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편
<-- 또 다른 성녀 후보 -->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
매우 급한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며칠간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무덤지기의 공간만 열면 된다는 걸 순간 잊어버리고 굳이 미친놈처럼 달려왔다. 물론 팬텀 스티드가 달렸고, 나는 말 위에서 뛰어내린 게 전부이긴 하지만.
어쨌든.
"세이프."
그래서 살렸다.
타이밍 좋게 달려 나온 이블 나이트와 스켈레톤 나이트 마스터가 네임드 몬스터 두 마리의 머리를 잘랐고, 그 뒤로 쏟아져나온 불사의 군대가 괴물들로 이루어진 파도를 깨부순다.
"...어?"
모든 부대를 소환해두고 자리를 잡자.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서 있는 성주가 보였다.
"..대..대체..누구.."
내 말에도 여전히 멍한 표정인 성주.
당황스러울 거다. 죽음을 직감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튀어나온 내가 구해준 것도 모자라서 괴물들마저 학살에 가깝게 쓸어버리고 있으니까. 아마도 궁금한 게 참 많을 것이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고 있을 시간에 한 마리라도 더 죽이지그래?"
그런 궁금증 풀어주려고 여길 찾아온 게 아니다.
한시 바삐 퀘스트를 끝내는 게 내 목적이다.
"지원군이다."
그래도 최소한 안심은 하게 해준다.
팔콘 수성전이나 럼블턴 수성전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왕이 보내준 지원군`소리를 해봤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우선."
[ 블러드 필드 ]
[ 데드 레인 ]
괴물들에게 시선을 돌려 뼈 지팡이와 사념의 서를 꺼내고 하나하나 마법을 발동시킨다.
불사의 군대를 쏟아내긴 했지만, 기왕 참여한 전장.
"포인트는 확실하게 챙겨야지."
참여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참여했다면 최대한 벌어간다.
"망국의 기사단."
벨카서스를 제외한 모든 전력을 불러낸다.
벨카서스는 만에 하나, 비밀 병기처럼 사용할 전력이라 부르지 않았다. 첫 번째 왕 레비아탄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전략 중에 하나가 `적에게 경험을 쌓게 하지 말 것`이다.
모르고 당하는 것만큼 아픈 게 없다.
망국의 기사들까지 전장에 참여시키자 확 달라진 분위기의 전장이 눈에 들어온다.
"네크로맨서.."
"아직도 안 갔나?"
2차, 3차 개체로 구성된 불사의 군대가 괴물들을 밀어내는 동안.
아직도 내 옆에 서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성주가 내가 깜짝 등장했을 때보다도 더 놀란 표정으로 불사의 군대와 나를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아!"
그러더니 뭔가가 떠오른 듯 탄성을 내지른다.
그러더니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
"왕의 네크로맨서?!"
"...?"
나는 처음에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팔콘 성과 럼블턴 성을 악의 군대로부터 구원했다는 왕의 숨겨진 검... 설마 그 네크로맨서라니.."
"...."
"설마 이곳의 소식이 국왕 폐하께 전달된 것입니까?"
뭐라고 홀로 떠들더니 이내 나를 보며 존댓말까지 하며 경외로운 시선을 보내는 성주.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혼자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내려놓았던 대검을 쥐고 몸을 돌린다. 그러더니 성주의 생존을 확인하고 안심하던 기사들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나간다.
"구원군이 도착했다! 왕의 네크로맨서다!! 우린 승리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성주의 외침에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성주는 사람들이 바라보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직 `구원군이 왔다! 승리할 수 있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그저 거친 대검을 힘차게 휘두르며 괴물들을 베어 가고 있었다.
"..뭔가 꼬여가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성주를 보며 왠지 모를 묘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어쨌든 상황 자체는 좋게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 계획과 다르게 자칫 조용한 참전으로 이어질 뻔한 내 존재감이 확실하게 전장 전체로 퍼져나간 건 물론이고, 그 덕분에 죽을 둥 살 둥 막아내던 이들의 기세가 조금씩 살아났다.
기세가 살아나니 죽음 뒤에 가려져 있던 삶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살아남은 자들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그저 밀리기만 하던 전선이 조금씩 회복되었고 내 불사의 군대와 합쳐지며 완전히 승기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괴물들의 숫자가 수 천마리를 넘어가면 모를까.
고작 천여 마리 정도로 불사의 군대가 더해진 벨베루스 군을 뚫어낼 힘이 없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승리할 수 있다!"
"나를 따르라!!"
