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마지막 회)
43장. 최종
치열한 전투 끝에 델로우가 지휘하는 성전군은 맹약 기사단의 진형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했다.
전열의 붕괴에 이어서 다수의 중간 지휘관들이 전사하자 맹약 기사단의 전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유의미한 성과였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마왕을 따르는 맹약 기사단과의 전투로 인해 성전군에서도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맹약 기사단은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고 패주 직전이었지만, 성전군의 피해도 결코 가볍게 생각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마왕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적에게 등을 보이지 마라!”
총단장이 날카로운 고함을 내지르며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직속 친위대의 맹약 기사들에게 전진을 명령했다. 총단장의 직속 친위대가 델로우의 성전군을 저지하기 위해 매서운 기세로 진격했다.
계속된 전투로 직속 친위대에 속한 맹약 기사들의 숫자는 이제 30여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 맹약 기사단에서도 우수한 전투력을 가진 최정예들이었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전력이었다.
델로우 또한 강력한 적들이 접근 중이라는 걸 깨닫고서 성전군의 성기사들과 전투 사제들에게 전투 태세를 정비할 것을 지시했다. 이제 성전군의 남은 군사들도 고작해야 수백 명에 불과했다. 성전군이 델로우의 지시에 따라 전투 태세를 정비하는 동안, 전열을 이탈하는 한 무리의 인원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유진과 동료들이었다.
“성기사단! 유진 경을 지원하라!”
마왕을 찌르게 될 가장 날카로운 창이라고 할 수 있는 유진이 선봉에 서자 델로우가 성기사들에게 공세를 펼칠 것을 지시했다. 성기사들이 우렁찬 함성과 함께 전진하자 유진도 마나를 소모하여 스킬을 사용했다.
[액티브 스킬, ‘신성 징벌’을 사용합니다.]
[스킬이 해제될 때까지 신성력의 징벌 속성이 강화됩니다.]
[빛 속성 정령 친화력 수치에 의해 추가 강화 효과가 부여됩니다.]
[현재 빛 속성 정령 친화력 수치가 250포인트 이상입니다. 징벌 신성력의 공격력이 25% 증가합니다.]
우선은 마나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비활성화 상태로 전환되었던 신성 징벌 스킬을 다시 발동했다. 빛 속성의 정령 친화력 수치에 의해 추가 강화 효과가 부여된다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쉬지 않고 곧바로 이어서 다음 스킬을 발동했다.
[액티브 스킬, ‘성스러운 징벌’을 사용합니다.]
[빛 속성 정령 친화력 수치에 의해 추가 강화 효과가 부여됩니다.]
[현재 빛 속성 정령 친화력 수치가 250포인트 이상입니다. 징벌 신성력의 공격력이 25% 증가합니다.]
[전방에 징벌 속성의 신성력을 투사합니다.]
바로 전에 사용한 스킬로 인해 징벌 속성의 신성력이 강화된 상태로 성스러운 징벌이라는 스킬을 사용하여 전방의 맹약 기사들을 향해 대량의 징벌 속성 신성력을 날려 보냈다.
자연스러운 스킬의 연계 공격이다. 방심한 맹약 기사들의 머리 위로 신성력의 징벌이 쏟아졌다. 맹약 기사들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무력하게 쓰러졌다. 하지만 전부가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총단장 직속 친위대다. 맹약 기사단 내에서도 정예로 유명한 노련한 전투원들이다.
거대한 폭풍처럼 모든 사악한 존재를 집어삼킬 기세로 휘몰아치는 징벌 신성의 폭풍을 뚫고 나온 10여 명의 맹약 기사들이 유진을 노리고 창칼을 찌르고 휘둘렀다.
“큭!”
맹공이다. 방어와 회피를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총단장 직속 친위대의 맹약 기사들은 고도의 합동 전투 훈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실전 경험도 풍부한 최정예들이었다. 그들은 정교한 협공을 전개하며 다방면에서 유진을 압박했다.
결국 맹약 기사들의 창칼에 유진의 갑옷이 찢기고 피부가 갈라지면서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크윽!”
극심한 통증이 오른쪽 어깨와 복부 그리고 왼쪽 허벅지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체내에 치명적인 맹독이 침투하였습니다.]
