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편
<-- 악의 심장 -->
"만약 위험해질 것 같다면 바로 합류하라는 것이 아크 사령관님의 전언입니다!"
"알겠네."
"그럼 이만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대로부터 전언이 왔다.
본대도 이제부터가 진짜 지옥(地獄)의 시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 이제는 작전보다도 정말 성녀의 안전에만 모든 걸 집중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작전이 통한다면 성녀가 가장 안전하겠지만, 적전이 틀어질 경우에는 도리어 성녀가 가장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
즉. 작전은 그대로 유지하되 경계하란 소리였다.
"긴장하긴 해야겠네."
감이 별로 좋지 않다.
전장에서 다져진 실전 감각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이 위험을 본대에서 얼마나 커버해줄 수 있을까. `악의 심장`까지는 아직도 최소 일주일, 길어지면 최대 보름까지 걸릴 수 있는데 말이지.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지 성녀가 위험한 곳은 없다는 점이다.
전령이 가져온 전언에 따르면, 5군은 평균적으로 2~3천 정도의 사상자를 냈을 뿐 비교적 안정적으로 진격 중이라고 한다. 성녀들은 신성 기사단, 사제단의 각별한 호위 아래 무사히 동행 중이라고 했다. 그 이외에 다섯 갈래 진격로를 제외한 곳으로 빠져나간 악의 무리와 구(舊) 대륙군의 전투 소식도 알려줬는데, 그쪽은 신(新) 대륙군의 어그로 덕분인지 큰 피해 없이 수월하게 막아내는 중이라며 가능하다면 곧 후발대로 지원을 보내줄 거란 소식을 전했다.
"이놈은 언제 깨어나려나."
전언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쓱 훑어본 나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찍찍이를 바라봤다.
뱀파이어들의 피를 과식, 아니 폭식 수준으로 먹어치우더니 온갖 메시지로 날 어지럽게 하나가 결국 잠들어버린 지 하루 이상이 흘렀는데.
[ `펫(찍찍이)`가 〈 성장 중 〉 에 있습니다. ]
[ 체내의 피와 마력을 흡수 중입니다. ]
[ 얼마나 오랜 시간 흡수하느냐에 따라 〈 성장 〉 정도가 달라집니다. ]
[ 현재 상태 : 성장 중 ]
이런 메시지만 남긴 게 전부였다.
지금은 하이네스가 안고 가는 중이다. 성장이 끝날 때까지 무덤지기의 집에 처박아 두려고 했는데, 상황을 전해 들은 하이네스가 자신이 안고 가겠다며 찍찍이를 품다시피 가고 있었다.
흡혈박쥐라 생긴 게 저래서 일반적으로는 여자들이 싫어하는 스타일인데, 같은 펫이라 동질강이라도 느끼는 건지.
아니면 쌓인 유대감이 서로에게도 전해지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이네스는 찍찍이를 상당히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전투가 일어날 때는 어쩔 수 없이 무덤지기 공간에 넣어두긴 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에는 하이네스와 함께였다.
"와요!"
"시작인가."
`드디어.
아리아의 외침과 함께 곳곳에서 살기(殺氣)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최소 천 이상. 많게는 2천가량을 넘어갈 것 같기도 하다. 그것도. 본대에서 어그로를 끌어주고 남은 것들이 말이다. 첫 전투부터 이런 식이라니 벌써부터 앞날의 고생길이 훤하게 보인다.
[ 전군 전투 준비. ]
이윽고.
데스 커멘더의 지휘에 따라 진형을 갖출 즈음. 사방에서 괴성과 함께 악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 돌격장군 아르헨 ]
[ 기습장군 펄로우 ]
[ 돌진장군 설리우텐 ]
.
.
.
.
.
장군급이 셋.
그 이외에 네임드로 보이는 것만 수십 개체라. 아주 미쳤구나. 이제 시작인데. 한숨이 나오지만 어쩔 수 없지. 정 안되면 본대에 합류하는 수밖에. 공헌도가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정작 악의 심장 근처도 못 가보고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니까.
"일단은."
[ 사냥을 시작한다. ]
지금은 나 혼자 막아봐야지.
[ `식탐의 대장군 벨제붑`이 살해당했습니다.]
"음?"
다가오는 악의 무리를 상대하기 위해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는데.
갑자기 출력된 메시지. 찍찍이의 상태 변화 메시지인가 싶었는데 아예 다른 내용.
"대장군이 죽어?"
그것도 무려 대장군의 사망 소식이었다.
[ `식탐의 대장군 벨제붑`의 사망 소식에 악의 무리가 매우 당황합니다. ]
[ 일곱 대장군 중 셋이 사망함에 따라 `악의 무리`에게 `상태 이상 : 불안`이 적용됩니다. ]
[ `상태 이상 : 불안`으로 인해 전투 시 낮은 확률로 `악의 무리`중 일부가 `저주 - 불안`에 노출됩니다. ]
다른 쪽에서 대장군을 처리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상당히 아쉽다. 가능하면 내가 다 처리하고 `심장`을 얻고 싶었으니까. 아쉬운 눈빛으로 메시지를 읽어가다 보니 대장군의 사망 소식 이외에도 한 줄의 메시지가 더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바람의 성녀`가 사망했습니다. ]
[ `성녀`의 사망으로 `악의 무리`가 상당히 기뻐합니다. ]
"아."
