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편
<-- 안의 복수 -->
혼란(昏亂)이라는 감정은 참으로 특이하다.
혼란스럽다는 감정은 그 하나만으로는 머리를 툭툭 흔드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털어낼 수 있을 만큼 약하다가도, 다른 감정과 합쳐지면 삶을 유지하지 못할 만큼 강력해지기도 한다.
특히나 슬픔, 분노, 공포 등 마이너스 적인 감정과 하나가 되었을 때는 그 위력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다.
바로 지금처럼.
[ 저주 - 혼란 ]
"으으..으…. 오지마…. 오지마.."
"빌? 빌 왜 그래?"
"오지 마..오지 말란 말이야!!"
"빌! 정신 차려!!"
"으아아아악 괴물아!! 죽어!!"
"비-"
콰득-
악의 무리로 인해 공포가 가득한 이곳.
혼란의 저주는 너무나도 쉽고 자연스럽게 전장에 녹아들어 가며 마음 깊숙한 곳에 쌓이고 있던 마이너스한 감정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혼란이라는 이름의 악마는 금세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왜 그러나!!"
"벼…. 병사들이 갑자기!!"
"끄아아악!!"
"플랭크가 미쳤다!!"
"이러지 마라니까!!"
악의 무리를 상대하기 위해 모여 있던 병사 중 몇몇이 눈을 뒤집으며 창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동료를 말리려던 병사들이 창에 맞아 죽거나 다쳤고, 피가 튀어 오르자 정신이 나간 병사들이 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잘 훈련된 군대의 견고함`이라는 이름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부대 여기저기서 발생하기 시작한 돌발 행동에 이미 난잡했던 전장은 완전히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고,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혼란의 저주는 더욱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때였다.
[ 일부 조건이 충족되어 마법에 변형이 이루어집니다. ]
[ `저주 - 혼란`이 `저주 - 광란`으로 〈 성장〉 합니다. ]
[ 저주 - 광란(狂亂) ]
: 혼란과 겹쳐진 마이너스의 감정들이 극한으로 합해졌을 때 발생하는 최악(最惡)의 저주 중 하나. 정신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생각을 붕괴시킨다. 피시전자의 상태가 극에 달할 수록 저주의 위력이 강해진다.
"...?"
혼란의 저주를 뿌려대며 계획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던 도중. 내 눈앞을 가득 채운 메시지였다.
저주 마법의 성장이라니. 소환 마법을 제외하고는 다른 마법이 성장한 적이 없었던 터라 소환 마법만 가능한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자기 성장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만..
"저주 - 광란"
기회다.
이미 인륜을 저버리기로 한 이상.
이런 기회가 왔다면 잡아야 한다.
[ 저주 - 광란 ]
사아아아아아-
"크윽.."
광란의 저주를 펼친 순간.
엄청난 마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저주 마법에 드는 마력이 엄청나다지만, 이건 더 심했다. 거의 마력 4분의 1이 날아간 셈. 내가 가진 마법 중에는 가장 많은 마력을 소모시키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크아아아악!!"
"무..무서워.."
"살려줘…. 날 살려줘…."
"으으으..엄마..."
"아저씨..저 살고 싶어요…. 저 좀 구해주세요…."
"신이시여!! 왜 이 어린 양을 버리셨나이까!!"
.
.
.
"..."
순식간에 전장이 혼란을 넘어 광란의 상태로 빠진다.
소리 지르는 사람, 부들부들 떠는 사람, 살려달라며 아우성치는 사람, 신을 찾는 사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 마이너스한 감정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모습이 이 한 자리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크워어어어어!!!"
게다가 아직 전투는 끝난 게 아니다.
악의 무리는 여전히 제힘을 과시하며 날뛰고 있었고, 특히 도마뱀 형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은 산 채로 인간을 뜯어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광란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뛰어난 정신으로 무장했던 기사들마저 광란의 조짐이 슬금슬금 보였다.
"성주님! 피하셔야…."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인가!!!"
"상황이…. 상황이 어렵습니다…."
크랜포트는 어떤 기사의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도망이라니. 도망이라니! 이곳이 어디인가. 내가 누구인가.
요새 도시 칼트는 수천의 대군도 거뜬히 막아낼 철의 요새이며, 자신은 이곳의 주인이다. 그런 내가 도망이라니.
"그딴 개소리를 할 시간에 가서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오는 분노가 포효처럼 터져 나온다.
그 모습에 후퇴하자던 기사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이상 증세를 보이는 병사들이 대다수였고, 온전히 자리를 지키는 건 3분의 1이 못 되었다. 그나마 기사들은 아직까지 잘 싸워주고 있지만…. 패색이 짙었다.
"내가 나서겠다."
"성주님!"
"비켜라."
"그건 아니 됩니다! 성주님께서 다치기라도 하시면."
"내가 다친다고 가정하는 건가? 고작 저따위 미물에게?"
"그...그건 아니지만…."
"어차피 누군가는 저놈을 죽여야 한다."
"하오나.."
크랜포트는 마지막 한 수를 꺼내 들었다.
가능하면 최후의 최후까지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스르릉-
오랜만에 뽑아든 검이 맑은소리를 내며 손에 잡힌다.