[패시브 스킬, ‘만독불침’이 활성화됩니다.]
무기에 맹독을 바른 모양이다. 하지만 유진은 모든 독을 무효화하는 A랭크의 패시브 스킬, 만독불침을 보유했기 때문에 극도로 치명적인 맹독이 몸 안으로 침투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할 수 있었다.
“도, 독이 통하지 않습니다!”
경악하는 맹약 기사의 목에 유진의 성검이 쇄도했다. 핏줄기가 솟구친다. 그가 성검을 휘두를 때마다 맹약 기사들의 몸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유진의 맹활약에 성전군의 성기사들도 큰 용기를 얻었다. 그들이 합류하자 얼마 남지 않은 총단장 직속 친위대마저 전멸했다.
“이, 이럴 수가!”
당황하는 총단장의 옆에 마왕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성전군의 성기사들을 향해 말없이 왼손을 뻗었다.
“위, 위험…….”
유진이 위험을 경고하려는 찰나, 마왕의 암흑 마나가 성기사들의 진형을 강타했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성기사들의 피로 범벅된 흙먼지가 높이 솟구쳤다.
“크, 크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제들이 뒤늦게 성스러운 보호막을 만들었고 성기사들은 뒤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마왕은 그들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지며 암흑 마나의 폭격을 가했다.
쾅! 쾅! 쾅! 쾅!
연쇄적인 폭발에 사제들의 성스러운 보호막이 처참하게 박살 나고 성기사들의 육신이 비참하게 터져 나갔다. 성전군의 성기사들은 백색 교단의 전투원들 중에서도 정예로 이름 높은 이들이었지만, 마왕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
“바이올라! 엄호해 줘!”
“오케이!”
성기사들의 무력한 죽음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진은 바이올라에게 엄호를 부탁하고서 마왕을 향해 몸을 던졌다.
“유진 경! 나도 함께하겠습니다!”
델로우도 합류했다. 바이올라가 화염계 공격 마법을 완성했다. 하늘에서 불의 비가 쏟아졌지만, 마왕에게는 닿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은 뭔가가 불의 기운을 없애는 것 같았다.
“죽어라!”
유진이 고함을 지르며 스킬을 사용했다.
[액티브 스킬, ‘단공참’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숙련도가 충분합니다.]
[승격 보정으로 스킬의 위력이 5% 증가합니다.]
[숙련도가 충분하여 출력의 조절이 가능합니다.]
[출력 조절 완료. 최대 전력의 20%입니다.]
마나를 아낌없이 소모하여 단공참 스킬을 사용했다. 단공참은 유진이 보유한 단일 대상 공격 스킬 중에 가장 강력했지만, 마왕의 묵직한 대검 앞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고작 이 정도냐?”
마왕의 비웃음에 유진은 악을 쓰며 성검을 마구 휘둘렀다. 마나가 신성력으로 변환되어 마왕을 노렸다.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델로우가 후방에서 마왕의 등을 노리고 대검을 찔렀지만, 소용없었다. 마왕은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고 델로우의 대검을 회피할 뿐 아니라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컥?”
델로우가 짧은 비명과 함께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백색 교단의 우수한 성기사를 단숨에 제압한 마왕은 발악하듯 성검을 휘두르는 유진을 향해 암흑 마나의 폭격을 퍼부었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광범위한 공격이다. 유진은 회피를 포기하고 이번 전투에서 아껴 놓았던 마도구의 방어 기능을 사용했다.
[아티팩트, ‘보호의 약속’을 사용합니다.]
실드가 전개되었지만, 마왕의 암흑 마나 폭격을 완전히 막아 내지 못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암흑 마나 세례에 지면이 터져 나가고 흙먼지가 솟구친다. 그를 보호하는 실드가 파괴되는 걸 본 바이올라의 날카로운 비명이 전장에 울려 퍼졌고 드레인은 자신의 주군을 구하기 위해 엘란과 함께 달려가려 했지만, 총단장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마왕님께서 즐기고 계신다. 방해하지 말 거라.”
마왕의 무력에 가려졌지만, 총단장은 S랭크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다. 드레인과 엘란, 둘이서 상대하기에는 벅찬 적이다. 총단장이 시간을 끄는 동안 마왕은 유진을 향한 암흑 마나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순수한 물리력의 암흑 마탄이 자신의 몸을 두들기고 전신의 뼈가 박살 나는 걸 느끼면 유진은 마침내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 듯 무력하게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정신이 들어요?”
