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편
<-- 이종교배? -->
`역천부대`라 명명한 새 부대의 편입과 31단계 풀 클리어까지 모두 끝났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펜을 놓을 수 없었다.
"흐음.."
기다란 나무 책상 위에 눕혀있는 여인의 시체.
심장 어림에 자그마한 칼이 박혀있는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여인. 다름 아닌 성녀 후보 펠리스였다.
"어찌한다.."
역천부대의 구성도 끝났겠다.
바로 펠리스의 연구를 시작하려고 했다. 일반 성기사와 사제로도 엄청난 언데드들이 탄생했는데, 과연 성녀 후보를 언데드로 만든다면 무엇이 탄생할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연구를 시작하려고 했건만.
막상 연구를 시작하려니, 쉽사리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왜?
다름 아니라 연구 재료가 너무 희귀하기 때문이었다. 연구는 지금도 당장 할 수 있다. 해보고 싶은 연구도 많다. 그런데 한 번 실수했다가 재료가 그대로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디서 다시 구할 수 도 없는 터라 쉽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만약 손 잘못 놀렸다가 재료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디서 다시 구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고."
어렵다.
아무것도 안 하자니,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그렇다고 뭘 하자니, 사라질까 봐 걱정이다.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 처음 상태 그대로였다.
어떻게 하면 성녀 후보를 언데드로 만들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결국 잠시 실험을 미루기로 했다. 함부로 건드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을 찾는 쪽으로 결정한 것이다. 당장 연구에 들어가 생존에 도움이 될 언데드를 만들어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할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은 `역천부대`로 만족할 때다.
괜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이윤님!"
"시간 다 됐어요!"
"아. 갈게."
연구일지를 덮으며 일어서자 때마침 일라이네와 하이네스가 나를 부른다.
오늘은 오랜만에 현대에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하이네스의 합류로 음식재료가 슬슬 떨어져 가고 있었고, 여러 가지 생필품과 옷가지를 더 구매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 간단하게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현관으로 나오니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일라이네와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하이네스가 보였다.
"가자."
"네!"
"네..네!"
공간의 문을 열자.
익숙한 현대의 골목길이 눈에 들어온다. 가볍게 문을 열고 나오자 하이네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게는 보였다.
"와.. 건물들이…."
20여 년 간을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마주한 현대의 풍경은 상당히 신기한 듯했다.
게다가 저쪽 세상에서도 귀족처럼 떵떵거리며 저택에서 살아왔던 게 아니라, 산골짜기 촌구석에서 나고 자란 탓에 더 신기한 느낌일 것이다. 그런 하이네스가 귀여운지 일라이네가 싱긋 웃는다.
"어때요. 언니?"
"진짜 신기해…."
일라이네의 다소 놀리는 듯한 질문에도 하이네스는 그저 `와….`하고 입을 벌린 채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욱 하이네스가 귀여운지, 일라이네가 팔짱까지 끼며 `어서 가요 언니!`하고 하이네스를 잡아끌며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뒤에서 바라보니 마치 처음 서울에 올라온 동생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언니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실제로는 하이네스가 더 나이가 많다.
어린 소녀의 이미지를 하고 있지만, 성인식도 치렀고, 일라이네보다도 2살이나 더 많았다. 이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나도 일라이네도 상당히 당황스러워했었지. 생긴 건 이제 막 중학교나 들어갔을까 싶은 소녀인데 말이지.
귀여운 여동생이 생겼다고 좋아하던 일라이네는 특히 더 놀라야만 했다. 그래도 뭐, 며칠 정도 지나니 금세 `언니, 언니`하는 게 약간 이상해 보이긴 해도 나름 보긴 좋았다.
"이쪽이에요!"
"그…. 그래.."
대형 마트에 들어가서도 하이네스의 감탄은 계속되었다.
각종 신선한 음식 재료는 물론, 특히 얼음이 여기저기 널려있다는 게 가장 신기한 부분이었다고 한다. 얼음은 본디 귀족 혹은 잘 사는 이들의 전유물이었으니까.
덕분에 장 보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일라이네와 그걸 보며 신기해하는 하이네스를 보고 있으면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한동안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던 터라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휴식이었다.
"여..여긴.."
"언니! 옷 사야죠!"
"오..옷?"
"네!"
장 보기가 끝난 뒤에는 곧장 의류 매장으로 향했다.