"나는 요새 도시 칼트의 주인이자 3계급 기사 크랜포트다. 날 막아 설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나를 따라와라. 저 개 같은 놈들의 배 속을 구경시켜줄 테니."
크랜포트의 한 마디에 기사들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검을 뽑아들고 그의 뒤를 따른다.
그렇다. 칼트 최후의 보루. 그것은 성주 본인이다. 왕국에서 알아주는 기사이며 곧 2계급 기사의 자리를 넘볼 것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의 실력자. 그가 직접 나섰다.
"크워어어어어어!!"
크랜포트는 곧장 병사 하나를 씹어먹고 있던 발룬에게로 향했다.
머리 대 머리의 싸움으로 이 전장을 단번에 결판내려는 생각이었다. 지휘관이 뛰어나면 뛰어날 수록 지휘관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더욱 심해지고 군대의 붕괴 역시 빨라진다.
괜히 병법에 지휘관을 먼저 죽이라 표시되어있는 게 아니었다.
""곱게 죽어라. 미물."
"크워어어어!!"
크랜포트가 검을 세우며 달려들자, 발룬은 먹던 병사를 바닥에 던지고 창을 잡았다.
후우우웅-
쿠웅!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
크랜포트의 실력이 조금 더 우위에 있었으나, 발룬에게는 특유의 신체 능력이 있다 보니 어느 하나 우세한 점 없이 거의 대등한 상태였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몇 번을 붙어도 결판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내가 있다.
"약화. 둔화. 분노"
나는 크랜포트가 나서자마자 지팡이를 움켜쥐고 저주 마법을 발현했다.
뛰어난 기사인지 광란의 저주도 혼란의 저주도 걸리지 않았지만, 아주 잠깐의 틈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안. 준비하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크랜포트가 나서는 순간. 내 옆에 붙어있던 안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아직도 복수의 감정이 커다랗게 남아있었는지, 눈에서 살의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당신의 복수는 이루어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이 길었던 투쟁의 끝이 보인다.
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나는 마지막 마법을 준비했다.
"난장판의 끝이다."
[ 애니메이트 데드 ]
*
"허억..헉.."
"크워어어어!"
지옥이 따로 없었다.
우두머리와의 전투가 한창이던 그 때. 갑자기 죽었던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언데드. 망자들은 악의 무리든 칼트의 병사든 피아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크랜포트나 발룬이나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잠깐의 틈을 보였다가는 당장 죽는 건 자신이 될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데드들은 집요하게 생자를 쫓았고, 물어뜯으려 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즉시 다시 망자가 되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고, 그것은 악의 무리에게도 적용되었다. 크랜포트는 그때야 이 전장에 다른 누군가가 개입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눈을 돌려보았을 때. 제대로 서 있는 건 자신을 비롯한 기사 몇이 전부였으니까. 악의 무리 역시 발룬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병력은 없었다.
완전한 공멸.
그것을 깨달은 순간.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당신이…. 당신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누굴까.
"당신 때문에..우리 마을 사람들이 죽었어…. 그리고 여기 칼트의 병사들도 당신이 죽인 거야…. 당신이…. 당신이 수색대만 보냈어도!! 이 사람들은 살 수 있었다!!!"
"너는.."
그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
"네놈이.."
"닥쳐라!! 네놈이 수색대를 보내기만 했어도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뭐? 산적 무리? 짐승? 이 꼴을 보아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하구나!! 나는 분명 악의 무리가 있음을 당신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쨌어!!"
"닥쳐-"
쿠웅!
크랜포트가 갑자기 나타난 안에게 소리치려는 순간.
발룬의 창이 떨어져 내리는 탓에 말을 잇지 못하고 검을 놀려야 했다.
그사이 안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모든 게 이 자식 때문이오! 내가 일주일 전. 악의 무리가 나타났음을 알렸고 수색대를 파견해달라 요청했소! 그때 당신들도 있었으니 알 것이요! 그런데…. 그런데 저 녀석은 끝내 나를 미치광이라며 내쫓았지…. 지금은 어떠합니까! 내가 아직도 미치광이로 보입니까?! 이 모든 사건은 모두 저 빌어먹을 성주가 만들어냈단 말입니다!!!"
안의 말에 살아남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굳은 표정을 짓는다.
어느새인가 살아 움직이던 언데드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그것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전장의 중앙으로 나와 성주를 가리키며 분노를 토로하고 있는 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들의 눈빛이 조금이지만 흔들리는 게 보인다.
나는 지금이 내가 나설 때라는 걸 느꼈다.
지금이다. 모두의 시선이 안에게 몰려있는 이 순간이 성주와 악의 무리를 처단할 기회였다.
[ 무덤지기 ]
"죽여라.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을."
[ 명령하신 대로 ]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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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은 살작 일찍 한 편 올리고 조금 있다가 한 편 더 올라갈 예정입니다 하하하하하하
p.s 본격 저주 마법 강화 편 이었습니다.
p.s2 괜히 네크가 전장의 깡패가 아니죠..훗.
p.s3 참고로 설문 하나 올렸는데 시간있으시면 추천부터 하시고 설문도 한번씩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