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52)
37장. 세계의 여신
눈을 뜨자 온통 새하얀 백색의 공간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었던 성검의 시험과는 다른 전개다. 하지만 유진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는 것과 동시에 채팅 창을 확인했다.
시청자들에게서 모르던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잠시 눈을 돌려 보니 채팅 창은 비활성화되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잠시 방송이 끊긴 것 같았다. 이는 현재 유진이 있는 루베니아 연대기의 세계와 시청자들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와의 연결이 단절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유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백색의 공간이었다. 연신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살피던 유진은 저 멀리 순백의 공간 끝에서 미세한 균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어 그대로 미세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은 균열이다. 유진은 균열을 향해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혔다. 본능적으로 왼쪽 허리에 손을 가져갔지만, 유감스럽게도 익숙한 위치에 있어야 할 장검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제야 유진은 자신이 지금 비무장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마나도 반응이 없네.”
상태 창도 열리지 않았고 스킬 발동을 위해 마나를 일으키려 해도 전혀 반응이 없다. 무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마나조차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에 보이는 균열을 조사하는 방법밖에 없다. 유진은 주위를 경계하면서도 천천히 거리를 좁혔고 이내 균열의 바로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희미한 어둠의 기운이 새어 나오는 균열을 향해 유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요. 그 균열은 이 공간을 빠져나가는 탈출구 같은 게 아니라서요.”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음성에 유진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금발 여성의 모습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녀의 등에 붙은 한 쌍의 천사 날개는 백색 교단에서 서술하는 자비의 여신, 에일린의 것과 비슷했다.
루베니아 연대기 게임 속에서 자비의 여신, 에일린은 실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껏해야 성녀의 육신을 빌려 목소리를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외형도 아주 오래전부터 백색 교단을 통해 전해져 오는 게 전부다. 하지만 유진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천사의 형상을 한 여성이 자비의 여신, 에일린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자비의 여신, 에일린은 세계관에 구현화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했죠?”
에일린, 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 유진의 모습에 백색 날개를 가진 여성은 다시 한 번 씨익 웃어 보였다.
“꽤 정확하게 간파했나 보네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제가 루베니아 대륙에서 자비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에일린이랍니다.”
백색 날개의 천사는 스스로를 에일린이라고 밝혔다.
“당신이 저를 이곳으로 불러온 겁니까?”
“이쪽 세계로 동의 없이 불러들여서 죄송해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에일린의 대답에 유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진이 말한 ‘이곳’은 이 백색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에일린은 ‘이쪽 세계’라고 말했다. ‘이쪽 세계’라는 건 루베니아 연대기라는 게임 속 세계를 뜻하는 것 같았다.
“이쪽 세계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유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되물었다. 에일린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진을 루베니아 연대기 세계관으로 불러들인 이는 다름이 아니라 에일린인 것이다.
“네, 맞아요. 유진 경을 이쪽 세계로 부른 게 바로 저예요.”
에일린의 대답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 였다. 문득 ‘루베니아 연대기는 게임이 아니라 실존하는 세계였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유진은 루베니아 연대기라는 세계에 자신을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저를 이쪽 세계로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유진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사람을 갑작스럽게 게임 속이라고 생각했던 세계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던져 놓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화도 났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어떤 막강한 권능을 가지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여신이기 때문에 유진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궁금하세요?”
“네, 궁금합니다.”
“이 세계가 유진 경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유진 경을 이 세계로 소환한 거랍니다.”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에일린의 모습에 유진은 아주 잠깐이지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비의 여신이 원래 이런 캐릭터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루베니아 연대기 세계관에서 자비의 여신, 에일린의 설정은 구체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원래부터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많은 추측이 돌던 캐릭터이기는 했다.
“왜 하필 저를 소환한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유진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 에일린의 애매한 대답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죄송스럽지만, 유진 경을 이 세계로 부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요.”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에일린은 말했다. 유진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시 상황에서는 유진 경을 이 세계로 소환하는 게 저한테는 최선책이었어요.”
“설명이 너무 부족합니다.”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지금 제게는 여유 시간이 없는 건 물론이고 어떤 강력한 힘의 개입 때문에 제 선에서 공개할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에요.”
