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편
<-- 드랍과 리콜 -->
아트라는 피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이대로는 답이 없다고. 동족의 복수는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그래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지. 그 순간 보인 건 바닥에 흥건한 피였다.
찢기고, 베이고, 뜯겨나간 동족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크아아아아아!!"
그 피를 본 순간.
아트라는 생각을 멈췄고, 그대로 상대를 밀어내며 바닥을 굴렀다.
검을 든 놈이 따라붙었지만, 옆에 있던 전사에 시체를 던지며 거리를 벌렸다.
"커헉..컥..."
그리고 붙잡은 건 죽어가는 동족의 몸이었다.
하반신이 완전히 뜯겨서 곧 숨이 끊어질 듯 보이나, 렙틸리언의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죽지 못 하고 숨을 유지하던 전사. 어서 죽여달라는 듯,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달라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동족을 바라보던 아트라는 그대로 손톱을 들어 올려 동족의 가슴을 갈랐다.
촤아아악-
갈라진 가슴에서 튀어 오른 피가 온몸을 적신다.
그러나 무시하고 더욱 손톱을 밀어 넣어 무언가를 붙잡는다.
콰득-
"크아악!"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대가 등에 틀어박혔지만, 억지로 참아가며 붙잡은 그것을 강제로 끄집어냈다.
두근-
두근-
그것은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이었다.
콰드드득-
콰득-
아트라는 손 위에서 꿈틀거리는 심장을 보자마자 그대로 입에 집어넣고 씹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동족을 먹어가면서까지 싸워야 하는 자신의 처절함을 누가 알아주기라도 원하는 듯.
거세게 포효한 순간.
상황은 달라졌다.
*
"미친..."
그렇게 주의했건만.
이렇게 될 줄이야.
"크아아아아아아!!!"
색이 진한 빨강으로 변해버린 녀석이 괴성을 내지른다.
포효하는 놈의 입가엔 조금 전까지 뛰고 있었을 심장의 잔해가 보였다.
렙틸리언 전사가 일반 렙틸리언과 다른 점. 그것은 `동족의 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 일반 렙틸리언들에겐 오히려 독이 되는 동족의 피를 마심으로써 힘을 늘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놈들이 서로의 피를 마시지 못하게 막으라 말했다. 정확한 정체나 상황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무조건 피를 흡입하는 장면은 막으라 지시했다. 꼭 피를 마시지 않더라도 살점을 뜯어먹는 것까지 막으라 명령했고 지금껏 그 명령은 지켜져 왔다.
그런데 여기서 그게 틀어질 줄이야.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놈이 동족의 피를 마심으로써 색이 변했다.
연한 빨간색이던 색이 다홍색 수준으로 진해졌다. 그 차이가 일견 커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이것이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면 그 차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터.
특히 서로 빨간 놈들끼리 잡아먹기라도 하면.
"최대한 빠르게 죽여."
그러니 지금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 사형선고 ]
[ 소울 스피어 ]
[ 소울 스피어 ]
[ 저주 - 둔화 ]
[ 저주 - 약화 ]
.
.
.
.
마력을 끌어올리는 즉시 각종 마법으로 전환해 발현한다.
공격마법부터 저주마법까지.
지금까지는 빨간색의 세 놈을 먼저 잡기보단, 나머지를 먼저 처리하고 그 뒤에 처리하려고 했다. 어쨌든 빨강은 빨강. 하나하나가 5차 개체급 서넛 정도의 힘을 보였기에 주위를 확실히 처리하고 공격하는 게 가장 좋았다.
지금처럼 다른 렙틸리언 전사들이 동족의 피를 마시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게 가장 깔끔했고.
그러나 일이 벌어진 이상 이제는 전술을 바꿔야만 했다.
"네임드들이 4차 개체만 데리고 움직여. 데스 커멘더는 데스 나이트에게 지휘권 넘기고 와서 3차 개체들 지휘해서 나머지 정리해. 벨카서스와 펠도 합류해."
퍼스트 소울 테이커 아케인과 망령대장군 헤카테를 제외한 5차 개체를 전원 불러들이고 벨카서스까지 더했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진용을 구사한 것이다.
"카사와 불의 정령들은 시체를 전부 태워. 핏물조차 남기지 않도록."
방심한 적은 없으나, 실수가 생겼으니 지금이라도 그 실수를 치워야겠지.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운다.
빠르게 줄어가는 마력을 느끼며 뼈 지팡이와 사념의 서를 붙잡으니, 드디어 정리된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놈들에게 가해지던 압박의 정도가 더욱 강해졌기 때문일까.
놈들은 더 이상 기회를 엿볼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목이 날아가는 상황이니까. 그러나 대단하긴 했다. 피를 마신 녀석은 무려 5차 개체 다섯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고, 마시지 않는 놈들도 셋씩 끌고 다녔으니까.
여기서 내 본전을 드러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본전을 드러내놓고도 이런 상황이라니.
"아무리 나한테 완벽히 좋은 전장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렇지."
수 천 년간 인간 사회를 흔들던 놈들의 진실된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래도.
