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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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은 본디 아무런 능력이 없다.
물리력도 없고, 공격력도 없다.
그래서 보통의 네크로맨서들은 망령을 정보수집 혹은 정찰 및 추적의 용도로 쓰인다. 시전자의 의지가 없다면 거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망령을 발견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망령이 보고 듣는 것들을 시전자가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네크로맨서의 고유 능력 중 하나다.
단. 소환된 망령이 파괴될 경우 망령이 가진 정보 역시 사라지며, 생각보다 망령은 파괴되기 쉬운 존재이기도 하다.
-네크로맨서의 〈 망령 마법 활용법 〉 중….
망령이 돌아왔다.
"흐음.."
나는 망령이 돌아오자마자 가진 기억을 읽었다.
망령의 기억을 읽은 건 간단하다. 망령의 머리 부분에 손을 대고 마력을 이어주기만 하면 망령이 보고 들었던 것들이 마치 영상처럼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온다.
`저건가…?`
악의 근원으로 1차 원정을 떠났던 언데드들의 모습이 보인다.
일부러 한 마리는 뒤쪽에서 전체를 찍게 하고, 한 마리는 앞에서 정찰하도록 했기에 꽤나 양질의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
전방에 나가 정찰용으로 쓰였던 망령이 악의 근원으로 유추되는 것을 확인하고 추적을 했는데, 의외로 망령이 찾은 것은 자그마한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마치 사람 같은 형태라고 해야겠다.
미묘하게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얼굴이나 몸이나 사람과 거의 비슷한데…. 유난히 피부가 검고 귀가 뾰족하다. 더불어 아랫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송곳니까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은 다른 모습.
뭐랄까. 게임 속에서 보던 다크 엘프같기도 하고, 송곳니만 보면 뱀파이어 같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저게 다 마력인 건가..`
사실 외형이야 상관없다.
어차피 괴수나 그에 따르는 생물일 테니까. 다만 걱정되는 건 녀석의 몸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검은 기류였다. 마치 안개처럼 녀석을 휘감으며 회전하고 있었는데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망령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고, 내 수준도 딱히 높은 건 아니라서 저것의 정확한 이름이나 효능을 알 수는 없지만, 마력의 한 줄기 같았다.
녀석은 검은 기류를 이용해 계속해서 술식을 그리고 있었데, 술식이 그려질 때마다 커다란 원이 생기며 그 안에서 적게는 서너마리에서 많게는 열 마리까지의 괴수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일종의 소환 마법 같은 현상.
나는 저것으로 놈이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망령 역시 그랬기에 이놈을 계속해서 따라다닌 것 같았고 나중에 가서는 녀석이 망령의 존재를 알아차렸으나 타이밍좋게 뛰어든 언데드들 덕분에 망령은 살아서 귀환할 수 있었다.
"흠. 설마 저렇게 무한정 괴수를 뽑아내는 게 놈의 능력인가."
아쉬운 게 있다면 녀석의 전투 스타일은 보지 못했다는 것.
이미 소환되어있던 괴수들이 언데드들과 싸우는 동안 놈은 계속해서 소환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터라, 놈을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그래도 이 만큼이나 알아온 것 자체가 행운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럼…. 역시 다음 디펜스가 끝나자마자 뛰어들어가야 하는 건가."
악의 근원의 실체를 확인하고 나니 어느 정도 부담은 가셨다.
그래서인지 여러 가지 전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가장 좋은 방법은 녀석이 괴수를 소환하고 디펜스가 시작되는 동안 녀석을 공격하는 것. 한번에 수백 마리의 괴수를 모아서 돌격 명령을 내리고, 다시 소환하기를 반복하는 타입 같으니 괴수들이 막 공격에 나섰을 때가 가장 좋은 타이밍일 것이다.
소환 속도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닌 것 같으니까 시간 내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녀석을 처리할 수 있다. 다만 그 전에 달려들 괴수를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
두 번째 전략은 디펜스가 끝나자마자 공격을 시작하는 것. 디펜스 게임에서 오펜스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사용 가능한 전략이다. 물론 공격은 언데드로만 해야겠지.
세 번째는 언데드를 보낸 뒤, 숨어 있게 했다가 디펜스가 시작되고 돌격을 명령하는 것.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전력 같다.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인데….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이번에 해야 한다. 더 이상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훨씬 좋은 전략이나 계획을 짜고 움직였을 텐데.
앞으로 이어질 디펜스를 생각하면 당장 실행에 옮겨야 한다.
"흠.. 그래. 세 번째로 가자."
잠깐 고민을 하던 나는 플랜 C를 활용하기로 했다.
급히 언데드를 소환하고 마력을 채워 다시 소환하고. 우연인지 앞서서 망령을 구출하기 위해 언데드들이 공격한 덕분에 다음 디펜스까지 텀이 생긴 것 같았다.
