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41)
34장. 무수히 많은 방해꾼들
―히로인이랑 알콩달콩한 전개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됐네요.
―ㄹㅇㄹㅇ입니다.
―야밤에 히로인 캐릭터와 밤 산책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심각한 느낌의 작전 회의네요.
―아쉽네요. 제가 기대했던 건 이런 장면이 아닌데 말이죠.
―이게 다 맹약 기사단 때문입니다! ㅋㅋㅋㅋ.
―기대가 커서 그런지 시무룩하네요.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야밤의 산책이 무산된 탓에 시청자들의 실망이 큰 모양이다. 빠르게 채팅 창을 훑어보는 것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유진은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 마침 루메이 영지군의 제 2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할리드 벨로인 남작이 선제 타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마을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무조건 저희 측에서 선제 타격해야 합니다.”
벨로인 남작의 주장에 백색 교단의 간부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먼저 입을 여는 것을 회피했다. 특히 엘란과 레이나는 자신들의 상급자라고 볼 수 있는 델로우 빌크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가오는 적들을 요격하려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하는데, 아직 백색 교단의 중앙청에서 보낸 지원군이 마을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원군을 기다리면 적들이 마을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선제 타격이라, 그 방법도 나쁘지 않긴 하죠.”
조용한 침묵을 깨고서 델로우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긴장 속에서 델로우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사방에서 시선이 모이는 걸 느낀 델로우는 턱을 긁적이며 잠시 고민을 이어 간 끝에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합시다, 선제 타격.”
델로우가 말했다. 그는 지원군을 기다린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지원군을 기다리면 요격 타이밍을 놓치게 되고, 결국에는 마을에 피해가 닿기 때문이다. 다소 융통성이 없기는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위하는 백색 교단의 고위급 간부다운 결정이었다.
“마을에 피해를 전가할 수는 없지요. 아군의 전력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선제 타격이 가장 현명한 판단인 것 같습니다.”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는 델로우의 태도에 엘란은 잠시나마 지원군을 기다리며, 마을로 적을 끌어들이자는 생각을 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멋지네요.
―역시 델로우!
―다른 세력이었다면, 지원군을 기다렸다가 마을에서 싸우자고 했을 겁니다.
―ㄹㅇㅋㅋ.
―델로우는 나름 정의로운 캐릭터라서, 무고한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기는 했죠.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채팅 창이 활발하다. 대부분의 시청자가 델로우의 선택을 지지했다.
“기사단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벨로인 남작이 말했다. 그는 기사단을 통솔하기 위해 서둘러 여관을 빠져나갔다. 델로우도 휘하의 성기사들을 소집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회의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유진과 바이올라도 정비를 위해 일단은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서 드레인을 만나서 그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뱀파이어인 드레인은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적들을 공격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반대 의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벨로인 남작이 지휘하는 루메이 영지군 제 2기사단 소속의 기사들 30여 명과 델로우가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백색 교단의 선발대 50여 명이 유진 일행과 함께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전열을 정비한 후, 마을을 향해 접근 중인 맹약 기사단의 전투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적들의 이동 경로는 제 부하들이 실시간으로 파악 중입니다.”
벤자민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현재 암약회의 길드원들이 맹약 기사단 전투 부대의 위치를 거의 실시간으로 벤자민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미행에 나선 이들은 암약회에서도 은신과 추적에 능한 정예들이었다. 덕분에 유진의 일행들은 올슨의 부하들과의 거리를 금방 좁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유진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유진. 괜찮아?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
표정이 워낙 안 좋아 보였던 것인지 말을 타고 이동 중에 바이올라가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이올라. 왠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유진의 반문에 바이올라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왕립 마탑의 우수한 천재 마도사였지만, 군사 전술에는 식견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아서.”
“매복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거야?”
웬일로 바이올라가 매복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유진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바이올라의 질문에 긍정했다.
“매복이 있다면 미행하는 암약회의 길드원들이 먼저 알아차리지 않을까?”
바이올라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암약회의 길드원들을 만능의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태도가 답답했지만, 유진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당장 바이올라에게 설교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차라리 모든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델로우나, 기사단을 지휘하는 벨로인 남작에게 직접 말하는 게 현명할 것이다.
“암약회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맹약 기사단도 만만한 놈들이 아니니까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야. 최초 정보를 얻은 과정도 그렇고, 지금까지 일이 너무 쉽게 진행되고 있어. 이 정도 의심은 지극히 합리적이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간단하게 말해 두는 것으로 충분했다. 다행히 바이올라는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납득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라 귀여워!
―ㄹㅇㄹㅇ 바이올라가 히로인 캐릭터 중에서 제일 매력적임.
