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74)
“마왕을 죽여라!”
델로우의 외침에 성전군의 성기사들이 호전적인 함성을 지르며 거대한 체격의 마왕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맹약 기사단이 마왕을 죽이기 위해 진격하는 성전군을 그대로 저항 없이 통과시켜 줄 리 없었다.
아직 전장에는 마왕 강림 의식의 제물로 사용되지 않은 맹약 기사들이 다수 남아 있었다. 토벌군과의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 그들의 숫자가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1,000명 이상의 군세가 전장에 생존해 있다. 대부분 맹약 기사단 내에서도 정예로 평가되는 인원들이다.
마왕의 불완전한 강림과 함께 지금까지 깊은 어둠 속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맹약 기사단의 수장, 총단장까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맹약 기사단의 세력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위시한 1천의 군대가 성전군의 진격을 가로막았다.
“어딜 감히! 사악한 것들이 신성한 전진을 막아서느냐!”
델로우가 거센 고함을 내지르며 신성력을 품은 대검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거친 소음과 함께 칼날처럼 날카로운 형태의 신성력이 사방으로 뻗어 갔다.
“크아아악!”
신성력의 칼날에 당한 맹약 기사들이 붉은 피를 쏟아 내며 무력하게 쓰러졌다.
“진격하라! 사악한 악의 세력을 이 땅에서 추방해야 한다!”
델로우의 명령에 성기사들이 전열을 갖춘 채 맹약 기사단의 방어 진형을 향해 매서운 기세로 진격했다.
맹약 기사들 또한 물러서지 않고서 성전군과 맞섰다. 마왕의 강림이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제물이 부족한 탓에 온전하지 못했다. 본신의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용사와 성전군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최대한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성전군과 맹약 기사단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에 마왕은 얼마 남지 않은 블러드 서클의 마족들 중 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자신의 앞으로 불러 모았다.
블러드 서클의 마족들은 현재 탈영병 신분이긴 하지만, 한때 마왕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탈주 이후 마왕의 강림을 고대하면서 맹약 기사단과 협력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마왕군에 다시 합류해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마왕의 부름에 응했다.
“저, 전부 모였습니다.”
블러드 서클의 수장이자 일명 대공이라고 불리는 마족이 긴장한 기색을 최대한 숨긴 채 마왕의 앞에 섰다. 그의 뒤로 수십 명의 마족들이 도열해 있다.
마왕군의 탈영병들로 이루어진 블러드 서클의 세력은 결코 적지 않았지만, 최근 루벤 왕국의 토벌군과 전투를 거듭한 끝에 세력이 많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한때 수천의 마족 군대를 보유했던 세력이지만, 이제 대공의 옆에 남은 이들은 수십 명의 정예 마족이 전부였다.
“수가 적군.”
“마왕님?”
마왕의 스산한 혼잣말에 대공은 문득 강한 불안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번에는 내게서 도망갈 수 없을 거다, 대공.”
“마, 마왕님!”
다급하게 외치는 대공을 향해 마왕이 거대한 대검을 내찔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왕의 대검이 대공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커, 커헉!”
대공은 경지 높은 마족이자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뛰어난 전사였지만, 마왕의 대검을 피하지 못했다. 대공이 마왕의 움직임을 인지했을 땐 이미 거대한 대검에 몸뚱이가 뚫린 상태였다.
“어, 어째서 저희를…….”
“제물이 부족하다. 과거 탈영의 죗값을 치르고 충성을 증명하는 의미에서 순순히 제물이 되어라.”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의 대공을 보며 마왕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대공은 마왕의 설명을 듣기 무섭게 목숨이 끊어졌다. 대공의 몸이 축 늘어지자 마왕은 죽은 마족의 육신에 남은 암흑 마나를 흡수했다.
“아직 많이 부족해.”
이어서 마왕은 블러드 서클의 다른 마족들도 죽이고 그들의 암흑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족들은 거세게 저항했지만, 마왕을 저지하지 못했다. 수십 명의 정예 마족들이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마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 * *
[액티브 스킬, ‘성스러운 징벌’을 사용합니다.]
[빛 속성 정령 친화력 수치에 의해 추가 강화 효과가 부여됩니다.]
[현재 빛 속성 정령 친화력 수치가 250포인트 이상입니다. 징벌 신성력의 공격력이 25% 증가합니다.]
[전방에 징벌 속성의 신성력을 투사합니다.]
스킬의 완성과 함께 신성력의 파도가 맹약 기사들을 덮쳤다.
“크하악!”
맹약 기사들이 끔찍한 고통의 비명을 토해 내며 힘없이 쓰러졌다.
“강력한 신성력 반응이다!”
“이건 용사가 분명하다!”
“맹약을 최종 완성하기 위해 용사를 죽여야 한다!”
“용사를 쳐라!”
맹약 기사들이 유진의 신성력과 성검의 존재감에 반응했다. 그들은 유진이 있는 방향을 향해 강력한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
“유진! 내가 지켜 줄게!”
바이올라였다. 그녀는 맹약 기사단의 공격 마법으로부터 유진을 지키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대부분 소모해서 머리 위로 견고한 실드를 펼쳤다.
쾅쾅쾅쾅쾅!
격렬한 소리와 함께 실드에 충돌한 수십 개의 공격 마법이 거센 폭발을 일으켰다.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난 천재 마도사라고 해도 혼자서 다수의 공격 마법을 막아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충돌이 계속될수록 바이올라의 마나는 빠른 속도로 소모되었고 그녀의 안색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전투가 장시간 이어지는 상황에서 그녀에게 더는 부담을 가중할 수는 없다. 유진은 레이나에게 신성력으로 보호막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짧게 휴식할 여유조차 없이 전투가 이어진 탓에 레이나도 많이 지쳐 있었지만, 그녀는 유진의 요청대로 신성한 보호막을 전개하여 맹약 기사단의 공격 마법 세례를 막아 냈다.
