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편
<-- 돌격대 -->
〈 파티 디펜스 - 악의 근원 (2) 〉
: 악의 근원에서 흘러나온 지독한 마력(魔力)이 괴수들의 정신을 조종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앞으로 다가올 괴수들을 상대로 막아내고 인장을 보호하라!
[ 남은 시간 : 5분 ]
( 444/444 )
-완료!
"후우..."
드디어 끝났다.
성벽 앞에 늘어져 있는 4백 마리의 괴수들. 흥건한 피가 수증기가 되어 올라올 정도로 엄청난 숫자. 그나마 다행이라면 파티 디펜스의 특성인지 괴수의 시체가 10여 분 정도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
시체 썩는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행이지만, 사실 이런 부분에 있어 다행이라고 느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아..하..진짜 뒤질 것 같네.."
"제기랄..이걸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그래도 근접 계열은 좀 살 만하지 않나요? 저는 정다빈씨가 아니었으면 아마 벌써 쓰러졌을 거에요.."
"진짜. 나 이제 화살도 없어서 새로 사야 할 것 같은데…."
.
.
.
김우석과 그 무리는 이미 성벽에 뻗어서 강제 휴식 중이었고, 무리에 합류하지 않은 나 같은 이들 역시 벽에 몸을 기대며 쉬어야만 했다. 도저히 쉬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거 가능하긴 한 건가…?"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4백.
처음에는 3백 마리였고, 이번에는 4백 마리. 그렇다면 다음에는? 5백? 6백?
도대체 언제까지 숫자가 늘어나려고 하는 걸까. 만약 몇 번만 더 늘어나도…. 전멸이다. 전멸(全滅).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 싸우는 건 절대적인 손해였다.
"흐음.."
생각해야만 한다.
이 미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는 방법을….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저 들판 너머로 향했다.
"..안 되겠지?"
그냥 아주 잠깐 생각해봤다.
악의 근원이란 게 괴수들을 미치게 한다고 하니, 그걸 직접 부술 수는 없을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가능할 것 같은 방법은 아니다. 만약 부수러 가다가 수백 마리의 괴수와 만난다면..
그냥 개죽음이 되는 거다.
"하지만.."
그러나 자꾸 시선이 가는건 왤까.
분명 가다가 디펜스가 시작되면 개죽음이 될 거라는 걸 아는데,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고개가 들판 너머로 향하는 건 왜일까.
그때였다.
"저기. 혹시 잠깐 대화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의 그 마법사였다. 성문 앞을 거대한 돌벽으로 가로막았던.
"최철희라고 합니다."
"이윤입니다."
아까 눈인사를 나누기도 한 터라 딱히 어색한 부분은 없었고, 그래서인지 최철희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이는 내가 더 어린 것 같지만, 전장이다 보니 존칭으로 대해준다.
"이번 디펜스. 이대로 가다간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대로 진행한다면 앞으로 두 번. 많아야 세 번안에.."
"전멸이겠죠."
"그렇습니다."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 최철희.
이 남자는 뭔가 방법이 있는 걸까?
그러나 이어진 말에 나는 얼굴을 구겨야 했다.
"계속 생각해봤지만, 이 방법은 하나입니다."
"...돌격입니까?"
"그렇습니다."
결국, 이 소리였나.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온다. 정말로 돌격이 아니면 방법이 없는 걸까?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진 않을..
"다음 디펜스가 끝난 후. 곧장 돌격대를 꾸려 출발. 악의 근원을 부순다. 이것입니다."
내 상념을 깨고 최철희가 담담한 어투로 말을 한다.
"누가 가야 할까요."
"..."
그러나 이어진 내 말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돌격. 방법은 하나뿐일지 모른다. 돌격해서 악의 근원을 부순다면 이 디펜스가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가 갈까? 누가 그 위험한 일의 책임을 짊어지려고 할까.
나? 아니면 최철희? 김우석? 누가. 누가 가야 하는가.
최철희나 나나 방법은 생각했어도 움직이지 않는 이유. 이것 때문이다.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과연 누가 갈까. 최철희도 그것을 알기에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다.
흔히 이런 말을 쓴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
말이야 좋지.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소(小)가 되어야 한다면 그 누가 웃을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내 시선이 성 아래로 향했다.