설명이 부족하다는 유진의 작은 불평에 에일린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비의 여신이라고 불리며 루베니아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녀보다 강대한 힘을 가진 어떤 존재 혹은 세력이 개입하며 필요한 정보의 공개를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에일린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는 강제로 끌려 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끌고 온 당사자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제아무리 유진이라고 해도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하는지, 그것도 말 해 줄 수 없는 겁니까?”
“유진 경은 잘 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나아가면 될 거예요.”
에일린의 대답에 유진은 문득 맹약 기사단의 존재를 떠올렸다. 이 세계의 소년병 유진에게 빙의된 이후부터 여신이 잘 하고 있다고 언급할 만한 일들을 꼽자면 루베니아 대륙 전체에 사악한 기운을 전파하는 맹약 기사단을 열심히 견제한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맹약 기사단이 문제입니까?”
단순한 추측이다. 유진의 질문에 에일린은 말없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유진이 이 세계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성검을 당신에게 주겠어요. 의미 없을 수도 있지만, 성검의 시험이라는 귀찮은 절차도 생략될 거예요.”
성검은 S랭크의 성물에 해당한다. 막강한 신성력을 발휘하는 무기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만 성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물론 루베니아 연대기의 다회차 플레이어인 유진은 성검의 시험 내용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쉽게 통과할 수 있는 편법까지 알고 있다. 그래서 에일린은 유진에게 성검의 시험을 생략하는 게 의미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유진의 생각은 달랐다.
고인물의 경지에 오른 유진에게 있어서 성검의 시험은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귀찮고 복잡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그런 불필요한 절차를 생략해 주겠다는 에일린에게 고마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성검의 시험은 편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꽤 귀찮고 짜증 나는 수준의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에 유진에게도 ‘시험 생략’은 의미 있는 조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약소하지만, 간단한 축복을 추가로 부여할 거예요. 제가 힘을 많이 잃었지만 아직까지는 여신의 격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에일린은 말을 마치며 오른손을 유진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녀는 유진에게 여신의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이지만 눈앞에서 백색의 섬광이 터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고 시야가 완전히 회복되자 에일린은 어디선가 꺼내온 성검을 유진에게 건넸다.
“이제 이걸 받아 주세요.”
“성검이네요.”
“앞서 설명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번거로운 절차는 생략했어요. 괜찮죠?”
“오히려 좋습니다.”
그리고 에일린이 건넨 성검을 손에 쥔 순간, 유진은 다시 전장에서 눈을 떴다.
[자비의 여신, 에일린의 축복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신성력을 각성합니다. 이제 신성력 수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비의 여신, 에일린의 축복으로 신성력 수치가 보정됩니다.]
[성검의 시험을 생략합니다.]
[‘광휘의 성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액티브 스킬, 신성 징벌(A)을 습득하였습니다.]
[정령기사 클래스의 특성으로 인해 ‘빛의 정령’ 친화력을 획득하였습니다.]
눈앞에 무수히 많은 시스템 메시지가 생성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자비의 여신, 에일린이 최후의 힘을 짜내어 백색 교단에 신탁을 내립니다.]
[여신의 뜻으로 플레이어의 메인 클래스가 ‘용사’로 수정됩니다. ‘정령기사’는 서브 클래스로 이동됩니다.]
[용사 임명으로 인해 백색 교단과의 관계가 ‘영원한 동맹’으로 변경됩니다.]
용사가 되었다. 루베니아 연대기에서는 마왕이 존재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용사 클래스도 있다. 다만 용사 클래스로 전직하기 위해서는 꽤 험난한 과정을 돌파해야 하는데 설마 이렇게 쉽게 될 줄은 몰랐다.
―뭐임? 갑자기 여신이 방장님을 용사로 만들었음.
―옆에 델로우 보셈 ㅋㅋㅋㅋ.
―눈이 휘둥그레졌네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용사 전직 엄청 까다로운 거 아니었어요?
―도와줘요! 설명 요정!
―이건 설명 요정도 모를 것 같습니다.
여신과 만났던 공간과는 달리 채팅 창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시청자들은 놀란 반응이었다. 하지만 채팅 창을 계속 읽고 있을 여유도 없고, 구태여 상황을 설명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아직 적들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다. 그들을 처치하는 게 우선이다.
유진은 말없이 ‘광휘의 성검’을 뽑아 들었다. 순백의 빛이 검신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산했고, 선명한 신성력의 파동이 억센 심장 박동처럼 두근거렸다.
이제 반격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