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56)
38장. 반격을 위한 재정비
루메이 후작은 유진과 바이올라를 구하기 위해 2,000여 명의 영지군 병력을 ‘절명의 숲’으로 급파했다. 기사단 전력이 300여 명이나 포함된 대군이었다.
최근 몇 달 동안 루벤 왕국은 물론이고 루베니아 대륙의 북부 전 지역에서 마나 오염 현상을 시작으로 몬스터들의 집단 행동과 영지 침범 등의 온갖 혼란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라 루벤 왕국의 대영주, 루메이 후작이라고 해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란테르고 백작이 국왕을 설득하여 유진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의 중요성을 알렸고 결국 왕명에 의해 루메이 후작이 대규모 병력을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루메이 후작이 영지군을 먼저 ‘절명의 숲’으로 출병시키면 후방의 왕국 중앙군이 영지군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위치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루메이 후작령은 제국과 국경이 닿아 있기 때문에 다수의 루벤 왕국 중앙군이 주둔 중이었다. 이들, 루벤 왕국 중앙군 소속 전투부대들은 왕명이 하달되면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상시 대기 중이었다.
왕명에 의해 루메이 후작령에 주둔 중인 중앙군이 움직였고 루메이 영지군도 ‘절명의 숲’으로 급파되면서 유진 일행과 백색 교단의 성전군을 성공적으로 구출할 수 있었다.
할리드 벨로인 남작이 지휘하는 기사단과 루메이 영지군 병력이 ‘절명의 숲’ 중심부에서 블러드 서클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동안에 유진 일행과 백색 교단의 성전군은 다이크와 용병들의 호위와 인도 속에서 ‘절명의 숲’을 완전히 빠져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모른 요새로 향했다.
다이크와 용병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고, 유진 일행과 백색 교단의 성전군까지 함께 이동하자 ‘절명의 숲’ 외곽부에서는 포악한 몬스터들도 함부로 그들을 공격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곧 모른 요새라네.”
선두에서 말을 몰던 다이크가 진형 중앙에 위치한 유진 일행에게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이어서 다이크는 4시간을 더 이동하면 모른 요새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절명의 숲’을 빠져나오자 경계를 지키는 영지군 순찰병들이 마차를 제공해 준 덕분에 중상을 입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다이크의 말대로 4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이동하자 루메이 영지군이 평시 주둔하며 ‘절명의 숲’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는 모른 요새 인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수백 명의 무장 병력이 접근하자 요새의 지휘관은 200여 명 규모의 기마부대를 출동시켰다. 유진 일행과 백색 교단의 성전군 등이 요새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미리 전달받았으나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요새의 지휘관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기마대가 옵니다.”
드레인의 말에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200여 명 규모의 기마부대가 가까이 다가왔다. 미리 연락을 한 덕분에 검문 절차는 복잡하지 않았다.
“검문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연락은 받았지만, 아무래도 이곳이 군사 시설이다 보니 최소한의 검문 절차는 생략할 수 없다는 게 요새 지휘관 님의 입장이라서요.”
기마부대를 지휘하는 중년의 기사가 경직된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상체를 보호하는 흉갑에는 루메이 후작가를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유진이 대표로 대답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마부대 지휘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작은 소리로 가볍게 웃음을 흘리고는 유진 일행과 백색 교단의 성전군을 모른 요새로 안내했다.
활짝 열린 성문을 지나서 요새 안으로 진입했다. 요새 내부는 무장한 이들로 가득했다. 모른 요새는 루메이 후작가에서 관리하는 영지군 시설이었지만, 왕국 중앙군 소속을 나타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많이 보였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내부 주둔지에 루벤 왕국 중앙군을 상징하는 깃발이 꽂혀 있는 임시 막사가 줄지어 건설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군, 저들은 루벤 왕국의 중앙군입니다. 숫자는 대략 1,000여 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1,000여 명이라 적은 숫자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로 모른 요새까지 온 건지 모르겠군.”
유진이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중앙군이 움직인 이유에 대해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왕국 중앙군은 왕명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리고 모른 요새는 ‘절명의 숲’을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군사 시설이지요.”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드레인을 보며 유진은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설명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루벤 왕국의 국왕께서 이번 기회에 절명의 숲에 대한 토벌을 마음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드레인은 루벤 왕국의 국왕이 ‘절명의 숲’ 토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절명의 숲’은 루메이 후작령을 포함하여 루벤 왕국의 북부 지역에 넓게 형성되어 있는 위험 지대다.
포악한 몬스터들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 루베니아 대륙을 2번이나 암흑기로 물들인 마왕군의 탈영병들로 이루어진 ‘블러드 서클’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루벤 왕국의 국왕 입장에서는 여러 면에서 거슬리는 지역이었다.
