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편
<-- 성녀의 피 -->
"성벽이 보입니다!"
"아 드디어 다 왔다…."
"빨리 가서 쉬고 싶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냥 좀 자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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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지루했던 공방전과 추격전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벽 안개 사이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성벽. 사람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그간 사흘이 넘도록 팬텀 스티드 위에서만 생활해야 했기에 누적된 피로가 장난이 아니었다.
땅만 못 밟았나? 이동하는 동안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야 했다. 괴물들의 전체적인 실력이 그리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전투 자체를 지속한다는 건 사람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치게 한다.
당장 잠도 제대로 못 하는 것만 따져도 이해가 갈 것이다.
그렇기에 다들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내려간다."
나는 벨베루스의 성벽이 보이는 곳에서 전원 하마(下馬)를 외쳤다.
이대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너무 눈에 띄는 데다가 오히려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받을 수 있으므로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이동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거리 자체도 그리 멀지 않은 터라 괴물들이 따라오고 있다고 해도 충분하다.
애초에 괴물들이 주변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내려온 것이기도 하지만.
"감사합니다."
하이네스는 땅에 내려오자마자 일라이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성장기도 지나지 않아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하이네스는 지난 사흘간 아무런 불평 없이 버텨온 것도 대단한데 감사 인사까지 하다니. 어린 소녀답지 않은 의젓한 모습이었다.
"하이네스님."
"네."
알터는 땅에 내려오자마자 내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표하고 하이네스를 자신의 곁으로 데려갔다.
감사한 건 감사한 일이고 최종 보호는 자신이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리라. 내 곁이 가장 안전할 테지만 델도 붙여두었으니 별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 지상으로 내려온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산에서 내려갔다.
[ 주인님. 부대가 전원 집결했습니다. ]
"천천히 따라오라고 전해. 성 앞에서 만나러 갈 테니까."
[ 알겠습니다. ]
산에서 내려가는 동안.
뒤편에서 악의 무리 추격대를 막아오던 불사의 군대도 어느덧 가까운 곳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을 위스퍼가 전했다. 아쉽게도 첫날과 이튿날을 제외하면 추격대가 없었던 터라 포인트 벌이에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벨베루스 성까지 따라오면서 중간에 본 괴물들을 적당히 박살 내고 왔다고 하니 많진 않아도 쏠쏠하게 벌었을 것이다.
그렇게 산길을 따라 내려오길 대략 10분여.
어느덧 공중에서 보았던 성벽이 실제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도착이다!"
"와. 드디어 왔다."
"빨리 귀환 좀.."
"죽겠다.. 장비를 들 힘도 없네."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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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들은 성벽이 보이자 서로를 향해 수고의 인사를 나누며 떠들썩하게 걸어왔다.
과묵했던 성기사들 역시 활기찬 분위기였으니 다들 휴식이 그립긴 그리웠었던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알터는 성벽이 눈앞에 보이자 성기사들을 데리고 앞장섰다.
목표 지점에 다 온 마당이니 누가 앞장서든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성기사들이 앞에 있는 게 보기는 좋겠지.
"돌아가면 푹 쉬고 외식이나 하자."
"정말요?"
"뭐 먹고 싶은지 생각이나 해둬."
파티 디펜스이니 이번 퀘스트가 끝나면 강제 귀환할 것이고. 앞으로 솔로 디펜스를 참가하는 데 며칠은 걸릴 테니 풀 클리어가 남은 31단계 재시도와 던전 탐사를 제외하면 한동안은 시간이 남을 것이다.
오랜만에 휴식일 테니 외식 한 번 나가는 것도 좋겠지.
이번에는 삼계탕 같은 기력 회복에 좋은 보양식을 먹으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성문을 향해 나아가던 순간이었다.
"어?"
기분 좋게 성으로 다가가던 와중. 누군가 의문 가득한 탄성을 내뱉는다.
활을 든 젊은 여자 플레이어였다. 여자 플레이어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인상을 찡그리고 성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뭔가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해서 친해진 플레이어 중 하나가 이유를 물었는데 그 대답이 정말 의외였다.
"원래 저런 성벽에 경비병들이 있지 않나?"
"성벽에?"
"어. 병사들 세워놓고 보초 세우지 않아? 근데 아무도 안 보이는데?"
"그게 무슨?"
"...?"
여자 플레이어의 말에 다들 고개를 위로 들며 성벽을 응시한다.