―마법 천재지만, 전술 바보? 이건 진귀한 캐릭터입니다.
―이쯤 되면 사실 방장님도 바이올라 메인 히로인 루트를 진행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저도 같은 생각.
―외쳐! 바이올라! 바이올라! 바이올라!
시청자들이 바이올라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가끔 채팅 창을 확인할 때면 바이올라를 지지하는 세력이 광전사처럼 그녀의 이름을 채팅 창에 반복적으로 입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단은 델로우 경에게 언질을 해 둘 필요는 있을 것 같네.”
혼잣말에 가까운 유진의 중얼거림에 바이올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조했다. 유진은 델로우가 있는 백색 교단 진영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소속이 다른 두 집단이 군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행군과 움직임은 같이 하되, 주 진영의 위치는 달랐다. 벨로인 남작과 기사들이 선봉에 섰고, 백색 교단이 중앙 및 후열을 담당하고 있었다.
“유진 경. 무슨 일인가?”
델로우는 밝은 목소리로 유진을 반겼다. 유진은 그의 옆에서 말을 몰며, 함정의 가능성을 설명했다. 간략한 설명이 끝나자 델로우는 심각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저도 함정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지금까지 신중하고, 은밀하게 활동해 온 맹약 기사단이 너무 허술하게 꼬리를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적당하고 있다.
암약회 길드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일련의 전개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쉽게 진행되고 있다. 마치 대놓고 함정을 파두고서 유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명의 숲을 빠져나온 맹약 기사단의 군대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들이 루메이 후작령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신중하게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델로우의 의견도 일리 있다. 그는 철수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매복이나 함정이 존재할 수도 있다며 경각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알겠습니다.”
유진은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다. 이쯤 말했으면, 델로우도 경각심을 강화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루메이 영지군과 백색 교단의 군대는 계속해서 진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맹약 기사단의 간부인 올슨의 부하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올슨의 부하들은 이동 과정에서 추가 인원이 합류하여 이제 250여 명이 넘는 숫자였다.
델로우는 함정을 경계하겠다고 단언했으나, 막상 올슨의 부하들과 조우했을 때 그는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성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올슨의 부하들이 절명의 숲에서 전사한 백색 교단 소속 성기사들과 사제들의 시체를 괴상한 외견의 허수아비들에 묶은 채 행군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이를 보고 이성을 잃은 델로우는 휘하 성기사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돌격하라! 간악한 놈들의 손아귀에서 형제들을 구출하라!”
델로우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벨로인 남작이 말릴 틈도 없이 백색 교단 진영은 올슨의 부하들을 향해 기마 돌격을 감행했다.
군용 마를 타고 은빛의 철갑을 입은 성기사들이 백색의 망토를 휘날리며 기병창을 앞세웠다. 사제들은 후방에서 아군 성기사들의 사기와 전투력을 올려 주는 버프를 부여했다.
성기사들의 대책 없는 돌격에 유진은 크게 당황했다. 델로우는 나름 현명한 캐릭터인데, 적들의 도발에 너무 쉽게 넘어간 것이었다. 물론 맹약 기사단의 도발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진은 순간 갈등했다. 이대로 돌격에 동참해야 하나? 아니면 진형을 지킬 것인가. 그 누구도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유진 경.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30여 명의 기사들과 함께하는 벨로인 남작이 유진의 의견을 물었다. 벨로인 남작은 유진에게 호의적이었고, 그의 의견을 참고할 생각이었다.
“이대로 진영을 둘로 나누는 것보다는 백색 교단에 가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진영이 둘로 나눠 있으면, 예상외의 기습이나 매복에 당했을 때 기민한 대응이 어렵다. 유진이 의견을 말하자 벨로인 남작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장의 왼쪽에 걸려 있던 투구를 머리에 썼다.
“기사단! 돌격하라! 백색 교단의 성기사들을 지원하여 침략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
우렁찬 함성과 함께 적들을 향해 기사들이 돌진한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땅이 울린다. 앞서간 백색 교단의 성기사들을 향해 맹약 기사단의 마도사들이 마법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빛이여!”
델로우가 신성 마법을 시전하자 순백의 보호막이 성기사들을 보호했다. 맹약 기사단 마도사들의 마법 공격은 신성 마법으로 완성된 보호막을 뚫지 못했다.
―광역 보호 마법 ㄷㄷㄷㄷ.
―역시 A+랭크의 성기사 캐릭터는 대단하네요.
―좋아! 이대로 다 박살 냅시다!
―방장님도 얼마 전에 스킬 강화 많이 했으니까, 거의 A+랭크일 듯.
―A+랭크가 둘이다! 하하하!
시청자들의 환호 속에서 유진 또한 기사들과 함께 적진으로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