이제는 정말 끝을 보여간다. 플레이어들도 이쪽 상황을 파악했는지 더욱 주의하며 싸워가고 있었고, 2차 개체 이하의 불사의 군단과 일라이네들 역시 차근차근 숫자를 줄여가면서 살아남은 렙틸리언은 고작 백여 마리에 불과했다.
초반 드랍과 리콜의 타격이 너무 컸던 것도 있고, 플레이어들의 특혜 아닌 특혜.
퀘스트 보상으로 지급되는 `사냥꾼의 훈장`을 바로바로 복용하면서 싸우다 보니 힘이 줄긴커녕 오히려 끝없이 상승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더불어 치료제 같은 각종 소모성 아이템의 효과까지 더해지니 아무리 렙틸리언 전사들이 강력하다 한들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수순은 내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후우우우..."
대기의 `죽음`을 손에 끌어모아 본다.
현재 전장에 유지되고 있는 미묘한 균형의 틈을 부수기 위해.
우우웅-
한 손에는 마력을 끌어올려 창의 형태를 만들고, 그 창안에 `죽음`을 담는다.
아직도 마력 안에 죽음을 담는 작업이 익숙하진 않지만, 그동안 연습한 게 도움이 되었는지 조금씩 스며들어 가는 `죽음`. 그 양은 많지 않았지만 처음보다는 꽤 늘어난 상태였다.
이렇게 만든 마력의 창을 세우며 언데드 팔라딘 크리스와 언데드 세이즈 넬, 언데드 로열 랜서 벤이 담당 중인 렙틸리언을 향해 날려 보냈다. 마력으로 유지되는 창이기에 자세를 잡거나 정밀하게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제발 뒤져라."
그저 집중과 함께 틈이 벌어진 순간을 노리면 그만.
콰득-
"크어어어..!!"
아주 살작.
크리스와 벤의 합격으로 틈이 생긴 그 순간을 노려 창을 찔러넣자, 마력의 창이 뚫고 들어간 신체 부위가 급격히 썩어갔다. `죽음`이 가진 원초적인 힘. 소멸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곧 균형의 끝이었다.
서걱-
[ 합류하겠습니다. ]
벌어진 틈은 곧 죽음으로 직결되었고, 한 놈의 머리를 자른 크리스와 벤, 넬은 곧장 고개를 돌려 옆으로 향했다.
5차 개체 셋을 상대로 비등비등하다? 그럼 넷, 다섯을 투입한다.
일대 다수의 전투는 비겁하다? 그딴 게 어딨나. 이기면 그만인걸.
"이대로 죽을 수 없다!!!"
발악하듯 괴성을 질러보지만, 이미 무너진 균형의 추는 더 이상 복구할 수 없었다.
팔다리가 잘리고, 심장에 창칼이 틀어박힌다.
하나의 생명을 끊기 무섭게 다시금 몰려가는 죽음의 파도.
"크아아악!!"
여전히 눈이 뒤집힌 체 날뛰고 있는 마지막 렙틸리언.
그 사이 힘이 더 늘어났는지 다홍색에서 완전한 빨간색으로 변했지만, 이제는 놈에게 시간을 끌어줄 동료가 없었다. 이미 동족이라곤 죄다 바닥을 기고 있었으니까.
서걱-
서걱-
몸통이 베이고, 다리가 갈라졌다.
피가 철철 흐르고 놈이 바닥을 구른다.
"크아악! 크아악!"
담담했던 표정은 어디 갔는지, 울부짖음만이 남은 처절한 얼굴.
살아남아 복수하고자 하는 증오와 원념이 밖으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죽여."
후우우웅-
콰직!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떨어진 벨카서스의 도끼가 놈의 목을 갈랐다.
"크아아아-"
툭-
죽는 순간마저 괴성을 지르던 놈.
치열한 전투였다.
"후우..."
아무리 생각해봐도 플레이어들을 백이나 끌고 온 건 잘한 짓이었다.
이 많은 숫자를 나 혼자서 감당하려고 했다면. 감당은커녕 벌집만 쑤시고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욕심부리고 살지 말라고 하는 거겠지.
괜한 욕심을 부렸다면.
"이윤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드디어 다른 쪽도 완전히 정리가 끝난 듯 일라이네들이 내게 다가왔고, 곧 김우석을 필두로 한 플레이어들도 뭉쳤다.
다행스럽게도 사망자 하나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중간에 열 댓 명 정도가 경상을 입고 다섯은 중상을 입기도 했다는데 고위 사제들이 여럿 있어서 큰 문제 없이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플레이어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했다.
하나씩 가져온 주머니가 두둑한 걸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돌아가죠."
더 길게 말 할 거 없었다.
[ 무덤지기 ]
올 때처럼 공간의 문을 열어주니 알아서 착착 들어가는 플레이어들.
"갔다 올 테니 확인사살 시작해. 반은 갈라서 섬을 돌아보고. 한 놈이라도 살아서 도망칠 수 없게 해."
[ 알겠습니다. ]
섬을 떠나기 전.
불사의 군단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 안에 아직 살아있는 놈이 있을 수 있었기에 꺼진 불도 다시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섬을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으니까.
[ 가시지요. ]
[ 매스 텔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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