그리고 여자 플레이어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새벽 안개가 끼어있어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건 맞았다. 게다가 이런 안개가 끼어있으면 당연히 보여야 할 횃불이나 화로(火爐)도 보이지 않았다.
뭘까.
들떠있던 이들의 감정이 어느 순간 조금씩 가라앉는다.
"가보면 알겠지."
나도 뭔가 이상하단 느낌을 받긴 받았지만. 그렇다고 뭐라 단정 지을만한 상황은 없었기에 우선은 계속 걸었다. 정확한 상황은 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뭐 단순한 근무 태만일 수도 있으니까. 혹은 교대를 하고 있다던가.
그런 생각으로 조금씩 더 성문에 가까워질 즈음.
"없는데."
"없어?"
"없어."
또다시 여자 플레이어가 의문 가득한 물음을 내뱉는다.
그리고 이제는 시력이 좋은 플레이어가 아니더라도 성벽에 아무도 없다는 걸 볼 수 있는 거리였기에 다들 바쁘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나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성문에 완전히 다가갔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익숙하게 달려 나와야 했을 검문소 경비병들이나 외성 수비병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피?"
"뭐야.. 여긴 불에 탄 자국인데?"
"성벽에 금이 갔어?"
"저긴 무너졌는데?"
.
.
.
이해할 수 없는 흔적들이 우리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분히 `전투의 흔적`으로 간주할만한 것들이 말이다.
성벽 곳곳에 묻어있는 피와 패인 대지. 갈라진 성벽과 심지어 무너진 흔적까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성문에 다가갈수록 흔적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고, 성문은 아예 작살이 난 상태였다.
"...이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는 미소를 잃은 채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알터에게 물었다.
이건 누가 봐도 전투가 일어났음을 알리는 흔적들이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벨베루스가 안전하지 않다는 뜻과 같다. 원래는 여기서 고용한 용병들과 합류해 신전 총단으로 가야 하는 게 맞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벨베루스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다지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것도 문제다. 악의 무리와 괴물들은 여전히 쫓아오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런 경우는 퀘스트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게요. 우리 귀환 못 하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
"아니면 연계 퀘가 더 길어지는 건가."
.
.
플레이어들은 알터나 성기사들과 다른 이유로 인상을 찡그렸다.
이전까지는 퀘스트의 주요 목적이 당연하게도 하이네스를 벨베루스에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물론 팔콘 수성전 때처럼 더 이어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난이도를 보면 여기서 끝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공중 이동형 소환수가 없었다면 아마도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면서 상당히 힘들게 벨베루스까지 도착해야 했을 테니까.
상황이 어떻든 여기서 끝이라면 상관없지만, 여기서 더 이어진다면 상당히 곤란하다는 게 전반적인 생각 같았다. 그래서인지 모두의 시선이 알터에게로 향했다.
왠지 알터의 대답 여부에 따라 퀘스트의 진행 정도가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 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알터는 진입에 뜻을 두었다.
〈 파티 디펜스 - 성녀 후보 (2) 〉
: 악의 무리의 지속적인 공격에, 성녀 후보 하이네스를 호위하는 용기의 신전 성기사단 단장 알터는 가장 가까운 도시에 들러 충분한 전력 증강을 하려고 한다. 특히 신전 연합에서 파견했다는 용병들이 도시 벨베루스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만큼 그곳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알터와 성기사들을 도와 도시 벨베루스까지 성녀 후보 하이네스를 안전하게 호위하라!
[ 남은 시간 : 0분 ]
( 1/1 )
-완료!
〈 파티 디펜스 - 성녀 후보 (3) 〉
: 악의 무리와 성녀 후보 하이네스의 피에 홀린 괴물들의 공세를 무사 뚫고 벨베루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벨베루스의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갈라진 성벽과 흩뿌려진 피. 전투의 흔적이 다수 발견되면서 상황은 오리무중이 되어버린 상태. 이에 성녀 후보 하이네스의 호위를 맡은 성기사단 단장 알터는 벨베루스 내성으로 진입하려 마음먹었다. 뒤로 물러설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 간절한 도움을 바라는 그들을 도와 벨베루스 내성으로 진입하라!
[ 남은 시간 : 0분 ]
( 0/1 )
"역시 연계였나."
알터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올라온 새 퀘스트.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아무래도 팔콘 수성전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물론 그때와는 많이 다른 상황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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