먼 옛날부터 루벤 왕국은 ‘절명의 숲’의 블러드 서클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번의 시도를 거듭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토벌전 과정에서 블러드 서클의 세력이 약화된 적도 많았지만 단지 그뿐이었고 그들을 몰살하지는 못했다.
인간에 대해 적대적이고 포악한 몬스터들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험난한 지형적인 특성을 가진 ‘절명의 숲’은 방어자의 입장인 ‘블러드 서클’에게는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토벌이 쉽지 않았다.
“절명의 숲 토벌이라 전혀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지.”
유진의 말에 조용히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던 바이올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계속 실패했잖아. 그리고 지금 왕국 내부가 소란스러운데 대규모 토벌군을 거병할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해. 내부가 소란스럽고, 어수선할수록 외부의 적을 만들어서 관심을 돌리는 게 좋거든.”
“나도 아빠한테 그렇게 배우긴 했는데, 국왕 폐하께서 무리해서 토벌군을 거병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야.”
바이올라가 말했다. 유진은 다른 생각이었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자신의 주장을 강제로 납득시켜서는 안 되는 일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을 보이자 멀리 보이는 요새의 내성에서 말을 탄 젊은 기병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안장에는 전령의 역할을 나타내는 깃발이 꽂혀 있었다. 전령은 유진 일행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바로 앞까지 달려와 말에서 내렸다.
“유진 경 되십니까?”
“네, 제가 유진입니다.”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전령은 침착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소개했다. 한 차례, 소개가 끝나고 그는 유진에게 내성의 지휘부 막사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했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고는 전령의 안내를 받아서 내성의 지휘부 막사로 향했다. 백색 교단의 성전군을 지휘하는 델로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동행이 허락되지 않아서 먼저 숙소로 이동했다.
지휘부 막사는 요새의 외성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임시 막사들과는 다르게 튼튼해 보이는 석조 건물이었다.
3층 규모였고 철갑과 장검 그리고 두꺼운 방패로 중무장한 기사 셋이 출입문을 지키고 있었다. 따로 명령이 있었던 것인지 출입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유진과 델로우 그리고 전령이 다가가자 조용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들 중 조장급 정도로 보이는 자가 한 걸음 다가와 3층의 요새 지휘관 집무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전달했다.
“집무실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령이 직접 안내를 맡았다. 3층의 요새 지휘관 집무실까지 안내한 그는 조용히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후 계단을 따라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집무실 문 앞을 지키는 이는 다가오는 유진을 발견하고는 말없이 투구를 벗는 것으로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라, 자세히 살핀 끝에 유진은 그의 이름을 꽤 오래된 기억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다리크 벨키아 자작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는 왕립 기사단 9번대의 부대장으로 A랭크의 기사이자, 란테르고 백작의 호위를 맡고 있는 다리크 벨키아 자작이었다.
―오? 다리크 벨키아 자작이네요. 오랜만이라 왠지 반가움.
―벨키아 자작, 어서 오고.
―자네가 왜 거기서 나오는가!
―제 생각에는 집무실 안에 란테르고 백작이 있을 것 같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란테르고 백작은 지벨 백작령 쪽에서 맹약 기사단 조사 임무 수행 중이었던 거 아님?
―확실하지는 않지만, 만약 란테르고 백작이 저 안에 있다면 국왕이 새로운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큼.
―ㅇㅇ 란테르고 백작은 대표적인 국왕 충성파 중 한 명이라 왕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면이 있음.
시청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동안에 유진은 벨키아 자작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는 집무실 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똑똑똑.
왼손으로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도 좋습니다.”
란테르고 백작의 조용조용한 음성이 집무실 안에서 들려오자 유진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군사 지도와 전술 관련 책들로 가득한 사각형의 탁자가 중앙에 있고, 여명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는 란테르고 백작이 딱딱해 보이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유진 경 그리고 백색 교단의 델로우 경.”
왕립 마탑을 상징하는 푸른색 로브를 입은 필립 란테르고 백작이 나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중앙의 사각형 탁자 앞에 다가가 섰다.
“이른 시간에 미안합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국왕 폐하의 왕명을 전해야 하는 입장이라서요.”
란테르고 백작은 ‘왕명’을 입에 담았다. 역시 지벨 백작령에 있어야 할 그가 루메이 후작령까지 온 이유는 왕명 때문이었다. 란테르고 백작은 왕실 정보대의 대장이기도 하지만,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중앙 귀족이기도 했다.
언제나 앞장서서 왕명을 전파하기 때문에 일부 귀족들은 그를 ‘국왕의 목소리’ 혹은 ‘왕국의 전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명입니까?”
유진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델로우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루벤 국왕의 왕명이라고 해도 백색 교단 소속인 델로우에게는 큰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