하이네스가 입고 있는 옷은 모두 일라이네의 것. 사이즈가 비슷하면 적당히 같이 입어도 되겠지만, 생각보다 하이네스의 옷 사이즈가 작았다. 키도 다르고 체형도 다르다 보니 처음 일라이네가 현대에 왔을 때처럼 완전히 새로 맞춰야만 했다.
다행인 건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일라이네가 있다는 것.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일라이네가 알아서 다 해주니 나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건 어때요?"
"괘…. 괜찮은 것.."
"저것도 입어봐요!"
"템플러처럼 만들어야 하려나.."
일라이네가 하이네스의 옷과 신발을 골라주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 펠리스의 제작법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옷 고르기가 끝나있었다.
"감사합니다…."
"저희 카페라도 갈까요?"
"그러자."
확실히 하이네스가 있으니 일라이네의 텐션이 많이 올라가는 것 같다.
친구도 없고, 그저 훈련에 또 훈련. 훈련이 끝나면 내 식사에 집안일에. 칙칙한 남자와 단둘이 살아가려니, 아무리 충성심이 높다 한들 문제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리 텐션이 올라가는 것도 이해가 간다.
카페 안에 들어가서도 재잘재잘 이건 뭐다, 저건 뭐라고 설명하는 걸 보니 꽤나 귀여웠다.
"오늘은 외식이라도 해야겠네."
아무래도 오늘은 아예 외식까지 하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기왕 나온 거, 신세계의 끝을 봐야겠지. 이미 일라이네의 요리로 한국 요리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지만, 현지에서 먹는 음식과 현지 음식처럼 해서 먹는 음식은 다를 것이다. 물론 일라이네의 요리 솜씨가 상당히 좋아 한국사람이 하는 것과 크게 다른 건 없지만. 그래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줄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카페에 앉아있으니, 조금씩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탁-
타닥-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를 보며 부모님께 안부차 문자를 남기고 일어났다.
"가자. 밥 먹으러."
"네!"
"네."
우리가 밖으로 나오니 빗방울이 더욱 거세게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가져와야 하나."
거칠게 쏟아지는 탓에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싶었지만, 이왕 외식하기로 했으니 우산을 가져올 생각에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 무덤지기 공간을 열고 들어갔다가는 아마도 난리가 날 것이다.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질색이니 적당한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선 순간. 문득 가로등 불빛에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델."
[ 무슨 일이지. ]
머릿속에 뭔가 떠올라, 델을 불렀다.
그러자 평소처럼 내 그림자 안에 스며들어있던 델이 고개만 살짝 내밀고 나를 바라본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니 델이 나를 따라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길 잠시.
"가자."
어느덧 우리의 손엔 검은 우산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괜찮네.`
우산의 정체는 당연히 델의 그림자였다.
델의 그림자를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지금 알았다. 그동안 전투에서 마법적인 공격으로만 치중했던 터라, 그리고 그것이 강력하고 위력적이었기에 이렇게 그림자 자체를 활용할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델도 굳이 그림자로 무기를 만든다거나 하지 않았으니, 이런 활용법이 있는 걸 몰랐던 게 당연하다. 아마도 나한테는 딱히 필요가 없었을 테니 굳이 알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그 생각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 능력은 근접 전투가 가능한 일라이네나 벨카서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림자만 존재한다면 무한정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림자를 이용한 무기술이라. 좋은 전술을 한 가지 알았다.
거센 빗방울을 뚫고 들어간 집은 늘 그렇듯, 고깃집이었다.
"이모!"
"이..일라이네?"
일라이네는 고깃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연스럽게 주문을 시작했고, 그 모습에 하이네스는 당황하는 듯했으나, 곧 시작된 고기 행렬에 어느덧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역시 삼겹살이란, 국적 불문, 세계 불문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고기에 빠져 된장찌개까지 시켜먹고 나서야 두 사람의 포식이 끝이 났다.
"아.."
다 먹고 갈 때가 되니, 이제서야 자신이 너무 많이 먹었다는 걸 떠올랐는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는 하이네스.
그런 하이네스를 보며 피식 웃은 뒤 결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가려는데, 하이네스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하이네스."
"..."
불러도 대답 없이 어딘가를 계속해서 바라보는 하이네스.
"언니?"
일라이네가 다가가 하이네스를 불렀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뭔가에 홀린듯한 모습에 내가 다가가 어깨를 툭툭 치자, 그때서야 하이네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뒤이어 이어진 하이네스의 말에 우리 역시 같은 곳을 바라봐야만 했다.
"저 사람..아니. 저 남자.. 인간이 아닌 것 같아요…."
"...?"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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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펠리스는 아직입니다 핳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