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편
<-- 의지란 무엇이지? -->
`의지(依支)`했다.
`죽음`이 원하는 대로. 그러자 마치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간다.
우우우웅-
체내의 죽음이 `죽음을 담은 뼈 지팡이`위로 모여든다.
`활.`
체내 죽음이 만든 그것은 거대한 한 자루의 활이었다.
뼈 지팡이를 중심으로 양 끝이 휘어지며 시위가 걸린 활.
사아아아아-
뭔가에 홀린 듯 사념의 서를 잠시 놓아버리고 시위를 붙잡았다.
신기하게도 손에서 놓아버린 사념의 서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기라도 하는 듯 가만히 내 옆에 떠 있었다.
"아."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서 쳐다보니,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 건 아니었다.
언제 소환됐는지, 망령 하나가 나 대신 사념의 서를 붙잡고 있었다. 최하급 언데드인 망령은 물리력이 없어 무언가를 붙잡거나 할 수 없지만, 그 대상이 `사념의 서`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놓치지 않고 잘 붙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날 보고 웃는데, 이상하게도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거운 걸 들고 낑낑거리면서도 부모에겐 무겁지 않은 척하기 위해 괜찮다고 말하는 아이 같았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로 고마움을 전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활을 바라봤다.
"후우우우.."
완전히 몸을 일으킨 채.
왼손으로 굳건히 활대를 붙잡고, 시위를 붙잡은 오른손을 천천히 당겨본다. 시위에 화살은 걸려있지 않았지만, 왠지 시위를 잡아당겨도 될 것 같았다. 그저 본능적인 감이었다. 아니, 이렇게 하면 된다고 `죽음`이 내게 말을 해주고 있었다.
-천천히.
-조금씩.
-그리고 생각해.
-의지를 담아서.
`죽음`이 하는 말을 따라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기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는 분명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체외의 죽음. 대기에 떠돌아다니던 죽음이 내 손으로 모이고 있었다. 더불어 체외 죽음에 공명한 내 마력이 흘러나와 체외 죽음과 하나로 합쳐지며 한 자루의 화살을 만들어간다.
`죽음의 창.`
지금까지 무수히 만들어왔던 죽음의 창.
그것이 화살이 되어주었다.
활을 다뤄본 적도, 화살을 시위에 걸어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지만. 왠지 마음이 편하다. 이대로 시위를 놓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의지와 내 의지가 하나로 합쳐진.
완성된 형태의 `의지(意志)`였다.
[ 〈 Ex - 두 개의 의지 〉 를 습득했습니다. ]
[ Ex - 두 개의 의지 ]
: 뜻(意)과 뜻(志)이 만나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은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의지(依支)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둘의 의지가 강력할수록 그 위력은 더욱 늘어나며, 어떠한 형태로든 발현이 가능하다.
이를 증명하는 메시지까지 올라오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자연스레 시선이 사인드리에게로 향한다. 어느새 더 강해진 힘으로 검은 구체를 여섯 개나 휘두르는 사인드리. 그 저돌적인 움직임에 1군과 2군 전부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위험하다. 그러나 그 위험이 위협적이진 않았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가 쇼타임이다."
그리고.
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 `특수 기술 - 의형살상` ]
*
사인드리는 잘려나간 왼팔의 고통이 조금씩 잊혀져 간다는 걸 느꼈다.
상처를 치료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진 않았다. 몸속의 힘도 슬슬 다시 익숙해지는 느낌이 든다. 아쉽게도 떨어져 나간 팔 때문에 어렵사리 회복한 힘이 다시 80%로 줄어들긴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 눈앞의 벌레들은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둠 구체. 일곱"
그래서 구체를 하나 더 늘렸다.
지금도 무려 여섯 개를 운용하고 있었지만, 예전의 감각이 거의 되돌아온 덕분인지 하나를 늘려도 될 것 같았다.
"이 벌레 같은 놈들아. 이것이 네놈들의 최후가 될 것이다."
우우우웅-
후우웅-
무려 일곱 개의 검은 구체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하니 몸속의 분노 또한 더욱 거칠게 타오른다.
어서 빨리 이 분노를 분출해야만 할 것 같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쿠우우웅-
괴성과도 같은 기합을 터트리며 검은 마력을 쏟아낸 순간.
사인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좌측에서 거대한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는 한 네크로맨서가 있었다. 아까부터 `의지 싸움`을 걸어오는 탓에 가장 신경이 쓰이던 네크로맨서.
