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55)
“크하아악!”
고통으로 가득한 비명 소리가 ‘절명의 숲’에 울려 퍼졌다. 유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블러드 서클 마족들의 피가 솟구치며 쓰러졌다.
선봉에 서서 벌써 몇 명을 베고 찔러 죽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무아지경에 도달할 정도로 적들을 향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백색 교단의 S랭크 성물, ‘광휘의 성검’은 유진의 마나를 흡수하여 신성력으로 교환했다. 신성력의 공격력을 강화하는 A랭크 스킬, ‘신성 징벌’이 발동 중이었다. 전투가 길게 이어질수록 마나 홀은 빠른 속도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마족들을 참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유진은 지쳤다. 하지만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면 후방의 방어 진형이 더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달려드는 마족들을 얼마나 죽였을까? 정신없이 성검으로 적들을 베고 찔러 죽이고 있을 때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생성되었다.
[업적, ‘마족 사냥을 시작한 맹수’를 달성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업적 달성으로 3,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업적 달성으로 ‘초보 마족 사냥꾼’의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업적 달성으로 칭호를 얻었다.
―오? 새로운 칭호네요! 방장님, 축하드립니다.
―초보 마족 사냥꾼 효과가 기억 안 나네.
―도와줘요! 설명 요정!
―초보 마족 사냥꾼은 최하급 이상의 마족 150명을 사냥하면 얻을 수 있는 칭호입니다. 마족이랑 싸울 때 5%의 능력치 상승 보정을 얻을 수 있는 대신에 마왕 휘하 캐릭터들이나, 마왕군 관련 세력이랑 관계도를 올릴 때 페널티가 붙는 걸로 압니다.
―고마워요! 설명 요정!
고인물로 추정되는 시청자가 설명 요정을 자처하여 ‘초보 마족 사냥꾼’이라는 칭호의 효과에 대해 채팅으로 다른 시청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루베니아 연대기 세계관의 메인 악역은 마왕이고 마족들은 대부분 세력에 적대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초보 마족 사냥꾼’은 꽤 쓸 만한 칭호로 분류된다. 물론 이 칭호를 얻으려면 최하급 이상의 마족을 150명이나 사냥해야 하는데 마왕의 패배 이후 마족들은 대부분 ‘절명이 숲’에서 주로 활동하는 시대라서 대륙 전역에서 마족들을 찾는 게 쉽지 않다. 때문에 마왕의 재림과 마왕군의 재침공이 시작되기 전에는 유용하지만, 획득 난이도가 높은 편에 속하는 칭호다.
“허억, 헉……!”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이 전장에서만 홀로 일백이 넘는 수의 마족을 죽였다. 성채에서 블러드 서클과의 전투가 끝나고 곧바로 맹약 기사단과의 전투에 이어서 지금 이렇게 추격해 온 자들까지 도합 3번의 전투가 제대로 된 휴식 시간 없이 연이어진 탓에 마나 홀은 물론이고 체력도 바닥이다.
―너무 혼자 싸우는 거 아니에요?
―이거 사실상 방장님 혼자서 싸우는 느낌.
―델로우 경이랑 성기사단은 뭐함?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방장님이 선봉에서 1차로 적들 세력을 약화시키지 않았다면 성기사단은 이미 죄다 죽어서 시체가 되었을 겁니다.
―인정합니다. 지금도 백색 교단 애들도 많이 지쳐 있음. 그나마 방장님 덕분에 지금까지 생존한 듯?
시청자들은 유진을 걱정했다. 게임 오버의 위험을 우려하기도 했고 후방에서 방어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델로우와 백색 교단의 성전군을 보며 답답한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제 한계다.’
유진은 이를 바득 갈며 뒤로 물러났다. 선봉에서 단독 무대를 계속 유지하기에는 마나 홀이 완전히 바닥을 보이고 있다.
“주군! 적의 지원군입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다수의 기척을 감지한 드레인이 달려와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다수의 적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에 유진은 속으로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황급히 성전군의 방어 진형으로 물러났다.
방어 진형을 이루는 성기사들 방패 뒤로 물러난 유진은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사용하여 적들의 기척을 감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전장을 향해 매서운 속도로 접근해 오는 200여 명의 기척을 감지했다.
“큭!”
유진이 속으로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솔직히 말해서 백색 교단의 성기사들과는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고 그들의 희생이 커진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이 생기는 것은 아닐 테지만, 지금 그들의 대열이 무너진다면 전투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커진다.
운이 좋다면 유진 스스로 목숨 정도는 부지할 수 있겠지만, 당장 바이올라와 드레인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현재 진행 중인 루트에서 정식 파티원으로 영입될 확률이 높은 동료 캐릭터 레이나와 엘란도 죽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그들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에 유진은 선봉을 자처하여 적들과 맞서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함이다.
“유진 경을 지원하라!”
델로우의 외침에 성전군의 성기사들이 검과 방패를 앞세운 채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유진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적들이 몰려옵니다!”
방패를 든 채 1열에 선 성기사들 중 하나가 경직된 음성으로 적의 증원에 대해 경고했다. 예상했던 대로 200여 명의 마족들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최하급 마족으로 보였지만 A랭크의 경지에 있는 하급 마족도 여럿 섞여 있었다.
