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편
<-- 드랍과 리콜 -->
언젠가 김우길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최상위 플레이어조차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전사들이 있다고. 아마도 그 당시의 김우길이 말한 대상은 이들인 것 같았다.
수천 명의 동족이 죽어 나가는 이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정확히 나를 짚어 다가온 것만 봐도 단순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 `칭호 - 위대한 모험가`로 보이는 색이 빨간색이라는 건.
이른바 `핵심 전력`이라고 해야겠지.
그래서 궁금했다.
과연 얼마나 능력이 뛰어나기에 지금의 내 수준과 비교했을 때 빨간색으로 표시되는 건지. 그것도 한둘도 아닌 스물이나. 물론 자세히 보니 전부 빨간색인 건 아니었다.
선두에 선 셋을 제외한 나머지는 빨강에 가까운 초록. 앞선 셋 또한 진한 빨강이라기 보단 연한 빨간색. 풀이하자면 셋은 `어려울 수 있음` 정도, 나머지는 `보통은 아니다.` 정도였다.
"한 가지만 묻겠다."
놈들을 관찰하는 사이.
처음 나를 보며 말을 걸었던 렙틸리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배신자는 누구인가."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담담하게 말하는 놈.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이곳을 찾아왔는지 따윈 상관없는지 오직 배신자에 대한 정보만을 묻고 있었다. 갈라진 눈을 보니 담담한 척은 하고 있지만 아마 당장에라도 배신자를 찾는다면 찢어 죽여버리고 싶어하는 살기(殺氣)가 찐득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분노`를 넘어선 `증오`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면 나를 당장 죽이겠다는 무언의 협박.
"웃긴 놈일세."
협박이라….
웃음이 다 나온다.
언젠가 소규모 회담장을 덮쳤을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렙틸리언들에게 철저히 `무시`를 받았었지. 그런데 이제는 `협박`이라니. 참으로 웃기지 않는가? 제 동족이 수천이나 죽었다. 그 중심에 내가 있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텐데도 협박을 한다?
"참 대단한 종족이야."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신기한 종족이다.
하긴 이런 자신감이 있으니 `지구 지배`라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자 했겠지. 그리고 만약 지금의 내가 아니었다면 저 협박이 어느 정도 통했을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내 수준에서 `어려움`이 표시된 걸 보면, 전직하기 이전이었으면 매우 어려움 이상이었을 테니까.
"본진 다 털리고 나서 울트라 끌어모아 봐야 달라질 게 있으려나 모르겠네."
싱긋 웃으며 한마디를 던져주니, 급격히 표정이 굳어버리는 렙틸리언들.
내 말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를테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이해했을 테지. 아니 애초에 싱긋 웃어버린 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을 거다. 같잖은 협박 따위 해봐야 두려워할 사람이 아니란 걸.
"죽이고 찾는다."
그래서였는지.
놈들은 대답 듣기를 포기하곤 곧장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대답을 들을 수 없다면, 죽이고 다른 놈을 찾겠다는 걸까. 포기가 상당히 빠른 놈들이었다.
[ 그림자 사슬 ]
[ 그림자 방패 ]
물론.
놈들이 움직이는 순간, 나 역시 움직였다.
가장 먼저 내 그림자 안으로 돌아왔던 델이 주위 그림자를 움직여 놈들의 발을 묶음과 동시에 거대한 방패를 설치했다.
[ 삶을 끊는 죽음 ]
더불어 대기하던 일휘가 활시위를 잡아당기니 곧 `죽음`이 가득 담긴 화살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호오?"
결과는 의외였다.
역시, 평범하지 않다는 걸까. 델의 그림자 사슬은 고작 둘을 묶는 데 그쳤고 일휘의 화살 역시 하나를 잡는 데 그쳤다. 최소한 다섯 이상은 처리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고작 셋이라.
"그래도 울트라는 울트라인가."
괜히 어려움으로 표시되는 게 아니었다.
반사신경 하며 그림자 사슬을 강제로 뜯어버리는 근력까지. 괜히 핵심 전력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나도 불어 모아야지.
"콜."
가볍게 마력을 흘려보내며 마법을 발동하니, 순식간에 내 주위로 소환되는 5차 개체들.
외곽 감시를 담당 중인 아케인과 헤카테, 전체 지휘를 맡은 데스 커멘더를 제외한 전원이 모였다.
"전부..내 곁으로 모여라."
그 때문일까.
저돌적으로 공격해오던 렙틸리언들이 공격을 멈추고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느꼈을 것이다. 언데드가 내뿜은 원초적인 증오를. 산자의 생명을 빼앗아가려는 원념을.
[ 이래서 혼자는 못 맡긴다니까? ]
[ 시끄럽다. ]
[ 제가 왔습니다. ]
[ 허허 드디어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
.
.
.
그사이 완벽히 자리를 잡은 5차 개체들.
