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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펜스 챌린지-171화 (171/304)

171편

<-- 두 번째 왕 베히모스 -->

가만히.

전쟁이 아직 한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주위를 느껴본다.

비릿한 피 냄새가 바람에 실려 날아오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죽어가는 비명이 귓가를 스친다. 투쟁의 포효가 들리고, 승리를 부르짖는 함성이 들린다. 수많은 소리와 냄새가 나를 향해 찾아와 머물다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알 수 없는, 아니 이젠 의미를 깨달은 위화감이 나를 휘감는다.

두근-

두근-

그간 해왔던 명상 덕분일까.

시끄러운 가운데 고요함을 찾았다. 심장 박동이 들리고 몸 전체가 울린다.

`제발….`

`계약의 끈`이란 거.

델은 분명 느끼기 어려울 것이라 말했다. 그 말인즉슨. 느끼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는 소리다. 그러니 느낄 수 있다. 아니. 느낀다.

두근-

두근-

그러나 쉽지 않다.

여전히 고요한 심장 박동만이 느껴질 뿐. 그 이외에 다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또..!`

그러는 사이.

다시금 베히보스의 기술이 발동되고, 언데드 몇 구의 지휘권이 강탈당한다. 보지 않지만 알 수 있다. 이 망할 놈의 위화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지. 고요하게 가라앉았던 평점심이 무너지고, 전장의 감각들이 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다른 감각은 단숨에 잊어버릴 수 있는데, 이 기분 나쁜 위화감만은 쉽사리 잊혀지지가 않는다.

"크아아악!! 망할 주인 놈아!! 이 언데드들을 어떻게 좀 하란 말이다!!"

분노로 가득한 벨카서스의 일갈이 전장을 가로질러 내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평소라면 당장 푸닥거리라도 했을 텐데, 이번만큼은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베히모스의 `이름`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내 잘못과 실수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그저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

`제발..제발..제발!`

그저 아무런 변화 없는 이 상황이 답답할 따름이다.

열쇠를 찾았는데, 정작 자물쇠에 채워 넣지를 못하니. 나도 미칠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뭔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 할 것 같았다.

[ 어둠의 중급 정령 소환 ]

살포시 마력을 끌어올려 내 앞에 어둠의 정령을 소환해본다.

델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를 부를 때 끈은 가장 질겨진다.`라고. 나는 이 말에서 답을 찾기로 했다. 그래서 무작정 불렀다. 부르고 또 불러본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둠의 정령들로 가득 챘지만. 이미 내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부르고 또 부를 뿐이었다.

"이것이 왕의 위엄이요. 나의 백성들뿐 아니라, 그대의 종들조차. 내 부름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소. 이것이 그대와 나의 차이이자, 왕의 그릇의 차이요."

저 멀리서 베히모스가 떠들썩하게 소리치는 게 들린다.

전장의 모든 감각이 차단되었음에도, 놈의 목소리만큼은 내 귓가에 선명하게 전해진다.

"이것이 바로. `왕의 위엄`이오!"

[ 지배하는 왕 베히모스가 `왕의 위엄`을 발동합니다. ]

무시한다.

[ 어둠의 중급 정령 소환 ]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한다.

가슴 깊숙한 곳까지 저며오는 위화감이 느껴지지만, 무시한다. 그저. 나는 내가 할 수 있..

우우웅-

"어?"

뭐였지?

베히모스의 기술과 정령 소환이 교차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조금 전. 느낀 알 수 없는 감각 때문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었고, 붙잡을 새도 없이 단숨에 사라져버렸지만. 분명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혹시나 잘못 느꼈나 싶었지만. 그건 절대 아니었다.

분명. 분명 낯선 감각이었다.

"다시.."

다시 느껴야만 한다.

왠지 모르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베히모스를 바라봤다. 혼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다. 베히모스가 다시 기술을 사용해줘야만. 그때 정령을 소환해야만 한다.

주위에 소환해 두었던 수많은 어둠의 정령들을 전부 역소환 한 뒤, 성벽 끝으로 걸어가 베히모스와 일직선이 되도록 서서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떻소? 내 위엄이. 그대와의 차이가. 그릇의 수준이 말이오!"

내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포기했다고 여긴 걸까. 베히모스의 표정엔 이미 승자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마 나와 녀석이 뒤바뀐 상황이었다고 해도 나 역시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상황은 안 좋았고, 더욱 악화되는 중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녀석은 이 격차의 끝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기술을 아끼지 않았다.

"왕이란 이런 것이오."

[ 지배하는 왕 베히모스가 `왕의 위엄`을 발동합니다. ]

"지금."