꼴에 `죽음`까지 다룰 줄 아는 놈이라 쉽사리 두지 못했다. 그런 탓에 속에서 부글부글 열이 끓어올랐지만, 놈의 공격을 놓쳤다간 위험할지도 몰랐기에 하던 공격까지 멈추고 방어에만 몰두한 채 의지 싸움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끝이다.
풀려난 힘에 완전히 적응한 이상. 이젠 거리낄 게 없었다.
"너부터 죽여주마!!"
아니.
아예 저 사사건건 신경 쓰이게 하는 네크로맨서를 먼저 죽인다.
그런 생각에 사인드리는 일곱 개의 구체 전부를 움직였다. 뒤에서 벌레들과 언데드들이 공격을 해왔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언데드야 네크로맨서를 잡으면 없어질 것들. 나머지 인간들이 위험하긴 하지만 어차피 한 쪽을 뚫어내지 못하면 지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무리를 하더라도 과감하게 큰 걸 노린다.
타오르는 분노 속에서도 날카로운 전장의 감각은 저 네크로맨서가 가장 위험하다고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파멸시켜라!!!"
후우우우웅-
후우웅-
후우웅-
무려 일곱 개다.
전과 달리 제법 강렬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지만, 일곱 개의 구체라면 가볍게 부수고 나아가 네크로맨서까지 찢어발길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힘을 믿었다. 자신이 있었다.
어둠의 마도사. 이젠 어둠의 대마도사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자신의 힘을. 어둠의 심장 잔재를 취하고 강력해진 힘을!
그 자신감이 날아오는 죽음의 기운과 충돌했다.
그런데.
우우우우웅-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끄아아악!!"
죽음의 기운과 정면으로 부딪쳤던 검은 구체들이 산산이 조각나는 게 아닌가.
마치 차원의 틈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듯 깨져나가며 소멸되는 검은 구체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무려 다섯 개. 검은 구체는 사인드르의 마력 집합체. 그것이 부서진다는 건 마력이 강제로 소실된다는 뜻과 같다.
즉.
지금 사인드리의 마력이 강제로 뜯겨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고작 공격 한 번에.
"끄어어.."
고통스럽다.
역류한 핏물이 입을 타고 터져 나온다.
조금 전에도 놈의 공격에 의해 검은 구체 하나가 반쯤 부서졌었지만 이렇게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다섯 개가 동시에 날아가 버려 탓인지 누군가 심장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비틀듯 고통스러웠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당연히 부수고 지나갔어야 했을 것을. 도리어 파괴당하고 고통을 받았다니.
입가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어떻게..어떻게..어떻게..."
단 한 번의 격돌로 전체 마력의 30% 이상이 소실되었다.
이는 아이오네의 사원을 공격하기 전보다도 약해진 수준이었다. 그나마 `어둠의 심장 잔재`의 효과인지 소실된 검은 마력이 다시 복구되고 있긴 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미약했다.
소실된 분량을 모두 채우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정도.
믿을 수가 없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른 누구도 아닌 어둠의 마도사인 자신의 공격이 이리도 허무하게 파괴된 것도 모자라, 놈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니.
씨익-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네크로맨서의 얼굴이 보였다.
먼 거리였지만, 놈이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놈도 아는 것이다. 지금의 격돌로 인해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그것을 알기에 웃는 것이다. 그 미소는 마치 자신이 죽어가던 인간들을 바라볼 때의 표정이었다.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포식자만이 보일 수 있는 미소.
"감히..!"
고작 벌레 따위가 자신을 바라보며 포식자의 미소를 보인다.
화가 난다.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다. 머리가 녹아버릴 것 같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이마가 지끈거리고 눈이 붉어진다.
이 분노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감히...감히!"
우우우웅-
도무지 화가 나는 탓에 참지 못하고 남은 검은 마력을 전부 끌어올렸다.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남아있던 한 줌의 이성마저 사라진 그녀를 제어할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웅-
우우웅-
다시금 소환되는 검은 구체 세 개.
검은 구체를 만들어낼 때마다 울컥하고 피가 올라왔지만, 억지로 삼키며 다섯 개를 들어 올렸다. 그 노력이 가상했을까. 아까부터 지끈거리던 이마가 시원해지더니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샘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아..."
상쾌하다.
분노에 몸을 맡기니 너무 상쾌하다.
콰득-
이 순간.
사인드리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이마 위에 자랐던 뿔이 한층 더 성장했음을. 아니 아마도 평생 모를 것이다. 그녀는 이미 분노에 모든 것을 맡긴 상태.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어버렸으니까.
죽는 순간까지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 `분노의 대장군 사탄`의 `분노의 씨앗`이 `개화`합니다. ]
분노의 씨앗을 품은 자의 운명이었으니까.
"끄아아아!!"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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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