내 명령을 기다리는 지, 대기 중인 불사의 군단을 보며 말했다.
"마지막 사냥. 시작이다."
*
아트라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답답했다.
"크아아아악!!"
후우우웅-
카아앙!
카가각-
지난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막힌 적 없었던 공격이 전부 막히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바위도 종이 찢듯 찢어버리는 게 자신이다. 하물며 저런 뼛조각 따위야, 단번에 부숴버리고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을 씹어 먹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카가가가각-
"어째서…!"
다른 누구도 아니고, 렙틸리언 사회의 단 셋뿐인 대전사인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막힌다.
상처를 내고 막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공격이 통하질 않았다. 바위도 가르는 손톱이 고작 검 하나를 뚫지 못하는 것이다.
[ 고작 이 정도 뿐인가. 도마뱀. ]
"크아아아악!"
이를 악물고 다시 손톱을 휘둘러봐도, 근육을 조여 폭발적인 힘을 내봐도.
여전히 상황은 그대로.
아니, 오히려 같이 데려왔던 전사들이 하나둘 죽어가고 있다. 명예롭게 죽어간다면 또 모를까. 그저 수십 구씩 시체에게 둘러싸인 상태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죽은 전사 중 하나는 온몸에 화살이 수 백 개나 박혔고, 하나는 창에 찔려 걸레가 되어버렸다.
하나는 상반신이 불에 녹아버렸고, 하나는 도끼에 찍혀 허리 아래가 뜯겨나갔다. 아예 오체분시(五體分屍)를 당한 전사도 있었다. 죽어서조차 편히 죽지 못한 이들.
먼저 죽어간 동족의 복수를 위해 달려들었건만, 돌아오는 건 더 많은 동족의 죽음뿐이라니.
대전사인 아트라로서는 피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한 번만. 한 번만 뚫어낼 수 있다면.
저 안에서 쥐새끼처럼 웅크리고 있는 인간을 찢어 죽일 수 있을 텐데.
[ 사냥감은 사냥감일 뿐. ]
카앙-
하염없이 튕겨 나가는 손톱을 느끼며 허망하게 뒤로 물러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라니.
아트라의 충혈된 눈에서 결국 진녹색의 핏물이 흘러내렸다.
*
"이런 기능도 있었던 건가."
나는 마력을 끌어올리다 말고 혼자 중얼거렸다.
특이한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색이."
치열한 전장 속.
내 눈에 밟힌 것은 다름 아닌 렙틸리언들의 `색`.
`칭호 - 위대한 모험가`로 보여지는 색이었다.
"셋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빨간색이 거의 사라졌다."
초반 스물의 렙틸리언 전사들이 나타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셋은 연한 빨간색. 나머지는 거의 빨간색으로 가득한 초록색이었다. 그런데 전투가 이어지고 하나둘 결과가 나올 때쯤 부터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잡한 전장이다 보니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명 색이 변했다.
연한 빨간색이던 놈들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나머지는 빨간색이 점점 줄어들고 그 자리를 초록색이 채워가고 있었다.
"단순 능력 비교 뿐 아니라, 상황까지도 판단하는 능력이라…."
나는 지금까지 `칭호 - 위대한 모험가`가 단순히 지금의 나와 상대. 일대일의 수준을 비교해 나타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저놈들의 색이 바뀔 리가 없을 테지. 상처라도 생겨서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아무런 상처도 없던 놈의 색이 갑자기 변했다.
하필 렙틸리언 전사 하나가 죽은 타이밍에.
그렇다는 건 육체적인 능력 외에 주위 환경까지 색에 포함된다는 뜻이었다. 이를테면 일대 다수인 상황이라면 `다수` 자체가 포함되고, 일대일인데 상대에게 유리한 지형이라면 `지형`까지 포함되는 식.
내 생각보다 더 정밀하고 자세한 능력 비교 시스템이었다.
"좋은 걸 알았네."
확실히.
렙틸리언 사냥을 시작한 건 여러모로 내게 도움이 되었다.
단순 능력 향상부터, 갖춘 능력을 연습할 수 있는 훈련의 장이자, 능력의 본질을 완벽하게 깨우칠 수 있는 깨달음의 장. 공격 한 번에 1석 3조의 효과를 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아니지.
저놈들로 만들 언데드까지 생각한다면.
1석 4조.
그걸 다시 팔고, 그것으로 인해 `칭호 - 자격`에 해당하는 플레이어가 늘어난다면.
무려 1석 6조.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슬슬 끝내자."
이득도 보았으니 이제 끝내야겠지.
시간은 금이다.
언제 퀘스트에 끌려갈지 모르니, 이득을 볼 수 있을 때 최대한 봐야 한다. 괜히 늦장 부려봐야 남은 건 손해뿐이었다.
까드드득-
그때였다.
"크아아아악!!"
다시 한 번.
`색`이 변한 건.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