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편
<-- 또 다른 성녀 후보 -->
한바탕 난리가 난 벨베루스 군.
다소 갑작스럽게 등장한 탓에 일면식도 없는 하이네스의 외침이라 다들 믿기 어려웠을테지만, 펠리스는 대지의 신전 성기사들과 함께 어제저녁부터 함께 싸웠던 터라, 그녀의 존재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런 그녀의 말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악의 무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아이콘 성주의 목소리에서 절망이 느껴진다.
이미 한차례 폭풍처럼 지나가 버린 괴물들의 습격을 간신히 막아냈는데, 또다시 악의 무리가 달려들고 있다 하니 성주 된 입장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서 있는 건 최악의 행동이다.
저렇게 서 있을 시간에 수성 준비를 한다면 적어도 둘이 죽을 거 하나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둘 다 살아남게끔 바뀔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만큼 멍청한 게 없었다. 뭐라도 해보고 절망을 하든 후회를 하든 하는 거다.
[ 팬텀 스티드 소환 ]
"가자. 일라이네."
"네!"
해서 곧장 팬텀 스티드를 소환했다.
수성전을 해야 하니 내성 성벽으로 갈 생각이었다.
적어도 여기서 수성전을 하는 것보단 성벽에 의지해서 싸우는 게 훨씬 안전할 테니까. 일라이네를 불러 유령마에 태우고 바로 떠나려 하자 멀리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저희도 같이 가겠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알터였다.
용병들을 데려온 알터는 아마도 이 상황이 자신들 때문에 벌어진 것임을 아는 듯했다. 그러니 전투에 자신들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로 인해 벌어진 일. 위험하더라도 자신들의 손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나를 따라가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곳에는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게다가 전투까지 벌어진다면 저들과 함께 있는 것보단 내 옆에 있는 게 훨씬 안전하리란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들의 합류를 거절하지 않았다.
사람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 팬텀 스티드 소환 ]
거기에 플레이어들도 합류했다.
보호 대상인 하이네스가 움직이니 그들도 따라가야만 했다.
"가자."
-푸르릉
용기의 신전 소속 성기사들과 하이네스, 플레이어들과 용병들에게 일일이 팬텀 스티드를 소환해주자 다들 익숙하게 올라탄다. 용병들은 다소 당황한 듯싶었으니 성기사들이 아무 말 없이 올라타니 하나둘 안장 위로 올라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벨베루스 군과 성주는 가만히 서 있었지만, 나를 비롯한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용병들은 벨베루스 군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며 불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걸 제외하면 다들 앞으로 일어날 전투에 집중하는 듯했다.
탁-
팬텀 스티드를 타고 날아온 덕분에 금세 내성 성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은 시간을 보니 대략 3분여.
"정찰 시작해."
[ 알겠습니다. ]
나는 성벽에 내려서자마자 스펙터를 불러 정찰을 보내고 주변을 돌아봤다.
다행히 외성과 달리 내성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성문이 완전히 박살 난 걸 제외하면 특별히 문제 될 건 없다. 성문 공간만 메꿀 수 있다면 수성도 무리 없을 것 같다.
이전처럼 대규모 공성전이라면 모를까. 플레이어들이 더 추가되지 않는 것으로 봐선 대규모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공격해오는 악의 무리도 숫자가 적을 터. 숫자만 적다면 수성은 어렵지 않다. 하이네스의 말대로라면 아마도 네임드 몬스터가 다수 포진된 무리일 것이다. 제법 정확하게 예측을 하는 것 같으니까.
"마법사분들! 혹시 성문 자리 막을 마법 같은 거 있으신 분?"
"제가 하겠습니다."
플레이어들도 박살 난 성문을 대체하는 데 주력했다.
대지 계열 마법사가 먼저 나서서 돌로 된 벽을 세운다. 세 겹을 연달아 세워 성벽 바깥쪽, 안쪽에서도 벽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곤 해자처럼 성벽 바깥쪽의 땅을 도려내 성문을 바로 공략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해두니 진짜 성문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그럴싸해졌다.
패인 구덩이에 물까지 채워 넣자 더욱 견고해졌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 주위에 또 다른 벽을 세우니,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물론 네임드 몬스터 같은 놈들이 기술을 사용해 부순다면 단번에 뚫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벽만 제대로 세워줘도 단번에 공략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뚫리기 전에 전부 죽이면 되겠지."
그래.
사실 나는 뚫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려고 괴물들의 사체를 잔뜩 가져온 것이기도 했으니까.