왜 대장군이 죽었나 했더니.
플레이어가 아니라 성녀에 의해 사망한 것이었나. 이렇게 되면 남은 성녀가 넷뿐이라는 건데. 악의 무리도 가만히 있진 않았나 보다. 하기사 내가 악의 무리였다고 했어도 지금쯤이면 성녀 한둘은 어떻게 해서든 처리했었어야 했지.
그 대상이 이쪽의 아리아가 아니라 다른 곳의 성녀가 된 것일 뿐.
"크아아아아악!!"
"일단 여기부터 정리하자."
정확하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곧 본대에서 알려줄 테니.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대장군급이 나타난 건 아니지만, 여기도 안전한 건 아니니까.
*
신(新) 대륙군 1군 사령부.
저녁 시간이 되어갈 즈음. 아크 후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현재 피해 상황부터 남은 보급 물자 등의 보고 사항을 전해 듣고 있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땐, 큰 피해 없이 진행 중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후방의 네크로맨서 역시 예상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해주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아크 후작은 흡족하게 보고 사항을 전달받았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다. 아니 이 정도면 괜찮은 수준을 넘어 훌륭하다. 2만5천의 병사를 이끌고 출전했는데 보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2만3천 이상을 유지 중인 데다가 보급품도 넉넉하고 가장 걱정이던 후방의 성녀도 안전하게 이송 중이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긴장을 놓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물론.
지금까지만.
"사령관님! 급보입니다!"
"급보?"
아직 허가하기도 전에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 온 마법사.
상황 보고가 진행 중이란 걸 알면서도 안으로 뛰어들어왔다는 건 그만큼 급한 소식일 터.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막사 안으로 들어온 마법사의 얼굴을 보니 조금 전까지의 만족스럽던 감정이 싹 사라진다.
아직 보고를 받지 않았지만, 왠지 불안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 불안한 기운은 빗나가질 않았다.
"보고하게."
"조금 전 3군 사령부에서 통신이 왔습니다!"
"3군에서?"
"그렇습니다! 점심 직후 악의 대장군 셋이 악의 무리 2만을 이끌고 와서 3군을 노렸으며 이로 인해 `성녀의 기도`가 발현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이 무슨!"
쿠웅-
마법사의 보고에 아크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그만큼 지금 보고는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성녀의 기도`가 발현되었다는 건, 성녀가 더 이상 성녀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함을 의미한다. `성녀의 기도`를 사용한 성녀는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되니까.
이를 통해 2만이 넘는 생명을 살렸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2만을 살리기 위해 2백만, 2천만이 넘는 대륙 전체의 생명이 더 위험해졌다는 게 중요할 뿐.
"그래서 3군은 어찌 되었나!"
"다행히 대장군 중 하나인 `벨제붑`을 처치하였으나 나머지 대장군들은 놓쳤으며 성녀의 사망으로 일단은 근처에 있는 4군에 합류 중이라고 합니다. 병사들의 피해는 거의 없다 합니다."
"허…. 이걸 어찌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녀의 희생으로 대장군 중 하나를 죽였다는 것.
나머지 둘도 같이 처리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그 점이 아쉽긴 하지만 3군이 4군에 합류하게 된다면 최소한 4군의 성녀는 더욱 안전해질 테니….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를 예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섯 성녀 중 최소 둘 이상은 악의 심장에 닿기도 전에 죽으리라 생각했다. 악의 무리도 머리가 있다면 성녀들이 가까이 오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다섯뿐인 성녀를 잃었다는 게 여전히 아쉽게만 느껴진다.
"부관."
"예! 사령관 각하.`
"전군에게 알려라. 진군 속도를 높인다고. 일주일. 일주일 안에는 악의 심장에 닿아야 한다. 자세도 각 군에게 전달하게. 진군 속도를 늘리라고."
"알겠습니다!"
"예!"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고.
지금은 지금 해야 할 걸 해야 한다. 성녀가 하나 당했지만, 저쪽도 대장군 하나를 잃었으니 마구잡이로 공격하지는 못할 터. 차라리 잘 됐다. 저쪽도 자칫하다간 피를 볼 수 있다는 경각심을 세워주었으니까.
"아. 한 가지 더 알리게."
"어떤?"
"만약 성녀의 기도를 사용해야 할 때가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장군들은 전부 죽이라고."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저쪽이 성녀들을 먼저 덮칠지. 아니면 이쪽이 악의 심장을 먼저 파괴할지.
"참. 부관 뒤에도 다시 전령을 보내게."
"알겠습니다."
아크 후작은 몇 가지 명령을 더 내린 후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 누가 더 빠를 것인가…."
일주일.
최후를 위한 칠 주야의 시작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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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