맑은 목소리에 유진은 의식을 되찾았다. 검게 물들었던 시야가 회복되고 순백의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신님이군요.”
유진은 눈앞의 신성한 존재를 알아보았다. 초면이 아니었고 여신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것임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가 죽었나요?”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마지막 기억이 마왕의 마탄 세례에 걸레짝이 될 정도로 얻어맞던 상태였으니 유진은 당연히 자신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의식을 잃은 건 맞아요.”
“곧 죽겠네요.”
“이 공간에서 나가면 시간이 다시 흐를 테고 그러면 당신은 마왕에게 살해당할 겁니다.”
“유언장을 작성하는 시간은 아닌 것 같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손에 쥐고 계신 것 같네요.”
“유진 경의 말대로에요.”
여신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마신의 힘이 저를 갉아 먹고 있어서 저는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 최후의 힘이 남아 있어요. 이 힘을 유진 경한테 축복으로 선사하면 마왕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 마왕은 마신의 가호를 받았지만, 맹약 기사단의 섣부른 소환과 제물의 부족으로 인해서 온전한 힘을 회복하지 못했거든요.”
이어서 여신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말씀해 보시죠. 경청하겠습니다.”
“이 최후의 힘은, 유진 경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남겨 둔 신성력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소모하면 유진 경은 마왕을 죽이더라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가능성이 커요.”
안타까운 일이다.
“제 동의가 필요하신 거군요.”
“그렇죠.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고 축복이나 내려 주세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거에요. 정말 괜찮겠어요?”
여신의 물음에 유진은 희미한 웃음을 흘린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여기서 계속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유진의 대답이다. 여신은 슬픈 표정으로 유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고귀한 용사님, 당신에게 제 마지막 신성력을 보냅니다. 부디, 악을 멸하소서.”
* * *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유진은 두 눈을 떴다. 신성력의 폭발이 마왕의 암흑 마나를 몰아냈고 마치 여신이 지상에 강림한 것 같은 성스러운 기운이 암흑으로 물든 전장에 퍼졌다.
결계가 부서지고 검붉은 하늘이 본래의 색을 되찾는다. 살면서 본 적 없던 아주 강력한 신성력의 향연에 백색 교단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여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지금 이곳에 용사가 있다. 그리고 용사의 성검이 사악한 것들의 왕을 꿰뚫었다. 마왕은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여신이 남긴 최후의 신성력은 용사, 유진의 성검을 통해 모든 악을 멸하는 뾰족한 창이 되어 마왕을 징벌했다.
“네, 네 놈이 감히!”
단 일격에 마왕의 왼쪽 육신 절반이 날아갔다. 신성력의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사악한 육신이 녹아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고 유진을 노려보며 암흑 마나를 발사했다.
“소용없어.”
칠흑의 암흑 마나는 유진의 앞에서 소멸했다.
“잘 가라, 마왕.”
“아, 안 돼.”
성검의 폭풍이 마왕의 남은 육신을 녹였다. 마왕의 죽음을 목도한 총단장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조용히 자신의 목에 단검을 밀어 넣었다. 자결한 것이다.
“끝이군.”
총단장의 최후까지 확인한 유진은 자신의 몸을 가득 채웠던 신성력이 빠른 속도로 증발하는 걸 느꼈다. 여신이 마지막에 남긴 최후의 힘을 전부 소진한 것이다. 마신의 간교한 계책 때문에 대부분의 힘을 잃었다는 여신의 설명이 거짓은 아닌 것인지 그녀가 남긴 최후의 보루 또한 넉넉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유진!”
“주군!”
마왕과 총단장의 죽음, 신성력의 폭풍이 사라지고 다시 본연의 색을 되찾은 하늘 아래 힘없이 서 있는 유진을 향해 바이올라와 드레인을 포함한 파티원들이 달려간다.
유진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소중한 파티원들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지만, 아무래도 평생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곁에는 소중한 동료들이 언제나 함께할 테니까.
THE END
* * *
독식하는 스트리머
ⓒ 레이비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