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편
<-- 용병 -->
"일라이네! 이동이다."
"네?"
"일단 와."
"네!"
당황스러운 메시지에 잠시 눈을 껌뻑였으나, 우선 차근차근 장비와 병사들을 챙겼다.
그나마 이동 시간이 1분이라 중요한 것들은 모두 챙길 수 있었고, 일라이네도 늦지 않게 무덤지기의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하고 나니 기가 막히게 남은 시간이 끝나며 빛이 번쩍였다.
[ 이동을 시작합니다. ]
번쩍-
〈 파티 디펜스 - 성 럼블턴 수성전 (End) 〉
: 성 럼블턴을 향해 다가온 수 천마리의 괴물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사악한 흑마법사들로 인해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성벽은 무너지기 직전에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의 숫자는 겨우 2천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성 럼블턴의 멸망을 막고 사악한 무리를 패퇴시키십시오!
[ 남은 시간 : 0초 ]
[ 승리 조건(특수) ]
[ 1. 성 럼블턴의 파괴도 80% 이하 ]
[ 2. 성 럼블턴의 사망자 50% 이하 ]
[ 현재 파괴도 : 32% ]
[ 현재 사망자 : 14% ]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사라지는 빛을 느끼며 눈을 뜨니 퀘스트 메시지가 올라왔다.
퀘스트 자체야 사실 팔콘 수성전때와 그리 다르진 않았다. 다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퀘스트 진행 도중이었다는 것. 그리고 상황에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파괴도는 무려 30퍼센트가 넘어간 상태였고, 사망자 역시 14퍼센트나 된다. 승리조건이 파괴도와 사망자인 만큼 다른 건 둘째치고 이것부터 눈에 들어왔다.
"우선 마력부터 채우고 가자."
아직 조금 전 전투의 여파가 완전히 가신 게 아니라 당장 달려가기보단 무덤지기의 공간을 열고 집으로 향했다.
"바로 출발할까요?"
"우선 잠깐이라도 쉬자. 마력도 다 채워야 하고, 부족한 부분도 채우고 가야 하니까."
"네!"
집으로 돌아오니 무장을 끝낸 일라이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갈 모양새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앉았다. 그렇게 대략 30분 정도 손실된 병력도 채워 넣고, 마력과 컨디션도 어느 정도 회복한 이후에야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 현재 파괴도 : 39% ]
[ 현재 사망자 : 17% ]
"벌써?"
"네?"
고작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파괴도와 사망자가 상당히 늘었다.
겨우 5, 6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장 성벽이 붕괴 직전일수도 있고 혹은 이미 붕괴해버렸을 수도 있다. 성벽이 사라지면 수성이 매우 힘들어지는 터라 그건 막아야 한다.
"어느 쪽이지?"
[ 이쪽입니다. ]
"가자."
"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미리 뿌려두었던 위스퍼들이 길을 찾았는지 앞장서서 날아가기 시작했고, 나와 일라이네는 팬텀 스티드틀 타고 뒤를 따랐다. 우리가 소환된 곳과 전장은 그리 멀지 않았다.
평범한 들판을 넘어가니 바로 성이 보였고, 그 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 돌격장군 알파차 ]
"보스는 저놈이구나."
거대한 포효와 함께 선봉에 서서 성문을 두드리고 있는 거대한 괴물.
멀리서도 그 모습이 확연하게 보일 정도다. 그 옆으로 열 댓마리의 네임드 몬스터들이 끼어서 성벽을 공략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보스몬스터와 네임드 몬스터들이 대거 몰려있다 보니 성문 쪽이 제대로 수비가 되질 않았다.
플레이어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다수 포진되어있었지만, 파괴를 늦추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우선…. 뒤쪽부터. 일라이네. 저항 마법부터 시작해."
"네. 어둠의 가호. 검은 장막."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지만, 멍청하게 곧장 뛰어들 생각은 없다.
내가 뭐라고 수천 대군 안으로 뛰어든단 말인가. 이런 건 뒤에서부터 흔들어줘야 하는 법. 특히 항상 후방으로 빠져있는 흑마법사들을 처리하는 게 보스 몬스터를 사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망국의 기사단. 리빙 아머, 스펙터. 그리고 델까지."
스르르륵-
스으윽-
일라이네가 마법 저항력과 저주 저항력을 상승시켜주는 보조 마법을 거는 동안 나는 가장 은밀하게 기습을 감행할 수 있는 암살자들을 불러냈다.
형체조차 식별하기 어려운 암살자들과 그림자 속에서만 살아가는 어둠의 상급 정령 델. 기습을 위한 부대로는 최상급이다.
[ 무엇을 해야하나. ]
"가서 흑마법사로 보이는 놈들을 찾아 죽여. 하나도 빠짐없이. 하위 개체를 소환해도 좋아."
[ 알겠다. ]
[ 알겠습니다. ]
"흑마법사들이 모두 죽었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알아서 움직여. 델만 복귀하고."
