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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12화 (12/261)

포로들과 (1)

바비인형처럼 생긴 여자는 울먹이며 항변했다.

“저는 정말 아니에요. 안 죽였어요.”

“그래? 이야기를 해봐 사실인지 아닌지 들어보면 알겠지.”

“뭐... 뭐를 말해요?”

나이가 좀 많은 여자였다면, 사회생활을 해 본 여자였다면 이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다. 이제 20살이었다. 사람들이 미쳐 날 뛴 것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대략 2주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독하게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의 경우 아직 여린 심성을 유지하는 게 당연했다.

우선은 나이부터 시작하는 게 좋았다.

“20살? 21살? 대학교 2학년 아니면 3학년?”

“예. 2학년이요. 히끅-”

“그래? 그간 고생 많았겠네.”

“히끅-히끅-에...”

이 상황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지만 바비인형의 머릿속에 그런 것은 없었다. 내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망치를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위로를 받은 표정이었다. 어지간히 애지중지 자란 여자인 것 같았다. 통계적으로 보면 이런 천연스러운 성격은 폭력에 약했다. 맞은 기억이 없으니 육체적인 고통에 취약한 것이 당연했다.

한 순간에 변해버린 세상, 법도 사라지고 자신을 여신처럼 챙기던 남자들이 순식간에 짐승으로 변했다. 그 전까지는 도자기나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대했다면 지금은 졸지에 살인자들의 욕정을 받아내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상황이었다.

“그랬군.”

바비인형의 아바바거리는 고백은 ‘나 상처받은 여자에요.’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정보는 ‘만인에게 사랑받던 여자가 어떻게 상처를 입었는가?’ 따위가 아니었다. 누락된 기억이 있는 부분. 그러니까 정전이 되기 전에는 컴퓨터나 TV가 작동되고 있었을 것이다. 8일 아니 10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벌어진 사건이 중요했다.

“음.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네.”

“예? 히끅-”

“자세히 말해봐.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친구네 집에 갇히게 된 건 언제부터고 왜 갇히게 됐어?”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내가 과도하게 질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겠지만 그녀의 정신은 극한에 몰린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억나는 대로 술술 불었다. 나는 중간에 그녀의 말을 유도하면 그만이었다.

“아니, 변종감기가 퍼졌는데 친구들하고 놀러가려고 했단 말이야?”

“그게 아니고요. 감기 치료제가 나왔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초중고등학교 휴교했던 것도 철폐되고 세계적으로 번졌던 폭동이나 폭력사태도 진압됐다는 소리에...”

변종 감기로 인해 여행 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치료제가 개발됐고 치료제를 개발한 회사는 일반 기업이 아닌 국가와 거래를 해서 치료제 제조기술을 팔아먹었다고 한다. 정부는 치료제를 구입하자마자 제약회사들에게 넘겨 대량 생산으로 넘어갔다.

그간 발표된 내용으로는 변종감기에 걸린 사람들 가운데 5할 가량이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변종감기에 걸린 사람이 일으킨 폭력 사건에 대해 기존의 법이 아닌, 다른 형태로 판단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일으킨 범죄니 만큼, 그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폭력적으로 변한 사람은 다행이었다. 그렇게 변하지 사람들 가운데 여럿은 고열로 인해 장기나 뇌손상이 왔다고 했다. 뇌손상이나 장기 손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뇌가 변형되거나 장기가 변형되는 경우가 생겼다고 했다.

“뭐라고? 뇌가 변형됐다고?”

“예. 뇌가 일부 변했다고 그래서 대부분은 인지능력이 떨어지거나 전신마비가 됐는데요. 소수는 성격이 전혀 다르게 변하기도 했고 기존과는 다른 재능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일종의 서번트증후군이 떠올랐다. 자동차사고로 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이 기존과는 전혀 다른 재능에 눈을 뜨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평범한 역사 선생이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진 뒤 회복하면서 음악적 재능이 개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뇌손상이나 변형은 성격에도 영향을 끼쳤다. 착하고 순진했던 사람이 이기적이고 악독하게 변한다든지 피도 눈물도 없던 살인자가 감수성이 터지는 사람으로 변하기도 했다.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상황이 변해서 적응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달 가까이 혼자 지냈다. 많은 식량과 물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지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나는 내 것을 뺏으려는 자들을 죽일 것이라도 다짐했다.

다짐했다고 죽일 수 있을까? 상상한다고 행동할 수 있을까? 정신을 잃기 전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119를 떠올릴 정도로 지극히 정상적인 관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을 죽이고 시체가 널브러진 상황에서 순진한 여자의 정신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기이한 느낌. 이게 나란 말인가?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 치료를 받지 못해 뇌에 손상을 입었을까? 이것도 공중에 붕 뜬 느낌이었다. 마치 제3자의 상황을 듣는 것처럼 내 이야기임에도 걱정되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에도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머리와 감정이 따로 노는 상황. 그리고 이 분리된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정신이었다.

“치료제가 생산됐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그건. 인터넷에 소문이 돌았는데요. 치료제 부작용으로 인해 사람들이 좀비처럼 변했다는 이야기들이 떠돌았어요.”

“치료제가 좀비를 만들었다고?”

“좀비라고 하던데요. 영화에서 나오는 좀비와는 다르지만. 머리만 약점이 아니라 심장도 약점이고 피를 많이 흘리면 죽고”

“그건 좀비가 아니라 그냥 감염자잖아?”

