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 귀환 -->
망했다.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한 마디였다.
"대체 왜?"
블랙 포인트(Black Point)가 영원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적어도 튜토리얼 동안은 계속해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훌륭히 잘해냈으니 숲에서 뛰어오는 보스를 상대하라고?
차라리 지금처럼 블랙 포인트 위로 떨어졌다면 더 상대하기 편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성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고민에 빠졌다.
아니 정확히는 성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떻게 나간단 말인가. 함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싸움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그나마 성벽이라도 써야 어찌어찌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젠자앙!"
머리가 아프다.
어떻게 하지?
남은 시간이 이제 고작 1분이다. 늘 그렇듯 필요할 때는 무진장 빠르게 흐른다. 마치 퇴근 후 주말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사실 내가 이렇게 당황한 건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기 때문이었다.
성문의 보호도 함정의 도움도 없이 괴수와 그것도 괴수왕이라고 하는 보스와 일 대 일로 싸워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큰 공포로 다가왔다. 생각해봐라. 1m짜리 괴물 쥐가 첫 튜토리얼 퀘스트로 등장한다.
그럼 보스는 어떻겠는가? 최소한 2~3m는 할 것인데…. 그런 놈을 대체 어떻게 상대해.
"미친…. 이래서 신체 강화 알약이랑 치료제를 준 거였네. 그럼 그렇지."
장비부터 신체 강화 알약까지.
전부 지금을 위한 대기였다. 치료제도 중간에 상처를 입으면 쓰라는 게 아니라, 보스를 상대할 때 죽을 위험이 뻔하니 그때 맞춰 잘 사용해서 보스를 이겨보라는 그런 의미였다.
아주 그냥 뒤질 것 같다.
"개 같은 새끼.."
[남은 시간 : 0초 ]
내가 욕을 하고 있건, 짜증을 내고 있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시작을 알린다.
"일단..일단...으음…. 불이라도 전부 던져놓자."
이대로 앉아서 뒤질 생각은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걸 한다.
모닥불을 이리저리 옮겨서 성안을 가득 채워놓고, 이번에는 성벽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성벽을 등지고 섰다.
`기습.`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다.
정면 승부를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니 괜히 미친놈처럼 성벽 위에 올라가 내 위치를 알려줄 필요가 없다. 몸을 숨기고 있다가 놈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창으로 찔러대는 게 최선.
그것을 위해 일부러 성문에서부터 불길을 만들었다.
놈이 성으로 들어온다면 기습을 당할 수밖에 없도록 불길을 내서 자리를 비워두었다. 저 길을 따라 들어온다면 최소한 어디 하나는 구멍이 뚫리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창을 굳게 쥐고 서 있을 때였다.
〈 튜토리얼 End. 막아라 & 생존하라 〉
: 훌륭하게 튜토리얼을 마친 당신. 마지막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자! 지금 거점을 빼앗기 위해 숲에서부터 달려오고 있는 괴수왕을 처리하자!
[ 남은 시간 : 0분 ]
( 1/1 )
-완료!
"응?"
긴장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내 얼굴에 의문이 깃든다.
(Hidden)모든 괴수를 섬멸하라
-완료!
(Hidden)숲 안에 숨은 괴수들을 섬멸하라
-완료!
(Hidden)숲 안에 숨은 괴목을 섬멸하라
-완료!
(Hidden)아무런 상처 없이 튜토리얼을 클리어하라
-완료!
"...?"
멍청하게 서 있는 내 앞에 주르륵 메시지가 올라온다.
뭐지?
혹시 뭘 잘못 보고 있나 싶어 눈을 비벼보지만, 여전히 메시지는 위로 올라오고 있었고, 그 아래로 `완료`라는 단어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무리 짓든 하나의 메시지가 더 올라온다.
[ 튜토리얼 End. 막아라 & 생존하라 }
[ 모든 튜토리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
[ 당신의 활약을 계산 중입니다. ]
[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
"끝…. 났다고?"
뭐 이리 허무할 수가..
나는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보스를 상대해야 한다고 그렇게 쫄아있었는데, 보스는 어디 가고 튜토리얼은 끝이 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어깨를 으쓱이려 했다.
"응?"
그 순간이었다.
순간 엄청난 열기가 느껴진 것은.
"뭐지?"
처음에는 그저 눈 앞에 펼쳐진 모닥불의 바다 때문인 줄 알았다. 듬성듬성하긴 해도 성안을 거의 가득 채우다시피 한 모닥불 때문에 느껴지는 열기라 생각했고 그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생각외로 느껴지는 열기가 어마어마했다. 단순히 모닥불을 피운 것 정도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
게다가 열기는 앞이 아닌 `뒤`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뒤?"
대체 왜 뒤에서 열 기가 나는 거지?
나는 성 밖에 불을 피워놓은 적이 없다. 그러기엔 시간도 없었고.