그 틈을 이용해 최대한 언데드를 뽑아낸 나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지휘 아래 들판 옆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 파티 디펜스 - 악의 근원 (3) 〉
: 악의 근원에서 흘러나온 지독한 마력(魔力)이 괴수들의 정신을 조종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앞으로 다가올 괴수들을 상대로 막아내고 인장을 보호하라!
[ 남은 시간 : 5분 ]
( 0/555 )
"정말 미쳐가는구나."
딱 언데드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순간.
새로운 퀘스트가 떴다.
방어 숫자는 무려 555마리. 한 단계가 올라갈 때마다 111마리씩 추가되는 어처구니없는 양.
아마 이번 디펜스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막아내는 것도, 버티는 것도.
이번 디펜스를 막아낸다고 해도 다음 디펜스는 어려울 거다. 쌓인 피로가 장난이 아닌 데다가 이번 디펜스에서 사상자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 공백의 간격이 굉장히 크게 벌어질 테니까.
그러니 마지막이다.
다행이라면 언데드는 이미 전부 소환했고, 들판을 벗어나 숨을 공간을 찾고 있다는 것.
제때에 숨기만 한다면, 그래서 괴수들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승산 있다. 나도 직접 가면 더 좋겠지만…. 내가 빠지면 이쪽 수성도 어려워질 테니 이곳에 남아야 한다. 물론 이번에 악의 근원을 처치하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나도 움직여야겠지.
나뿐 아니라 최철희나 김우석 같은 사람들도 전부 끌고 가야 할 판이다.
어차피 다음 디펜스란 없을 테니까.
"자자! 어서 움직입시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겁니다!!"
"힘내자고요!!"
.
.
.
멀리서 김우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최대한 사람들을 독려하며 디펜스를 막아낼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래도 다들 실력이 좋아서 그런지 아직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김우석과 함께하는 정다빈이라는 여자의 능력이 대단하다.
더불어 최철희의 마법 덕분에 성문에는 아직까지 흠집 하나 없다.
성문만 막을 수 있다면 수성은 훨씬 편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근접 계열도 수성전에서 사용할 화로(火爐)나 던질만한 것들을 준비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도움은 되리라.
`제발..`
사실 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떠나간 언데드 부대다.
녀석들이 악의 근원만 처리해준다면 이 전쟁은 끝이니까.
"따라갈 걸 그랬나…. 내가 보지 못하니까 더 걱정되네."
저 멀리 한창 숨고 있을 언데드들을 생각하며 소모된 마력을 다시 회복시킨다.
이번에는 타이밍이 별로 좋지 못해서 마력을 제대로 채우기도 전에 디펜스가 시작될 것 같으니 중간중간에 명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3차 디펜스가 시작되었다.
*
[ 명령이 떨어졌다. ]
[ 출발하지. ]
.....
위스퍼의 말에 부대를 지휘하던 스켈레톤 나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킨다.
지성이 생긴 덕분에 원격 명령이 가능해진 이점을 살린 동시 진행.
망령은 안 되고, 위스퍼를 통한 통신이라고 보면 된다.
스켈레톤 나이트가 짧게 말하자 부대가 전부 몸을 일으키곤 망령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령을 따라 얼마나 이동했을까. 멀리서 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철컥-
[ 돌입 준비 ]
얘기하는 건 스켈레톤 나이트 하나뿐.
대답은 없다.
그러나 그의 지휘 아래 모두가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거나 혹은 몸속에 잠들어있던 독(毒)을 끌어낸다. 모두 준비가 끝나자 스켈레톤 나이트가 검을 치켜세우며 작게 외쳤다.
[ 돌격 ]
뼈로 된 기사가 명령을 내리자 모두가 앞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크아아아아!!"
"크워어어어!"
갑자기 언데드들이 등장하자 막 소환되던 괴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이빨을 들이밀지만, 죽되 산 자들은 아무런 내색 없이 검과 창을 휘둘렀다.
서걱-
콰직!
일격에 괴수의 머리가 날아가고, 일격에 괴수의 심장이 꿰뚫린다.
대형 도끼가 움직일 때면 괴수의 몸통이 아작나는 건 순식간이다.
구울의 독은 살아있는 생명을 부패하게 하고, 위스퍼들의 저주는 살아있는 자들에게 혼란과 공포를 가져다준다.
"크아아아아!!"
한참 소환을 이어가던 악의 근원은 다가오는 언데드를 보며 흥분했는지 괴성을 질렀다.
방금 막 괴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터라 그의 주변에는 고작해야 서른 마리 정도의 괴수가 전부였다.
"크아아악!!"
다급하게 남은 괴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고 소환을 이어가지만, 여전히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서른 마리는 금세 스무 마리가 되고, 스무 마리는 다시 열 마리가 되고. 그나마 소환 마법으로 줄어든 숫자를 채워보지만 그만큼 언데드와의 거리는 줄어있었다.
결국, 악의 근원은 소환을 중지하고 몸을 돌렸다.
악의 근원에는 오직 소환하는 능력이 전무했기에 싸움은 무리다.
그저 도망치는 것만이 악의 근원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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