“근데 사람을 잡아먹으니까요.”

“사람만 잡아먹나?”

“사람만 잡아먹는 건 아니고 개나 고양이 쥐도 막 잡아먹고 힘도 많이 세지고.”

내가 다그치자 바비인형이 두서없이 말했다. 차라리 이렇게 두서없이 말하는 것이 좋았다.

“좀비라고 방송에서 그렇게 말했어?”

“예? 예.”

“미친.”

감염자를 좀비라고 말했다? 그것도 방송에서? 좀비라고 불리는 순간 인간이 아니게 됐다. 다시 말해 방송에서 좀비사태라고 말하는 순간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예?”

“아니. 계속해봐. 방송에서 좀비라고 말했으면 군대는?”

“아? 군대가 움직인다고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계엄! 비상계엄이라고 좀비 소탕할 동안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예상대로였다.

“그래서 친구네 집에 갇혀 있었던 건가?”

“예. 히끅-”

그러니까 상황은 미묘했다. 내가 정신을 잃은 9~10일 동안 치료제가 개발됐고 배포됐다. 그 동안 치료제가 무슨 작용을 했는지 좀비라고 불리는 감염된 사람들이 생겼고 무차별적으로 파괴활동과 식인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외출을 금지시킨 다음,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것들을 좀비로 규정 군대를 동원 싹쓸이를 해버리려고 했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근데 왜 실패를 한 거지?’

한국은 수십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예비군까지 합하면 엄청난 전력이었다.

“설마? 감염이 확산됐나?”

“예? 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폭발적으로 감염이 늘었어요.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전기도 끊기고 수도와 가스도 끊기고...먹을 것도 떨어지고.”

어제 봤던 군대가 떠올랐다. 생존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마트를 털려고 했었다. 공격을 계속해 좀비를 소탕하지 않고 재빨리 퇴각했던 것을 볼 때, 이미 군대는 일종의 사조직으로 변한 상황이라고 봐야 했다. 대략적인 상황판단은 됐지만 역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남았다.

“먹을 것이 떨어져 마트로 간 사람들이 전부 좀비가 됐어요.”

계속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이상한 아저씨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막 나가서 싸우자고 했는데.”

그들은 순식간에 작살이 났었다.

“전부 죽었지. 그래서 배고프고 방법이 없어서 저 놈들과 함께 이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인건가?”

시체들을 가리키며 묻자 바비인형이 다시 딸꾹질을 했다.

“히끅- 전... 전 아니에요.”

“뭐 좋아. 아래층은 전부 죽인 건가? 아니면 산 사람도 있나?”

“히끅-히끅-”

“확실하게 말해. 너희들 어디까지 털었어? 아니 몇 층까지 정리했어?”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아래층까지요.”

“좋아.”

벌떡 일어서며 말하자 바비인형이 눈물을 채 닦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바비인형은 갑자기 벌떡 일어난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래층까지 처리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좋다고 벌떡 일어섰으니 말이다.

‘아래층이 전부 정리됐으니 남은 건 몇 집 없다.’

22층은 두 집을 하나로 묶은 펜트하우스였다. 옥외정원이 있고 수영장이 있는 대형 평형에 최고급이었다. 각 동마다 이런 펜트하우스가 2가구씩 있었다. 한 동은 최상층 전체가 한 가구인 동도 있었다.

“어떻게 할래?”

“예? 예?”

“강제로 저 녀석들 무리에 들어갔다며?”

“네. 그랬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래?”

“예? 앞으로요?”

“그래 앞으로, 저 녀석들 죽었잖아.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는 거야.”

“........”

바비인형이 데굴- 눈알을 굴렸다. 거실에 가득 쌓여있는 식료품과 생수들 베란다에는 김장 비닐에 빵빵하게 물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울고 울먹이고 항변했던 다채로운 표정이 지금은 갑작스럽게 처연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씨 좋게 식료품을 나눠주는 경우는 없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에 화단을 키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먹을 것 때문에 사람을 죽였던 그룹에 속해있었는데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해를 못하면 뭐.’

그 정도 지능도 없다면 그건 정말 답이 없었다. 설마 그렇게 멍청할 리는 없을 테니, 뭐라고 말을 할지 지켜봤다.

“저... 저...”

“그래. 말해 봐.”

“저도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이게 중요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바비인형이 먼저 말하게 했다. 나를 죽이고 뺏을 수 없다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좀비는 잡아봤나?”

“아니요.”

“사람은?”

“아니...요.”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직접적으로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간접적으로 죽게 했을 것이다. 현관방범 카메라 앞에서 어깨에 브래지어 끈을 살짝 노출시키며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어지간한 남자들은 눈이 돌아가 문을 열었을 것이다. 그만큼 바비인형의 얼굴과 몸은 최고였으니까 말이다.

“아니라고? 유혹하지도 않았나?”

“.......”

눈을 똑바로 노려보고 나지막하게 말하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면서 눈빛을 피하는 바비인형이었다. 역시 바비는 몸으로 유혹하는 담당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바비와 다른 여자 둘이서 침투조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뭐 좋아. 지나간 일이니까.”

“흐윽...흑.”

“하지만 말이지.”

“흑.”

지금이 중요했다. 바비인형의 몸을 탐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면 안됐다. 몸만을 탐하면 그녀는 말 그대로 몸만 대주는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심으로는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내 목을 딸 생각을 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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