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스트리머-158화 (158/175)

독식하는 스트리머 (158)

“들어오세요.”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델로우의 음성이었다. 유진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델로우의 직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공간이 나타났다. 델로우는 작은 방의 끝에 있는 창가 앞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모른 요새는 ‘절명의 숲’을 대상으로 했을 때 최전방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방어 시설은 완벽했지만, 다른 시설들은 관리가 부족했다. 요새로 들어온 인원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으로 시설이 좋지 않았다. 지휘관이나 간부들이 숙박하는 숙소의 상태도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의 공간은 더욱 열악하다고 볼 수 있었다.

“유진 경, 어서 오세요.”

유진이 안으로 들어가자 델로우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앉으시죠.”

시간을 내줄 수 있냐는 물음에 델로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게 있어서 유진은 ‘절명의 숲’에서 맹약 기사단과 블러드 서클을 상대로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였다. 그리고 ‘광휘의 성검’을 다룰 수 있는 사용자일 뿐만 아니라,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였기 때문에 백색 교단 소속인 델로우는 유진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백색 교단 소속이라 그런지 ‘용사’한테는 호의적이네요.

―원래 델로우는 방장님한테 우호적인 편이었어요. 그래도 절명의 숲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관계가 좋아진 것 같기는 하네요.

―델로우 눈에서 꿀 떨어지는 것 같음 ㅋㅋㅋㅋ.

―그래도 예전보다 더 호의적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요?

―델로우 반응을 보니까, 이미 중앙청에서 연락을 한 것 같네요.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유진은 채팅 창을 슬쩍 확인하고는 델로우의 앞에 앉았다.

“델로우 경.”

“네, 유진 경.”

“제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유진의 말에 델로우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작은 하고 있지만, 확실하게 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루벤 왕국은 백색 교단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란테르고 백작님은 제가 백색 교단과 중앙청의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새벽에 란테르고 백작의 호출을 받고 그와 대면했을 때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었다. 물론 함께 호출을 받은 델로우가 자리에 있을 때 다룬 주제는 아니었다.

백색 교단의 성기사들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델로우가 먼저 자리를 비웠을 때 란테르고 백작은 유진에게 백색 교단과 중앙청의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말했었다. 란테르고 백작이 직설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에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진은 이렇게 직접 델로우를 찾아온 것이었다.

유진은 괜히 돌려 말하는 것보다는 현재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델로우에게 모든 걸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범주입니다.”

델로우가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쉽게도 저는 엄밀하게 따지면 중앙청의 직속은 아닙니다만, 여신님의 용사를 지원하는 게 백색 교단의 성직자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중앙청에는 제가 다시 한 번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중앙청 직속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광휘의 원탁회’는 백색 교단 내에서 나름 영향력이 큰 집단이다. 델로우는 그런 ‘광휘의 원탁회’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간부였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가지는 힘은 결코 가볍게 여길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유진 경은 성검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여신님께서 선택한 용사이십니다. 그리고 맹약 기사단과 블러드 서클은 백색 교단의 적이기도 하니까, 중앙청에서도 ‘절명의 숲’ 토벌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델로우 경.”

“저는 여신님을 따르는 백색 교단의 성기사입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델로우는 백색 교단 내에서도 신실한 성직자로 알려져 있으며, 중앙청보다는 여신의 뜻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의 여신, 에일린이 선택한 용사인 유진을 지원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것이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루벤 왕국의 군대가 북방에 집결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장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란테르고 백작이나, 루벤 왕국의 국왕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는 지금 유진은 델로우나 백색 교단을 재촉할 생각이 없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유진은 델로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는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란테르고 백작을 찾아가 델로우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중앙청의 대답은 예상이 갑니다.”

설명이 끝났을 때, 란테르고 백작의 입가에는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강한 확신이 묻어 나오는 표정이었다.

―이걸 예상할 수 있는 각이 나오나?

―란테르고 백작의 특징, 모든 문제를 대할 때 예상 가능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편임.

―란테르고 백작 정도면 허세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루벤 왕실 정보대는 나름 유능한 편입니다.

―ㄹㅇㅋㅋ.

―란테르고 백작이 간혹 저평가될 때가 있긴 한데, 그래도 꽤 능력 있는 정보 계열 캐릭터임.

―오호?

―기대가 됩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유진은 채팅 창을 한 차례 슬쩍 확인하고는 이어서 다시 란테르고 백작을 바라보았다.

“어떤 결과를 예상하십니까?”

유진은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있느냐, 라는 질문에 루벤 왕실 정보대의 필립 란테르고 백작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진 경이 직접 의사를 전했으니, 중앙청은 백색 교단의 성전군을 움직일 겁니다.”