“성기사단! 전진하라!”
“앞으로! 마족들을 섬멸하라!”
“와아아아!”
성기사들이 함성을 쏟아 내며 마족들을 향해 지친 몸을 이끌고 전진했다.
“유진 경!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델로우가 달려와 유진의 옆에 섰다. 후방에서는 레이나가 유진과 델로우를 비롯한 주요 전투원들에게 신성 마법으로 버프를 걸어 주었다. 신성력의 기운이 몸에 깃들자 유진은 바닥을 보였던 마나 홀이 느린 속도지만, 조금씩 채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나의 회복량을 올려 주는 버프예요!”
뒤에서 레이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수습 성녀 중에서도 정식 성녀에 가장 가까운 후보 중 하나인 그녀는 다양한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천재였다. 하지만 그녀의 넘칠 듯한 신성력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연이어 3번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레이나의 신성력도 많이 소모되어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방금 유진과 주요 전투원들에게 부여한 버프가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레이나야!
―레이나가 상당히 유용한 동료 캐릭터인 것 같네요.
―파티원 영입이 까다로운 루트가 많다는 걸 제외하면 정말 좋은 동료 캐릭터인 것 같음.
―최고다! 레이나!
레이나의 적절한 조력에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유진은 채팅 창을 슬쩍 확인하고는 성기사들의 방어 진형에서 블러드 서클의 마족들과 맞섰다.
“크아아아악!”
곳곳에서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다. 성기사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진다. 유진과 델로우, 드레인 등이 분전했지만 백색 교단 성전군은 점차 승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어서 전장을 이탈하십시오!”
델로우가 소리쳤다. 전투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광휘의 성검’의 주인인 유진 만이라도 전장에서 탈출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대로 다 죽는 건가?
―방장님 혼자라면 탈출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 다른 동료 캐릭터임.
―안 돼! 바이올라는 살려!
―이만한 파티원들 다시 모으는 게 쉽지 않죠.
―이대로 게임 오버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ㄹㅇㅋㅋ.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잠시지만 유진도 갈등했다. 유진은 여신의 부름으로 루베니아 연대기 세계관에 빙의했다. 이곳에서 빙의자의 죽음은 단순한 ‘게임 오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추측에 불과하지만,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
유진은 독하게 마음먹었다.
“저도 끝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
결사의 각오를 다지고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검을 꽉 쥐었다. 눈앞에서 다가오는 마족을 향해 힘차게 휘두르자 성검이 신성력을 발산하며 마족을 베었다.
벌써 몇 명을 베었는지 알 수 없다. 블러드 서클의 마족들이 매서운 기세로 돌격하자 성기사단의 방어 진형이 완전히 무너지고, 전투는 난전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드레인!”
“네! 주군!”
“바이올라를 지켜!”
“알겠습니다!”
유진은 드레인에게 바이올라를 지키라고 명령하고는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금과도 같은 불리한 전황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적장의 목을 치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마나가 얼마 없는 상태라 적진에 도달하기 전에 유진은 전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급 마족 셋이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이를 바득 갈며 분노를 삼키려는 순간이었다.
뿌우우우우우!
익숙한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뿔 나팔 소리는?
―루메이 후작가에서 쓰는 뿔 나팔 소리인 것 같네요.
―헐? 그걸 소리만 듣고 알 수 있어요?
―루메이 후작가에서 사용하는 뿔 나팔은 다른 곳이랑은 소리가 조금 달라요.
―고인물은 소리만 듣고도 구별할 수 있음.
―고마워요! 설명 요정!
채팅 창이 소란스러웠지만 유진은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 확인할 여유가 없는 것이었다. 뿔 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자 마족들이 동요한다. 이윽고 울창한 어둠의 수풀을 뚫고 달려오는 수백의 기마대가 마족들의 진형을 덮쳤다.
“인간 놈들이다!”
“루메이 후작가의 깃발이다!”
마족들은 난입자들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루메이 후작가의 깃발을 휘날리며 돌진한 기마대와 충돌한 마족들의 몸이 으깨졌다. 기마대와 기사단의 선봉에는 할리드 벨로인 남작이 검을 휘두르며 용맹하게 적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기마 부대의 돌격으로 마족들의 진형이 와해되자 뒤이어 보병대가 전장으로 침투했다. 중보병대가 앞장섰고 좌익과 우익에서 루메이 후작가가 자랑하는 경보병대가 산개하여 우르르 몰려나왔다.
“지, 지원군이다!”
누군가 외치자 성기사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루메이 후작가와 영지군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영지군 보병들은 순식간에 전장을 장악했다.
“유진 경!”
익숙한 목소리다. 음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자유 기사이자 이제는 금패 용병이 된 다이크가 용병으로 보이는 무리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루메이 후작이 고용한 은패 이상의 정예 용병들이었다.
“우리를 따라오게!”
다이크와 용병들은 유진 일행과 백색 교단의 성전군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전장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성전군의 수는 고작해야 수십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중상자가 절반 이상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델로우는 몰살을 피했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고 유진도 동료들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루메이 영지군 예비대 그리고 용병들과 함께 무사히 절명의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