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40)
“어제 우연히 올슨 경의 공격 계획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폴리냐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올슨의 공격 계획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편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폴리냐는 그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다. 올슨 역시도 폴리냐가 공격 계획을 입수한 경로에 대해 자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불쾌해하는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따로 정보를 통제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전달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군.”
올슨이 무감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달 속도가 빠르다는 말을 폴리냐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듣는 자세에 따라 비꼬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는 대사였지만,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평기사의 계급에 있는 폴리냐와는 달리 올슨은 간부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감정이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도발에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수집한 건 아니었습니다.”
“죄송할 건 없다.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고, 공격이 시작되면 타니아 경의 귀에도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까 말이지.”
올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궁금하군.”
“실은 저희 쪽에서 확보한 정보를 전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정보? 흠, 일단은 들어 보겠다.”
“이미 파악하셨겠지만, 백색 교단의 성기사단이 절명의 숲 인근으로 집결 중에 있습니다.”
폴리냐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자칫 잘못하면 주제넘은 참견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단어 선택과 어투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정성이 효과가 있는 것인지 올슨은 여전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팔짱을 낀 채 폴리냐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다음으로 이어질 대사에 따라 반응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올슨이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폴리냐는 자신에게 향하는 올슨의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저희 쪽에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백색 교단에서 동원한 성기사들의 정예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봐, 폴리냐 경. 가능하면 직설해 주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예의를 차리는 건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걸 듣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지.”
너무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듣는 입장에서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였던 것이다. 올슨의 재촉에 폴리냐는 긴장으로 인해 살짝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정예 전투원들이 충분히 집결했을 때 공격을 개시하는 게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공세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올슨의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기세가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올슨은 폴리냐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 조금이지만 선을 넘은 발언 같은데? 폴리냐 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가?”
“올슨 경,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니야, 폴리냐 경. 자네는 지금 내 부하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전혀 아닙니다, 올슨 경. 지금 중대한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폴리냐는 그녀답지 않게 크게 당황했다. 올슨이 대놓고 분노를 표출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녀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자 올슨은 열 걸음 떨어진 뒤에서 말없이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부하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전원 무장하라고 전해. 지금부터 백색 교단의 떨거지들을 청소하러 출발한다.”
올슨은 결정을 내렸고, 폴리냐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막을 방법은 없다. 어쩌면 자신이 섣부르게 행동한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올슨은 결단을 내렸고, 이제 그의 부하들이 절명의 숲 인근 마을에서 재정비 중인 유진 일행을 덮칠 것이다.
폴리냐는 올슨을 만류하는 것을 포기하고 현 상황을 타니아에게 보고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 * *
늦은 밤이었다. 숙소에서 수면을 취하고 있던 유진은 오랜만에 악몽에 시달리다가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산책이나 할까?”
유진은 한 차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방송에 로그인했다. 가벼운 산책이라도 방송 켠 채 걸으면 적은 포인트라도 모을 수 있다. 물론 지루해하는 시청자들도 있지만, 애초에 유진은 떠나는 시청자들에게 비굴하게 매달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로그인과 동시에 채팅 창이 활성화되고, 유진이 방송을 켜면 알람이 울리게 설정해 둔 시청자들이 먼저 입장했다.
―유진 하이!
―방장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늦은 시간에 방송 로그인하셨네요.
―개이득!
―방장님 방송 보다가 자야겠음!
―매우 좋습니다! 산책 방송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로그인을 하고 방송이 활성화되기 무섭게 한꺼번에 수백 명의 시청자들이 한 번에 몰려 들어왔다. 유진의 방송에 대해 알림 설정을 해 둔 고정 시청자들의 숫자가 꽤 많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였다. 만약 늦은 시각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시청자가 유진의 방송을 보기 위해 접속했을 것이다.
“산책이나 해 볼까.”
유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마을의 외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유진과 백색 교단 소속의 성기사 소수 그리고 루메이 영지군의 기사들이 재정비를 위해 잠시 머무르고 있는 마을은 중형 규모라서 그런지 자체 자경단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소 어설프지만 방책도 유지하고 있었다.
마을의 자경단원들과 루메이 영지군의 병사들이 외곽의 방책을 지키고 있었다. 절명의 숲이라는 위험한 지형 환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소수지만 영지군 병사가 상시 주둔하고 있었다.
―야밤의 산책도 나쁘지 않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함.
―달이 아름답군! 크큭!
―왠지 불길한 건 기분 탓일까요?
―설마 별일 있을까요?
