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편
<-- 명예를 잃어버린 귀족 -->
성주 루돌프의 목이 떨어진 순간.
이미 퀘스트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봐야 했다. 다만 성주의 명령 자체는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이었기에 아무래도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
그리고 그것을 위해 타락한 기사가 직접 나섰다.
노 기사의 육체를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난 타락한 기사는 온몸이 검푸른 불꽃으로 완전히 변해버렸다. 귀화(鬼火)라고 해야 할까. 검푸른 불꽃을 태우며 내가 물어보는 타락한 기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타락한 기사가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검을 땅에 내리찍었다.
[ 일어나라. ]
짧은 외침.
아니 고요한 중얼거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퍼져나간 오염된 마력이 쓰러져있던 기사들의 육신을 붙잡았다. 원망과 한으로, 짙은 원한을 남기고 죽어야만 했던 기사들과 몇몇 백부장들이 오염된 마력에 휩싸이더니 인간의 육체를 벗어버리고 검푸른 불꽃을 받아들인다.
[ 타락한 기사가 하위 개체를 불러냅니다. ]
내 마력이 빠져나간다 싶더니 짤막한 메시지와 함께 새로운 개체들이 몸을 일으켰다.
평범한 3차 개체들처럼 공격적인 기술을 보유한 게 아니라, 소환형 기술로 내 마력을 소모해 십여 구 정도의 부하를 소환하는 타입이었다. 나쁘지 않은 기술이다. 위력이야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좋은 게 분명하지만 이런 식으로 숫자를 늘릴 수 있다면 다양성이 증가하니 충분히 좋은 기술이었다.
[ 전부 죽인다. ]
짧은 명령에 따라 타락한 육체를 얻어 새롭게 태어난 이들이 창검을 쥐고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전장은 완전히 멈춰버렸다. 온몸에서 시퍼런 불꽃을 뿜어내는 이들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대대적인 공사고 뭐고 진행이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성주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더욱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귀족들은 여전히 공격을 외치고 있었지만, 사실상 군권이란 성주에게만 주어지는 유일한 권한 중 하나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서 제 마음대로 병사를 부릴 수는 없었다. 성주가 함께할 당시야 성주의 암묵적인 묵인이 있었으니 병사들을 제멋대로 다뤘으나 지금은 그럴 권한이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명령이었다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친구였고 동료였고 전우였던 이들이다.
그런 이들을 향해 창검을 세우고 싶은 이가 과연 몇이나 있었겠는가.
성주가 죽어버린 상황에서 귀족들이 아무리 외쳐봐야 그 말을 따를 병사는 몇 없었다. `귀족`이라는 계급이 주는 압박감 자체는 남아있었지만, 그보다는 타락한 기사와 그 수하들이 주는 존재감이 더 큰 게 문제였다.
"뭐..뭣들하나!! 어서 공격하지 않고!!"
"이것들이 미쳤나?! 감히 우리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기사들은 뭘 하는가!"
.
.
.
다섯 귀족들이 외침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지만, 럼블턴의 병사들은 아예 창검을 내려놓았다.
그들 역시 타락한 기사와 수하들이 두려웠지만, 저들의 목표가 오직 귀족들이란 걸 알고 나서는 아예 자리를 비켜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한 네크로맨서가 끼어있었다.
"비켜."
럼블턴 성을 수호하기 위해 나타난 지원군이 직접 귀족들을 상대하려고 한다.
이미 그가 가진 무력과 능력을 알고 있다. 게다가 그가 럼블턴의 파괴가 아닌 수호를 위해 싸웠다는 것도 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그가 이번에도 럼블턴을 위해 나서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마저 생기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이번에도 럼블턴을 위해 귀족들과 대치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병사들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간끌지마."
[ 알겠습니다. ]
나는 사방으로 비켜서는 병사들을 보며 타락한 기사에게 명령했다.
어서 돌아가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보니 더 이상 이곳에 있어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지금 당장에라도 집으로 돌아간다면 돌아갈 수 있지만 퀘스트를 완전히 클리어하고 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끝낼 수 있을 때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좋다.
"막으란 말이다! 이 머저리 같은 놈들아!!"
"뭣들 하나!!"
병사들이 물러니 귀족들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귀족들이 할 줄 아는 게 무어가 있겠는가. 그저 아랫사람 부리는 것 외에는 그들이 할 줄 아는 건 없다. 병사들이 나서서 앞을 막아주지 않는 이상 귀족들은 타락한 기사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감히 어딜 미물 따위가!!"