[ 스켈레톤 나이트 마스터 소환 ]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녀석이 기술을 발동하기 위해 마력을 움직이는 찰나. 나 역시 마력을 끌어모아 스켈레톤 나이트 마스터를 불렀다.

우우웅-

그리고. 느꼈다. 낯선 감각을. 아니.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을.

어둠의 중급 정령보다 더욱 상위의 존재였기 때문일까. 조금 전보다 더욱 진한 느낌이었다.

[ 스켈레톤 나이트 마스터 소환 ]

`붙잡는다.`

나는 이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소환을 이어갔다.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고, 지배력의 한계를 넘어선 소환에 반역이 시작되었지만. 무시하고 소환했다. 이 감각을 놓치는 순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우우웅-

우웅-

우우웅-

소환을 이어갈 때마다 점점 가까워지는 감각.

마치 팽팽하게 잡아당긴 실을 누군가 흔드는 것 같다. 나는 이것이 델이 말한 `계약의 끈`이란 걸 확신했다. 만약 이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내가 한 행동은 전부 헛수고가 되는 것이지만.

왠지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감각이 진해질수록 더욱 확신이 생겼다.

`잡는다.`

손을 뻗어본다.

손을 뻗어 실을 잡아본다. 실제로 손을 뻗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손을 뻗는듯한 이미지를 그린다. 구체화한 이미지를 움직이며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정말 살아서 움직이는 손이 생겼고, 손을 뻗어내 흔들리는 실을 붙잡아간다.

탁-

위아래로 끊임없이 흔들리던 실을 손으로 붙잡은 순간.

[ ...명령. 명령을 따른다. ]

백색 기사의 검이 반역자의 목을 베어낸다.

"아아.."

그것을 확인한 순간.

전신에 짜릿한 쾌감이 휘몰아쳤다.

[ ..명..며..명.. ]

기쁨에 취해서였을까. 머릿속으로 새기도 또 새겨가던 이미지가 사라지며, 내 명령을 따라 움직이려던 스켈레톤 나이트 마스터가 다시금 나를 향해 검을 돌린다.

`침착하자. 침착해.`

기쁨을 즐길 시간이 없다.

눈을 감고 처음부터 다시 느껴본다. 그래도 한 번 가봤다고, 두 번 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금세 흔들리는 실이 보이고, 손을 뻗어 그 실을 붙잡는다.

최대한 참작하게 일을 마무리하자. 내 명령을 따라 움직인다.

`다음.`

여기까지는 됐다.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해야 할 건 이 실을 그대로 붙잡은 채. 또 다른 실을 느끼고 그것들 역시 붙잡는 일이다. 그걸 해내야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 `계약의 끈`은 하나가 아니다. 너와 나, 너와 카사, 너와 커스, 너와 스켈레톤 나이트 마스터. 모두 다른 끈으로 이어져 있다. 다른 끈을 찾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특성`. 특성이다. `계약의 끈`으로 이어져 있는 존재의 특성을 느낀다면. 다른 계약의 끈도 찾을 수 있다. ]

델은 내가 계약의 끈을 붙잡는 데 성공하자.

그다음 길을 제시했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특성.`

혹은 본질.

대상이 지닌 고유의 성질.

`날카롭다. 그리고 차갑다.`

유추해본다.

스켈레톤 나이트 마스터가 차갑고 날카로운 특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스켈레톤 배틀 마스터는?

`언데드이니 차가울 것이다. 그리고…. 파괴적일 것 같다.`

맞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저 추측하는 것이다. 그리고 찾아보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지닌 끈이 있는지.

`있다!`

느껴진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새로운 끈이 보인다. 그것을 붙잡아보니 내가 추측한 그대로의 느낌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있다?`

그 쥐로 십수 개의 끈들이 함께 보였다.

다른 게 있다면. 실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감촉. 스켈레톤 배틀 마스터의 실보다 더 얇고 덜 팽팽하다. 느껴지는 특성은 비슷하나 분명 다른 감각.

즉.

`배틀..워리어.`

끈을 붙잡는 순간.

이 끈의 주인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신기했다. 하나를 확실하게 깨닫고 나자, 다른 게 훤히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하나 찾아가다 보니 어느덧 수 백 개의 끈 전체가 전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중에 흔들리는 것들을 붙잡아갔다.

내 상상을 따라 만들어진 허상의 손들이 흔들리는 끈을 붙잡아갈 때마다. 전장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 특별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 〈 Ex - 보이지 않는 손 〉을 획득합니다. ]

[ `특수 마법 - 완전지배`를 획득합니다. ]

[ `끈`으로 이어진 모든 존재와의 `유대감`이 더욱 강해집니다. ]

[ 새로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

반전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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