터 열어. 약속을 지켜.”

식칼이 안으로 성큼 들어가 부확- 커튼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도록 열었다. 햇빛이 안으로 들어오며 상황이 보였다. 머리카락으로 보아 중년은 넘은 부부처럼 보였다. 바싹 마른 시신은 푸딩처럼 변해있었다. 아직 3월 초순이라 파리가 꼬이지는 않았지만 날씨가 풀리는 시기여서 그런지 부패는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창문 열어.”

한 손으로 창문을 열려고 했는데 열리지 않자. 식칼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열려고 하던 여자가 창문 틈새에 붙은 투명 테이프를 발견했다. 투명테이프를 식칼로 죽 그어 버리고 창문을 열자 아직은 서늘한 공기가 들어왔다.

창문 틈새가 전부 테이프로 밀폐됐고 공기가 상당히 탁했던 것으로 보아. 일산화탄소 중독을 노렸던 것으로 여겨졌다. 찾아보니 화분을 비워 그곳에 번개탄과 숯불구이용 숯이 들어있는 것이 있었다.

“자살이군.”

위층에서 누군가 내려와 이 집을 털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살한 사람들의 시신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필요한 것만 털어갔을 뿐이다.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면서 말이지...'

자살해 부패한 시체를 봤음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시체는 수습해야 했다. 시체를 침대시트로 둘둘 둘러 싸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21층에서 떨어진 시체의 소리는 기이했다. 시체가 있던 매트리스는 시체에서 나온 국물로 얼룩져있었다. 파리가 꼬이는 것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까지 창밖으로 던진 뒤, 옆집으로 갔다. 2104호였다.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됐다. 이 불안감. 심장을 압박하는 감각이 강해지면 죽음의 위기가 닥쳤다. 빨리 정리하고 쉬고 싶었다.

거실과 주방을 둘러본 여자들이 안방을 향하며 말했다.

“여기도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야구방망이를 든 여자가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사람이 있다.”

“어떻게 알아?”

“화장실 변기에 용변이 있다. 욕실 욕조에 물이 남아 있고 부엌에는 물에 불리고 있는 쌀이 있다.”

가스와 전기가 끊긴 상황에서 따로 조리기구가 없다면, 쌀을 물에 불려 씹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물에 불리고 있는 쌀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있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야구방망이과 식칼을 든 두 여자가 바짝 긴장하고 안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안방에는 이불이 흐트러져있었다. 사람의 체향도 있었지만 성인이 내는 강렬한 체취는 아니었다.

‘내 코가 이렇게 민감했나?’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여자가 재빨리 안방 화장실을 살폈다.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야구방망이를 어깨에 걸치고 고개를 흔들자 식칼을 든 여자가 붙박이장을 열었다.

“흡!”

“흐에에.”

붙박이장 안에는 초등학교 5~6학년 가량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1~2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두 아이는 식칼을 든 여자를 보자 짧게 소리를 냈다.

“애들인데?”

“그러게?”

“용케 살아있었네.”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그 때 바로 옆 장로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튀어나오며 외쳤다.

“도. 도와주세요.”

“어라? 하나가 더 있었네?”

식칼을 든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등학생 같은데?”

뛰쳐나온 여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 좀 도와주세요.”

초등학교 남학생이 쌀을 물에 불려서 먹고 물을 받아 생존 준비를 하기는 어려웠다. 더 나이 먹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이 학생이 큰 누나인 것 같았다. 부모들은 어디로 갔을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상관할 일 아니다.’

하지만 묘하게 불안했다. 그냥 지나가기에는 묘하게 불안한 느낌이었다. 뭔가 불안했다.

“어쩔 거야?”

야구방망이를 든 여자가 나를 보고 물었다. 어떻게 할 거냐?는 소리였다. 계약은 간단했다. 그녀들은 그녀들이 살던 대로 행하고 나는 나대로 움직이는 것. 그러니까 그녀들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 그게 계약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묻는다?

“너희들이 어떻게 하든, 난 상관하지 않겠다.”

“뭐? 죽이자고? 애들이잖아.”

식칼을 든 여자가 소리를 지르다 가슴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을 똑바로 해. 누가 죽이자고 했어?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리고 살고 있던 사람들을 죽였던 건 너희들 아니었나? 지금 이게 뭐하는 수작이지?”

하던 대로 죽이지도 않겠다는 건가?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은근히 나에게 떠넘기려는 두 여자였다.

“애들이라고!”

“내가 죽이자고 했나? "

"당신 먹을 거 많잖아?"

이런 미친년이.

"애들? 아래층에는 애들이 없었냐? 너희들은 먹을 게 없었어? 그래서 그 애들 지금 잘 있나 한 번 볼 수 있을까?”

“아 진짜 쪼잔한 새끼.”

“쪼잔?”

2kg짜리 망치를 붕붕-돌렸다. 끈에 매달린 망치가 돌아가며 금방이라도 사람을 하나 칠 것처럼 공기를 찢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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