시청자들의 채팅을 슬쩍슬쩍 확인하며 10분쯤 걸었을까? 유진은 자신이 서 있는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유진, 뭐 해?”
야밤에 산책에 나선 유진을 따라온 이는 다름 아닌 바이올라였다.
―바이올라다!
―늦은 밤에 히로인 캐릭터와 산책을? 이건 못 참죠.
―기대가 됩니다 ㅋㅋㅋㅋ.
―이건 바이올라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미 방장님은 바이올라 호감도를 충분히 올리신 것 같은데요? ㅎㅎㅎ.
―저도 그렇게 생각함.
―바이올라가 방장님을 보는 눈을 보면 호감도가 꽤 높다는 걸 알 수 있음.
예상치 못한 바이올라의 등장에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새로운 히로인 캐릭터인 레이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바이올라의 비중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시청자들한테서 인기가 많은 캐릭터였다.
호들갑을 떠는 시청자들의 모습에 유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바이올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잠이 깨서 산책 중이었지. 너는?”
“나도 잠이 안 와서 잠깐 산책하러 나온 거야.”
유진의 물음에 바이올라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수줍은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는 반응이었다. 당연히 채팅 창은 난리가 났다.
―최고다! 바이올라!
―바이올라가 히로인 캐릭터 중에서 제일 귀여움! 반박은 받지 않음!
―지지합니다.
―외쳐! 바이올라!
―바이올라! 바이올라! 바이올라!
시청자들의 환호 속에서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루베니아 연대기는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도 재밌지만, 히로인 캐릭터의 호감도를 올리는 과정도 흥미롭게 즐길 수 있다.
히로인 캐릭터의 공략 플레이를 선호하는 시청자들도 많은 편이다. 그래서 스트리머들 중에서는 메인 스토리의 진행 비중을 줄이고 히로인 캐릭터들에 대한 호감도 작업을 위주로 방송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 그럼 같이 걸을까?”
“좋아!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유진의 제안에 바이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했다. 평소에 눈치 없이 굴던 유진이 매끄럽게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 내자 채팅 창에는 다음 전개를 기대하는 시청자들의 환호로 가득 찼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기대하는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앞에 벤자민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유진 경. 긴급한 일입니다.”
“벤자민 씨? 무슨 일입니까?”
표정이 심상치 않다. 유진의 질문에 벤자민은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절명의 숲 외곽을 감시하던 저희 암약회 길드원들이 소속 불명의 다수 인원이 이동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다수의 인원이 절명의 숲을 빠져나왔다는 말입니까?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건가요?”
잘못 들었나 싶은 마음에 유진은 벤자민에게 재확인 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시기에 절명의 숲에서 소속 불명의 인원들이 빠져나왔다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맹약 기사단의 전투원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의 목적지였다. 만약 이곳을 향해 이동 중이라면 마을에 피해가 가기 전에 그들을 요격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유진은 침착하게 벤자민의 대답을 기다렸고, 5초를 넘지 않은 짧은 침묵을 끝내고서 벤자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지만 저희를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일단은 적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가장 위협적이고 명백한 적대 세력은 ‘맹약 기사단’이 거의 유일하니 제 3의 세력은 아닐 것이다.
“델로우 경과 벨로인 남작님께는 이미 이 사실을 전달했습니다. 지금쯤 휘하 병력을 소집 중에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델로우 경을 만나야겠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벤자민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고 유진과 바이올라가 뒤따랐다. 유진은 긴장한 표정이었고 바이올라는 오랜만에 유진과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해 불만인 것 같았지만, 분위기가 심각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벤자민이 안내한 장소는 델로우와 백색 교단의 소수 인원이 머무르는 여관 건물의 1층이었다. 임시 회의실로 사용하는 것인지 벨로인 남작과 영지군 소속의 기사 몇 명 그리고 레이나와 엘란도 함께였다.
“모두 모였군요.”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이는 백색 교단의 고위 간부이자 A+랭크의 성기사인 델로우 빌크론이었다.
“시작하죠.”
레이나의 재촉에 벤자민이 품 속에서 곱게 접은 양피지를 꺼내서 탁자 위에 펼쳤다. 절명의 숲 인근 지형을 상세하게 기록한 지도였다. 이어서 벤자민은 작은 휴대용 깃펜을 꺼내고는 지도에 뭔가를 그렸다.
창과 칼을 든 병사 모양의 그림이 지도 위에 그려진다. 위치는 그들이 머물고 있는 마을과 가까운 지점이다.
“이틀 남았습니다.”
벤자민이 빙하처럼 냉기 묻은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