"지원군! 왕의 네크로맨서가 우리와 함께한다!!"
특히 가장 앞에 서서 대검을 휘두르며 거칠게 소리치는 성주의 행동이 벨베루스 군 전체의 사기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으아아아악!! 죽어라!!"
"다 뒈져버려라!!"
"전부 쓸어버려!!"
"가즈아!!!!"
.
.
확연히 달라진 기세.
게다가 마침내 내성을 지나온 하이네스와 성기사들, 그리고 십수 명의 플레이어들이 합류하면서 상황은 더욱 좋아졌다. 앞뒤로 괴물들을 감싸고 괴물들을 쓸어낸다.
"흐아아아압!!"
후우우웅-
콰직!!
쿠웅-
마침내.
마지막까지 살아 움직이던 괴물의 머리 위로 성주의 대검이 박히는 순간.
벨베루스 성 수성전의 결말은 `승리`와 `생존`으로 마무리되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이겼다!!"
"살았다!!"
"성주님 만세!!"
"만세!!"
.
.
저녁부터 시작되었던 기나긴 전투의 끝.
살아남은 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부둥켜 앉는 게 보였다.
"드디어 끝났나."
"이윤님!"
한숨과 함께 뻐근한 어깨를 돌려주고 있으니 하이네스를 보호하며 싸우던 일라이네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온다.
"어디 다친 곳은.."
"있을리가."
"다행이에요..!"
설마 이런 곳에서 내가 다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일라이네는 진심으로 다행이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내 옆자리에 섰다. 나는 그런 일라이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 사이. 대검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던 성주가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성주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개를 숙인다는 건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는 뜻일 터. 그를 보고 있자니 럼블턴 성의 성주가 떠오른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 머저리. 물론 그 덕분에 타락한 기사와 이블 나이트라는 좋은 소환수들을 얻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잘 된 일이긴 하다만.
어쨌든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모습이다.
"어제저녁 괴물들을 발견하자마자 지원 요청을 하긴 했지만, 설마 하루 만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
다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를 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묻고 싶었지만, 왠지 그랬다가는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에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괜히 부정하고 무슨 소리냐 떠드는 것보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이, 착각한 대로 두는 게 더 편할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알터와 하이네스가 무리를 이끌고 내게 다가왔다.
일라이네에게 전후 사정을 들었는지,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 경외감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 이들을 구하기 위해 먼저 출발하셨을 줄이야."
특히 성기사들과 알터의 눈빛이 굉장히 진지했다.
아마도 퀘스트를 빨리 끝내야겠다는 내 행동을 `용기 있는 행위`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넘어가진 않았다.
"이분들은.."
오히려 알터들의 등장으로 내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한한 경외감을 보내고 있던 성주의 시선이 돌아갔으니 다행이었다.
"아. 저희는 용기의 신전 소속 성기사들입니다. 저는 성기사단장 알터라고 합니다. 이분들은 성녀 후보이신 하이네스님을 도와 호위를 해주신 분들입니다."
"...성녀 후보?"
다만 반갑게 인사를 나누려는 알터와 달리 `성녀 후보`란 말을 들은 성주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버린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걸까.
악수하려던 알터조차 당황할 정도로 단번에 미소를 지워버린 성주.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어디론가로 향한다. 정확히 `성녀 후보`라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성주의 갑작스런 행동에 그를 따라왔던 기사들도 어색하게 인사를 하더니 급히 성주를 따라 달려간다.
"뭐지."
"왜 그럴까요?"
나는 성주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그가 성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여인을 향해 다가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투가 끝난 후 손을 모으며 기도를 드리고 있던 성기사들과 여인은 성주가 다가오자 급히 몸을 일으키며 그를 맞이했다. 신기한 건 굳어버린 얼굴의 성주와 다르게 그들은 성주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는 점이다.
성주는 그들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을 했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인과 성기사들의 얼굴 역시 굳어버렸다.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던 터라 자세한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보이는 광경으로는 성주가 저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화를 내는 게 맞았다.
그가 이렇게 외쳤으니까.
"나가라고 하지 않았소!"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감사합니다.
제가 요즘 1편이 자주 보이는 이유!
그것은 말이죠.
'부.담.감'
많이들 봐주시고 좋아해주시니 그에 맞춰 더 좋은 글을 써야한다는 부담감이 자꾸만 그를 지우게 만드는 것 같네요..
제가 아직 실력이 부족하니까요.
쩝.
언젠가는 더 나아지겠죠!?
p.s 그러니까 추천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