수습 성녀의 방어가 활성화되기 무섭게 긴장이 풀린 바이올라는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부축해 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이곳 전장에서는 지친 동료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드레인. 마나 얼마나 남았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유진의 물음에 드레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거리 공격은?”
“출력을 최소화한다면 블러드 스피어 정도는 가능합니다.”
“보호막이 깨지면 블러드 스피어로 맹약 기사단 쪽의 마도사 부대를 견제해.”
“주군, 블러드 스피어로는 그들을 소탕할 수 없습니다.”“걱정하지 마, 블러드 스피어는 견제 목적이다. 마도사 부대의 시선을 잠시 붙잡아 두기만 하면 돼. 놈들의 주의가 분산되면 내가 달려가서 전부 죽일 거야.”
“알겠습니다.”
이윽고 레이나의 신성한 보호막마저 힘을 잃었다. 맹약 기사단의 마도사 부대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사이, 드레인이 아껴 둔 마나를 소모하여 8개의 블러드 스피어를 날려 보냈다.
“방어해!”
마도사 부대의 지휘관이 소리치자 맹약 기사들이 암흑 마나를 움직여 만든 실드가 드레인의 블러드 스피어를 모두 막아 냈다. 그들은 성공적인 방어에 환호하며 드레인을 조롱했지만, 이 모든 건 유진이 의도한 대로 흘러간 것이었다.
맹약 기사들의 시선이 드레인에게 향한 틈에 그들의 진형 깊숙이 침투한 유진이 성검을 마구 휘둘렀다.
“커, 커헉!”
“용사다!”
“방어가 뚫린 건가!”
마도사 부대의 맹약 기사들이 우왕좌왕하자 유진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기 위해 마나를 소모하여 스킬을 사용했다.
[액티브 스킬, ‘섬멸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바람 속성 정령 친화력 수치에 의해 추가 강화 효과가 부여됩니다.]
[현재 바람 속성 정령 친화력 수치가 150포인트 이상입니다. 소환된 칼날 바람의 속도가 40% 향상됩니다.]
바람의 칼날이 마도사 부대의 맹약 기사들을 마구 베었다. 비명이 난무하고 치명상을 입은 맹약 기사들이 극심한 고통을 안고 쓰러졌다.
“포위해!”
“놈은 우리 진형에 깊숙하게 들어왔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포위 섬멸진이다!”
고성이 오가고 맹약 기사들이 유진을 처참하게 찢어 죽이기 위해 몰려들었다. 전장에서 가장 방해되고 지휘관에 따라서는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 버릴 비장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마도사 부대 하나를 몰살했지만, 적진 너무 깊숙한 곳까지 홀로 침투한 탓에 금세 포위당하고 말았다.
“유진 경!”
멀리서 델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유진을 구출하기 위해 움직이려 했지만, 맹약 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저항하는 바람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유진은 자신을 노리는 창칼을 피하고 적들을 향해 성검을 휘둘렀다. 마나가 바닥을 드러낸 상태라 마왕과 대적하려면 스킬 사용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스킬 사용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맹약 기사들은 더욱 강한 공세를 퍼부었고 결국 유진은 마왕과의 일전에 대비하여 남겨 둔 최종 수단 중 하나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티팩트, ‘약속된 활력’을 사용합니다.]
[활력의 축복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한 달에 1회 사용이 가능한 마도구, 약속된 활력을 사용하자 누적된 부상과 전장에서 소모한 마나가 전부 회복되었다. 목숨이 위험한 치명상까지 단숨에 치유할 수 있는 마도구였기 때문에 마왕과의 대결에서 중상을 입게 되면 여분의 목숨처럼 여기고 사용하려 했지만 계속 아끼다가는 마나가 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 맹약 기사들에게 찢겨 죽을 것만 같았기에 결국 사용한 것이었다.
“다시 놀아 볼까?”
마나가 가득 찼으니 시원하게 스킬을 사용할 차례다.
[액티브 스킬, ‘정령검’를 사용합니다.]
[오러 블레이드에 부여할 정령의 속성을 선택해 주십시오.]
“화염.”
[오러 블레이드에 화염 속성의 정령을 부여합니다.]
정령검의 발동으로 오러 블레이드의 속성이 변했다. 섬멸의 바람도 효과적이지만 뭉쳐 있는 다수의 적에게 광범위한 공격을 퍼붓기에는 화염 속성이 최고다.
[액티브 스킬, ‘원소 참격’을 사용합니다.]
[‘정령검’이 발동 중입니다. 현재 오러 블레이드의 속성은 ‘화염’입니다.]
[‘화염’ 속성의 오러 블레이드의 참격을 전방에 투사합니다.]
이어서 사용된 스킬은 원소 참격이다. 뜨거운 화염을 머금은 참격이 시원스레 날아가 다수의 맹약 기사를 불태웠다.
“놈은 마나가 바닥 난 게 아니었나?”
“회, 회복한 것 같습니다!”
맹약 기사들이 경악했다. 예상외로 피해가 극심해지자 그들은 유진에 대한 포위를 풀고 마왕이 있는 후방으로 황급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포위가 풀리자 유진은 파티원들과 성전군에 다시 합류하여 마왕에게 진격했다. 블러드 서클의 마족 생존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암흑 마나를 흡수하는 것으로 미약하지만 힘의 일부를 추가로 회복한 마왕이 맹약 기사단의 군대를 이끌고 성전군과 맞섰다.
“마왕이다!”
“마왕이 다가온다!”
“신성력을 투사하라!”
“성기사단! 두려워 마라!”
고함이 오가고 최후의 일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