`..저놈들처럼 재생할 수 있다면 모를까.`
내 시선 끝에는 멍하니 서 있는 언데드들이 있었다.
스켈레톤 나이트부터 일반 망령까지. 다양하게 소환되어 있는 녀석들. 마력을 채우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죽은 녀석들의 빈자리를 채워 넣는 것이라 조금전에 막 소환한 녀석들도 있고, 전투 내내 싸우면서 피 칠갑을 한 녀석들도 있었다.
머리만 살아있다면 계속해서 부활급의 재생이 가능한 녀석들이라 팔, 다리가 사라졌던 놈들도 어느새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녀석들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 하지 않을까.
물론 죽을 가능성이 있으니 여전히 위험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나보다는 더 낫지 않을..
"어?"
잠깐만.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잠시 멈칫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나 때문에 최철희가 놀라서 고개를 든다. 그의 표정에는 갑자기 왜 그러냐는 눈빛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완전히 뒤로 한 채 성벽 끝으로 다가갔다.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한 자세를 취하면서까지 무언가를 바라본다. 내 시선 끝에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언데드들이 있었다.
`굳이 내가 갈 필요가 있나?`
그래.
생각해보니 잊고 있었다.
나에게는 아주 유능한 병사들이 있지 않은가? 죽어도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공포와 두려움을 잊어버린 아주 유능한 병사들이 말이다.
저런 위대한 병사들을 두고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당장 움직인다…!;
생각이 끝나자마자 곧장 무덤지기의 공간을 열어 최대한으로 소환을 시작했다. 미리 나와 있던 녀석들과 합해서 거진 80여 구에 달하는 대병력을. 내가 갑자기 성벽 위에 서서 언데드들을 소환하기 시작하자 한참 휴식 중이던 이들이 무슨 일이냐며 내 쪽을 바라봤으나, 나는 여전히 소환에만 집중했다.
언데드 소환에 들어가는 마력이 장난 아니게 많아서 소환하자마자 즉시 명령을 내리고 명상을 시작해야 했다.
"가서 부숴. 걸리는 건 전부다. 특히 마력이 가장 진하고 어두운 놈을 중점으로 족쳐."
내 명령에 스켈레톤 나이트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이전의 일반 언데드였다면 불가능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놈들은 여전히 지성이 없으니까. 그러나 진화한 개체는 조금이나마 지성이 생겼고, 그것으로 어렵거나 복잡한 명령에도 어느 정도 반응을 해준다.
"이윤씨 갑자기 왜..?"
최철희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나한테 다가와 말을 걸었으나,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해줄 시간이 없었다.
다음 디펜스를 위해 명상을 시작해야만 했으니까. 시간이 없다. 게다가 다음 디펜스부터는 언데드 병력 없이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탓에 더 집중해야만 했다. 물론 녀석들이 잘해준다면 다음 디펜스가 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만일의 상황은 항상 대비해야 하니까.
최철희는 그런 나를 지켜보다가 결국 내 옆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건 그로부터 30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명상 +1의 도움으로 이 정도면 마력이 전부 회복된다.
"후우.."
내가 눈을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최철희가 입을 연다.
"아까는 왜..?"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해 보였다. 하기사 괴수와의 전투에서 가장 앞서 싸우던 죽음의 병사들이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버리니 의아했을 것이다. 헌데 당장 다음 디펜스가 시작될지도 모르는데, 그들이 없으면 전투가 상당히 어려워질 테니까.
그러나 내 표정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돌격입니다."
"예?"
나는 짧게 얘기했고, 최철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한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설마..?"
나는 따로 대답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내가 할 말을 이해한 듯 황당하면서도 대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살짝 웃은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은 건 다음 디펜스 입니다."
"아…. 그렇군요."
돌격대는 꾸려졌다.
남은 건 다음 공격을 버티는 것. 사실 돌격대가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내가 가지 않아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도 어렵기에 적어도 다음 디펜스까지는 버텨내야 할 것이다.
다음 디펜스 이후. 돌아온 위스퍼와 망령들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뒤,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우고 돌격한다면.
`가능하다..!`
그래.
버티면 된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오늘은 조금 늦게 올라왔습니다.
조금 후에 한 편 더 쓰면 두 편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