그런데 왜..
"아! 설마…?"
순간 뭔가 머릿속에 번뜩였고, 나는 곧장 성벽 위로 올라갔다.
뒤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이유. 성벽 위에 올라와 보니 이제야 이해가 갔다.
"숲이.."
숲이.
불타고 있었다.
*
시작은 이랬다.
내가 원숭이들이 타죽는 걸 성안에서 확인하고 성벽에서 내려와 강화 알약을 선택하고 흡수하는 사이. 블랙 포인트 주변은 여전히 불로 가득했다. 괴수가 몇이나 등장할지 몰랐던 터라 목창 함정과 함께 화로(火爐)의 설치도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그 위로 떨어진 원숭이들이 고통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불의 범위는 더욱 넓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튜토리얼을 완료했다는 것만 생각했지, 불이 어떻게 됐구나 하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그렇게 커져 버린 불이 조금씩 숲으로 향했고, 마침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원숭이 중 몇 마리가 숲으로 구르면서 그대로 불이 번진 것이다. 뭐 그때에도 나는 여전히 관심도 주지 않았고, 끝내 숲은 그렇게 불에 휩싸여버렸다.
"...미친."
그래서였다.
숲 안으로 도망쳤던 괴수부터, 그 안에 터전이 있던 괴수와 괴목이 완전히 불에 타버렸고.
심지어 이제 막 출현했던 보스 역시 그대로 불에 휩싸여 타 죽었다.
.....
정말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그만큼 산불은 재앙에 준하는 파괴력을 지녔다.
그래서 깔끔하게 정리하자면. 내 부주의로 숲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어쨌든 난 튜토리얼을 클리어 했지."
더불어 4개의 히든 퀘스트까지 해결했다.
히든 퀘스트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마 도마뱀이나 멧돼지들까지 모두 사냥했다면 `모든 괴수를 섬멸하라.` 정도는 클리어할 수 있겠지만, 그 이외에 숲에 존재하는 괴수와 괴목의 모든 섬멸에 대해서는 절대 알지 못했으리라.
아마 다른 누가 와도 상황은 똑같았을 것이다.
어느 미친놈이 숲에 들어갈 생각을 했을까. 숲 근처에서 장작을 구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튜토리얼 기간에 숲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는 건 그저 자살행위니까.
뭐 요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회귀`라고 하면 모를까. 그딴 게 있을 리 만무하니 아마 이 히든 퀘스트를 깬 사람은 없었으리라.
"킥."
그래서 그런 걸까.
절로 웃음이 튀어나온다.
솔직히 히든 퀘스트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서 튜토리얼을 끝냈다는 게 정말로 행복했다.
"그럼….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돌아가고 싶다.
미치도록 집에 가고 싶다.
가족들도 보고 싶고…. 아니 그냥 다 모르겠고 자취방 이불 안에 들어가서 발 뻗고 편히 자고 싶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불안에 벌벌 떨면서 밤을 지새우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원하는 건 편안한 잠자리. 이것 하나뿐이다.
또 하나 있다면, 다신 이딴 곳에 오고 싶지 않다는 것.
"제발.."
그래서일까.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라는 문구에서 눈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나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 정산이 끝났습니다. ]
[ 귀환을 시작합니다. ]
[ 남은 시간 : 10초 ]
[ 튜토리얼 정산 보상은 귀환 후 이루어집니다. ]
"예쓰!`
지극 정성이면 하늘도 이루어준다더니.
귀환이다.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으아아아아아!!!"
거창한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여전히 숲은 불에 타들어 가고 있어 엄청난 화재로 이어졌지만 그런 건 아무짝에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이딴 곳이 현실일리도 없었다.
현대, 현실이라면 모를까.
이딴 세계. 땅이 무너지든 산에 불이 붙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저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한다.
[ 남은 시간 : 0초 ]
[ 귀환합니다. ]
번쩍-
마지막 모래가 떨어지는 순간.
들어올 때처럼 환한 빛이 나를 감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사흘 전. 도로 위였다.
"아아.."
느껴진다.
현대의 탁하고 메케한 미세먼지가. 콧속이 턱턱 막히는 미세먼지의 기운과 진한 향수 냄새. 시끄러운 도로와 이리저리 숨 가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익숙하고도 낯선 이 감각이 느껴졌다.
"가자!"
혹시라도 다시 끌려갈까 무서워 급히 자취방으로 달렸다.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으며 달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아무렴 어떤가. 살아 돌아온 것이 중요하지.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싶었을 즈음 익숙한 자취방이 보였다.
이윽고.
자취방 문고리가 내 손에 잡힌다.
철컥-
힘차게 돌아가는 문고리.
그리고 보이는.
"안녕하십니까. 이윤씨."
"...?"
"저는 `특수실종사건전담수사팀`. 줄여서 특전팀 팀장 한건우라고 합니다."
"....?"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정말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