백색 교단은 자비의 여신, 에일린의 뜻에 따른다. 평시에는 중앙청의 입김이 강한 편이지만, 지금처럼 여신이 신탁이나 용사 선정 등으로 대륙에 개입하거나, 자신의 뜻을 전파하게 되면 백색 교단은 중앙청의 직접적인 지시보다 여신의 간접적인 의지에 따르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건 계산된 요청이었던 거죠.

―란테르고 백작이 머리를 잘 쓰긴 하네.

―설명이 필요합니다. 누가 설명해 주실 분?

―도와줘요! 설명 요정!

―대충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란테르고 백작은 방장님이 용사로 선정된 걸 알고 있고, 백색 교단에는 여신의 의지를 대리하는 용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걸 이용해서 상황을 주도한 거라고 보면 됩니다.

―고마워요! 설명 요정!

채팅 창을 슬쩍 확인한 유진은 쉽게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표정으로 란테르고 백작을 응시했다.

“중앙청이 백색 교단의 성전군을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시는 거군요.”

“확신하고 있다, 라고 말하면 그건 자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저는 성전군의 출병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습니다.”

강한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음성이었다. 란테르고 백작은 ‘확신’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가급적 자제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의 말투나 행동 등에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확신에 찬 분위기가 너무 선명해서 그의 머릿속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성전군의 출병이라, 그럼 그 시기는 언제를 예상하십니까?”

“빠르면 일주일 안에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그동안 저희는 군을 재정비하면서 절명의 숲을 경계하면 되는 겁니다.”

과연 일주일 만에 중앙청이 백색 교단의 성전군을 출병시킬까? 흐름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유진도 란테르고 백작의 추측이 허황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 *

맹약 기사단, 그중에서도 중앙 본부의 명령을 받는 수많은 지부 중 하나인 루벤 북방 지부를 이끄는 리켈, 그는 지부장 회동에 참석하기 위해 분주히 어둠 속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둠이 끝나고 붉은빛이 그를 인도했다.

발걸음이 멈췄을 때, 그는 산속의 거친 길이 아니라 낡았지만 웅장한 분위기가 감도는 거대한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맹약 기사단의 총단장이 주최하는 지부장 회담으로 이용되는 공간에 진입할 수 있는 차원 이동 마법의 일종이었다.

초행길이 아닌 덕분에 리켈은 익숙하게 저택 대문을 열고 정원을 지나 본채 건물로 들어섰다. 으스스한 공기가 파고드는 것 같은 불쾌한 기운을 외면하고서 리켈은 복도 끝에 위치한 방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에는 수많은 그림자가 있었는데, 대부분 회동에 참석한 자들의 정체와 숫자를 가리기 위해 총단장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다들 모인 것 같군.”

무거운 분위기를 흘리는 음성의 주인은 총단장이었다. 지부장 회동에서 몇 번 들어봤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다만, 총단장의 얼굴을 직접 본 단원은 없다. 그는 언제나 은밀하게 모습을 숨기고 다니며, 지부장 회의에서도 잔상들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목소리만 내놓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지. 루벤 왕국에서 절명의 숲을 완전히 밀어 버릴 생각인 것 같다.”

리켈은 어디선가에서 질책하는 듯한 시선이 닿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침묵이 이어지고,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수히 많은 잔상 사이에서 총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알겠지만, 절명의 숲은 우리에게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라고 볼 수 있다.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상 ‘절명의 숲’을 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루벤 북방 지부의 책임자이자 지휘관인 리켈은 괜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벤 북방 지부장.”

“네, 총단장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은 총력을 다하여, 절명의 숲을 사수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제국을 장악하기 전에 루벤 왕국이 절명의 숲을 점령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절명의 숲을 사수하겠습니다.”

힘겨루기를 피할 생각은 없다. 두렵지 않다. 리켈은 총단장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고, 회동이 끝났을 때 그는 귀환하는 길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연락 수단을 동원하여 루벤 북방 지부의 간부들에게 ‘절명의 숲’에 군사력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맹약 기사단, 루벤 북방 지부의 군사력이 ‘절명의 숲’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는 백색 교단의 중앙청이 성전군의 출병을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발생한 사건이었고, 총단장의 지시가 전파되고 사흘이 지나기도 전에 5천에 가까운 맹약 기사단 무장 병력이 제국 영토를 통해 ‘절명의 숲’으로 유입됐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맹약 기사단, 그중에서도 루벤 북방 지부는 ‘절명의 숲’을 사수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할 때까지 싸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