이것으로 후방 기습은 끝이다.
설령 기습에 실패해 기습 부대가 괴멸당한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흑마법사들의 발이 묶여있는 사이, 전쟁의 판도는 바뀔 테니까.
"우리도 가자."
"네!"
*
"젠장! 이걸 어떻게 막으라는 건데!"
"이게 다 뒤지란 소리지!"
"떠들시간에 돌이라도 던져요!"
"아오! 제발 좀 뒤져라!"
.
.
성 럼블턴의 성벽 위.
백여 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괴성을 지르며 마력을 쏟아내는 현장은 상당히 처절했다. 근접 계열, 원거리 계열 너나 할 것 없이 살아남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던지고 있었으니까.
"제기랄!! 제발 좀 뒤져라!!"
특히 플레이어 중에서도 소위 실력자로 통하는 로우첸은 더욱 처절했다.
중급 궁수라는 직업을 가진 덕분에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안전한 지역에서 화살만 날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를 비롯한 원거리 계열 플레이어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자리를 배정받았고 덜 위험했다.
해서 로우첸은 이번 디펜스 역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전투 시작 후 10분 만에 바뀌어야만 했다.
매우 어처구니없게도 전투가 시작된 틈을 타서 귀족들이 제 목숨 보전하고자 일부 병사들을 이끌고 도망쳐버린 탓이었다.
"그 빌어먹을 자식들!"
귀족들이 끌고 나간 병력만 무려 2천.
본래 럼블턴이란 성의 수비 병력이 5천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거의 절반을 끌고 나간 것과 다름없었다. 그것도 성주란 자식이 주축이 되어 벌인 짓이었다. 설마 이딴 식으로 퀘스트가 진행될 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사실 때문에 전투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보급을 맡았던 병사들이 급히 전선에 배치돼버리니 보급은 늦어지고. 보급이 늦어지니 제때에 공격할 수 없어지고, 제때에 공격할 수 없니 다시 전선이 뒤로 밀리고 있고.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돌 더 가져와!"
그런 탓에 로우첸 역시 중급 궁수임에도 남은 화살이 없어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돌멩이뿐이랴. 던질 수 있는 건 죄다 던지는 중이다. 심지어 시체까지도 말이다. 사람의 사체는 괴물들에겐 아주 좋은 미끼다. 인간을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만큼 주요 순간에 시체를 던져주면 잠깐이지만 시선이 돌아간다.
그 틈을 노려 몇 마리라도 더 잡을 수 있어 죽은 이들에겐 미안할 따름이지만 시체조차 무기로 쓰고 있었다.
"아.. 안 되겠어.. 도망쳐야 해.."
"난..집에 아프신 어머님이…."
"나도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여기서 죽을 수 없어."
.
.
.
그러나 이렇게까지 처절한 전투를 치르고 있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고, 오히려 사기만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사기가 떨어지니 그나마 잘 막아주던 병사들과 플레이어들도 `승리`가 아닌 `생존`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나마 기사들이 나서서 병사들을 독려해주며 어찌어찌 버텨보고 있지만…. 아마 저 성문이 뚫린다면 그것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정말 여기서 죽는 건가.."
자꾸만 머릿속에 `패배`란 단어와 `죽음`이란 단어가 스쳐 지나간다.
집에서 고이자고 있을 아내와 아들의 모습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은 지 고작 3개월. 사고를 쳐서 임신을 해버렸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또 잘해줄 자신이 있었기에 당당히 결혼까지 했건만.
이 따위 세상에서 이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다.
로우첸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갔다.
"지원군이 곧 올 것이다! 국왕 폐하께서 지원군을 보내주신다 하였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그런 그의 귓가로 늙은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주가 없는 이곳의 임시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알카레스라는 이름의 노장이었다. 아마 저 노장이 없었다면 이미 성벽은 뚫렸을 것이다. 그의 지휘능력은 탁월했고 가진 바 실력도 뛰어났다.
"자랑스러운 럼블턴의 영웅들아! 국왕 폐하께서는 절대 이 럼블턴을 버리지 않으신다! 나를 믿어라!!"
다만 그의 노력에도 전세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고, 그가 말한 지원군은 여전히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음이 문제였다.
처음에야 병사들이든 플레이어들이든 그의 말을 믿고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의 말을 믿는 이가 없었다. 그저 `하얀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로우첸은 다시 활을 들어 올렸다.
하얀 거짓말이란 걸 알지만, 그렇다고 활을 놓을 수도 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놈은 더 데려가야 그나마 덜 슬플 것 같았으니까. 마침 보급병 하나가 화살이 가득 든 상자를 던져준다.
"그래.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간..사람?"
그렇게 새로운 화살을 시위에 걸치며 전장을 바라보는데, 이전과 달라진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말을 타고 하늘을 달리는 사람들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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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