[ 무덤지기 ]
무덤지기 공간을 열어 가져온 괴물들의 시체를 성벽 주위에 잔뜩 뿌리기 시작했다. 시체야 널리고 널린 덕분에 양은 충분했다. 시간이 없어 정교하게 준비하진 못했지만, 남은 시간이 끝나기 전에 나름대로 수성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 숫자는 대략 2천. ]
[ 특이 개체들이 다수 포진된 것 같습니다. ]
[ 선두에 꽤나 강해 보이는 괴물이 있습니다. ]
그사이 정찰 나갔던 스펙터들이 돌아와 보고를 시작했다.
남은 시간이 없는 만큼 놈들이 가까워진 터라 정찰도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보스 몬스터 하나에 네임드 몬스터 다수인가."
예상한대로 괴물들의 숫자는 적었다.
팔콘 수성전 당시 만 단위의 군대를 막았고, 럼블턴 수성전에서도 최소한 오륙천이었다. 그에 반해 2천이면 적은 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수성전을 여러 번 겪다 보니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문제가 될 요소라면 적은 수에 비해 네임드 몬스터가 많다는 점.
그리고 보스 몬스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벨카서스."
"오랜만에 부르는군."
우웅-
악마를 봉인한 구슬을 꺼내 벨카서스도 불러냈다.
비밀 병기처럼 두려고 했다만, 보스 몬스터가 포함된 부대이니만큼 최선을 다해야한다. 보스 몬스터가 있다면 무조건 잡아야 하니까. 그러려면 벨카서스도 참전해야만 한다.
[ 남은 시간 : 1분 11초 ]
"보인다!"
수성 준비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저 멀리서 악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간간히 남아있는 건물을 완전히 박살 내며 달려오는 괴물들.
"크오오오오오오오!!!"
괴물들 역시 우리를 발견한 듯.
다른 놈들보다 머리 두 세 개는 큰놈이 괴성을 터트린다.
[ 추살장군 번니르 ]
"장군."
놈의 이름은 `추살장군 번니르`.
머리는 뱀이요 몸은 사람의 형상을 띈 보스 몬스터. 상당히 괴랄 한 모습이라 여기저기서 움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러자 용기의 신전 성기사들이 빠르게 성호를 그으며 주문을 외웠다.
"용기의 가호."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나아갈 수 있는 힘."
[ 용기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
[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발동됩니다. ]
[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발동됩니다. ]
[ 일시적으로 상태 이상 저항력이 증가합니다. ]
[ 불안감, 두려움 등 부정한 생각을 지워냅니다. ]
[ 일시적으로 공격 성공 시 추가 피해 효과가 적용됩니다. ]
용기의 신전답게 그에 어울리는 보조 마법들이다.
사제들이 쓰는 건 아니라 종류는 다양하지 않았지만, 제법 괜찮은 마법들이다. 특히나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같은 마법은 긴장으로 가득했던 이들의 마음을 풀어주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그래! 해보자고!"
"바로 깨고 진짜 돌아가서 쉰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다들 힘냅시다!"
.
.
특히나 상당히 지쳐있던 플레이어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보스 몬스터란 존재가 주는 공포를 밀어낸 듯. 다들 한 마디씩 소리를 지르며 잡념을 털어내고 마력을 끌어올리며 전투 자세를 잡는다.
[ 남은 시간 : 15초 ]
"준비해."
[ 명령만 하십시오. ]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뼈 지팡이와 사념의 서를 쥐었다.
다들 제법 기세가 올라온 것 같으니, 수성 자체는 그리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해도 될 것 같았다.
"제일 목표는 보스다."
"알겠다."
[ 알겠습니다. ]
그러니 나는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
수성은 저들에게 맡기고 요인 암살과 포인트 획득에 주력한다. 특히 보스 몬스터. 사살 포인트뿐 아니라 보스 몬스터들이 갖춘 특별한 능력 획득이 가능한 타이밍이니 그걸 놓칠 수 없지.
퀘스트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면서 상당히 이상하게 흘러오긴 했지만, 어쨌든 `End`표시까지 떴으니 이번이 마지막 퀘스트일터.
별다른 보상 없이 끝날 것 같았던 퀘스트였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 제대로 긁어가야겠지.
"일라이네. 깃발."
"네!"
이 지루하고 피곤했던 퀘스트의 마침표를 찍는 만큼.
최대한 크고 뚜렷한 마침표를 찍어야겠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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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드디어 성녀 파트가 끝나갑니다. 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