"죽어라!!"
방패가 없는 이상 귀족들의 미래는 이미 결장이 난 상황이었다.
콰직-
서걱-
순식간에 잘려나가는 머리.
다섯 귀족가의 가주들뿐 아니라, 귀족가과 연루된 이들이라면 전부 죽어 나간다. 누구도 말리지 못하고, 누구도 나서지 않은 이 상황.
"가..감히!!"
"뭣들 하는 것이야!!"
물론 귀족가의 가병들과 귀족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의 명령에 따라 구르라면 구르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그들은 귀족들을 살리기 위해 나서려고 했다.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여차하면 그냥 죽여."
[ 알겠습니다. ]
정확히는 검은 로브의 남자가 부리는 언데드들이 문제였다.
철저하게 귀족들과 간격을 벌리듯, 사이를 파고들어 와 창검을 세우는 언데드들은 귀족들을 향해 다가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귀족들이 살려달라고, 뭣들 하냐고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어봐도 언데드들의 벽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다가갈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 이것은 아니 된다!! 나는 이 나라의 남작이란 말이다!! 감히 귀족의 몸에 손을 대는 것으,,"
콰직-
[ 인간이길 포기한 짐승을 보고 귀족이라 부르진 않는다. ]
마지막까지 발악하듯 소리치는 남자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끝으로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끝났나."
〈 파티 디펜스 - 성 럼블턴 수성전 - 명예를 잃어버린 귀족 (Sub) 〉
: 성 럼블턴의 수성은 처절했습니다. 성주와 귀족들이 성을 버리고 떠났음에도 남은 기사들은 병사들을 다독이며 성문을 막았고 결국 악의 군대를 패퇴시키며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백의 병사들이 죽고 그보다 많은 이들이 다쳤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럼블턴이었습니다. 허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명예를 버렸던 성주와 귀족들이 다시 성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도망쳤었던 사실을 지우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려 합니다.
[ 남은 시간 : 0분 ]
-완료!
그 끝을 의미하듯 완료 메시지와 함께 귀환을 위한 남은 시간이 나타난다.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이번 용병 퀘스트는 상당히 피곤하게 기억될 것 같다.
이틀 연속 강행군에 대규모 디펜스에 서브 퀘스트까지. 그나마 보상으로 가져갈 것들이 좋으니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퀘스트였을 것이다.
물론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거나 하기 싫다고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결과에 따른 기분이 상당히 차이가 있었으리라.
"보상도 보상이지만, 일단 돌아가는 대로 잠을 좀 자야겠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참고 있었던 피로가 한가득 몰려오는 기분이다.
끝나면 일라이네와 함께 외식이라도 나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잠시 미뤄야만 할 것 같다. 당장 잠을 자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단순 노동을 한 것도 아니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치른 몸이다 보니 그 피로가 더욱 심각했다.
"저…. 저기 감사.."
귀환까지 약 20여 초 정도 남은 시점에서 누군가 내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찾아왔다.
얼굴을 보니 럼블턴 수성전에 참가했던 기사이자 이번 사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사였다. 아직 앳된 얼굴로 고작해야 나와 비슷한 정도의 나이 같았다. 그런데 이 앳된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은 묘한 기분은 뭘까.
플레이어도 아니니 어디선가 만났을 리는 없었을 테고..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해주신 것. 정말로 감사…. 합니다."
그런건가.
얼굴이 어째서 익숙한 싶었더니.
루돌프 성주 손에 죽은 노 기사의 아들이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다부진 얼굴이지만 눈 끝에선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게 감사를 표한 앳된 기사는 몸을 돌려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이제는 푸른 귀화(鬼火)를 태우는 타락한 기사가 되어 인간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비는 아비라고 하는 듯. 깊게 허리를 숙였다. 타락한 기사는 생전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무심한 듯 손을 들어 올린다. 마치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 남은 시간 : 0초 ]
다만 아쉽게도 내게 남은 시간이 없었기에 두 부자의 인사는 여기까지였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세상이 달라졌고, 눈을 떠보니 내 앞에 있는 것은 전장이 아닌 일라이네였다.
"이제야 오셨네요."
"아."
한참 전에 먼저 돌려보냈던 터라, 돌아오지 않는 나를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는지 검은 사제복에 검을 차고 있었다.
언제라도 전투에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그런 일라이네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넘어지듯 쓰러지는 나를 일라이네가 감싸 안듯이 받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감겨버린 눈과 함께 기절하듯 잠에 빠져야만 했다.
"..저녁 다 식는데…."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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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