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38)
유진과 일행들이 물러난 마을은 절명의 숲 인근에 있지만, 규모가 작은 편은 아니라서 그런지 마을 안에 여관이 몇 군데 있었다. 덕분에 유진과 파티원들 외에도 루메이 후작령의 기사들과 백색 교단의 성직자들 모두가 야영할 필요 없이 마을 안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델로우 빌크론과 백색 교단의 성직자들이 머무르는 여관은 유진의 숙소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절명의 숲을 빠져나왔다고는 하지만, 적의 추격이 붙을 수도 있기 때문에 델로우는 최대한 가까이 붙어 있는 여관들을 숙소로 정했다.
“이 방입니다.”
델로우는 복도의 끝에 위치한 방 앞에 멈춰 섰다. 유진이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델로우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많이 지친 듯한 여성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하루 종일 다른 이들의 부상을 치료해 주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레이나의 목소리였다.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델로우가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객실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고, 레이나는 창가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유진과 델로우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레이나는 탁자 앞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앉으세요, 유진 경.”
레이나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유진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델로우는 레이나의 좌측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고, 유진은 두 사람의 앞에 앉았다. 유난히 지친 얼굴의 레이나는 피로가 가득 쌓인 눈동자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 경이 성물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거, 델로우 경께서도 이번에 알게 되셨어요.”
레이나가 말했다. 미안한 표정이었지만, 유진은 그녀를 탓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가볍게 넘겼다. 그녀는 백색 교단에 소속된 몸이고, 아직 정식 성녀의 위치에 오르지 않은 상태라 델로우 빌크론이 압력을 행사했다면 모든 걸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송해요, 유진 경. 사실은 끝까지 비밀을 지키려 했는데…… 제 잘못이 크네요.”
횡설수설한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유진의 정보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델로우에게 말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네요.
―솔직히 말해서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함.
―저도 동감. 애초에 비밀 유지를 요청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예의의 문제가 아닐까요? 사과는 할 만하다고 생각.
―저는 중립 기어를 올리겠습니다.
―언쟁은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시청자들 간에 사소한 언쟁이 일었다. 유진은 채팅 창을 슬쩍 확인하고는 다시 눈동자를 움직여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유진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별 감정 없었고, 크게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방장님. 국어책 읽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 이보다 더 기계적일 수는 없을 듯.
―ㄹㅇㅋㅋ 방장님 방금 기계 같았음.
―사람 생각 다 비슷하네요.
―이 정도면 레이나한테 미안한 감정 더 심어 주려고 정색하는 걸 수도 있음.
―저도 그렇게 생각함 ㅋㅋㅋ.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가고, 소액이지만 포인트 후원도 이어졌다.
“혹시 괜찮다면 정보의 출처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델로우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는 정보의 출처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었다. 억지로 캐묻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가볍게 질문을 던지는 느낌이었다.
백색 교단의 고위 간부인 델로우의 입장에서는 현재 극비로 취급되어 관련 정보를 제한하고 있는 유실된 성물에 대해 유진이 어떻게 알았는지 최소한의 조사를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델로우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더라도 일단 백색 교단에 몸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위 간부였기 때문에 마냥 외면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불편하시다면,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압적으로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혹여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델로우가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밝힐 수 없습니다.”
유진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자세한 상황을 밝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긴 사실 게임 속 세상이었고, 자신은 원래 고인물이라고 불렸던 다회차 플레이어였기 때문에 세계관 설정에 대해 박식하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델로우는 백색 교단에 충성하는 성기사지만, 융통성이 없거나 집요한 성격은 아니다. 제한적이고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를 파티원으로 영입할 수 있는 루트도 있기 때문에 동료 캐릭터로서의 인기도 꽤 많은 편이다.
“하지만 절명의 숲에 잠든 성물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저희 백색 교단에 공유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보의 공유를 요청하는 건가요?”
“역시 단순히 떠도는 소문으로 접한 건 아니었군요.”
단순한 넘겨짚기였을까? 유진은 다소 굳은 얼굴로 델로우를 살폈으나, 그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어서 좀처럼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섣부른 지레짐작은 좋지 않기 때문에 유진은 더는 깊이 추측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다른 부분을 고민할 차례다. 백색 교단에서 정보 공유를 요청한 상황이다. 아마 몇 분 내로 대화가 진행되면 퀘스트 창이 눈앞에 생성될 것이다. 그때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고민이다.
유진은 루베니아 연대기의 다양한 루트를 진행하고 많은 엔딩을 본 다회차 플레이어다. 백색 교단에 성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조력한 적도 있었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다만, 루베니아 연대기는 플레이어의 선택과 변수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과거의 흔적을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상했던 대로 델로우와의 대화가 더 이어지자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눈앞에 새로운 퀘스트 창이 생성되었다.
[메인 이벤트: 숲에 잠든 성검.
당신은 절명의 숲에서 맹약 기사단의 공격을 받고 있던 백색 교단의 조사대를 구출하였습니다만, 다시 맹약 기사단의 공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공격은 큰 피해 없이 막아 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두 번째 공격이었습니다. 첫 번째와는 다르게 두 번째 공격은 맹약 기사단의 간부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었지만, 그녀의 전투력이 너무 높아서 당신과 일행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때 백색 교단과 루메이 후작가의 지원군이 도착하였고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닙니다. 백색 교단의 고위 간부이자 성기사인 델로우 빌크론은 수습 성녀 레이나로부터 당신이 숲에 잠든 성검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대한 공유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자유입니다.
보상: 어떤 결정을 내려도 메인 이벤트로 진행. 정보를 공유하게 될 경우, 백색 교단의 우호도 대폭 상승.]
결정의 순간이 찾아왔다.
―고민이 많으신 것 같네요.
―신중하게 결정하셔야 할 듯.
―그냥 정보 공유하면 안 되나요? 백색 교단 쪽 관계도 올리는 것도 이득인 것 같은데요.
―그게 오히려 독이 되는 선택일 수도 있음.
―어째서인가요? 궁금합니다.
―저 대신 설명 요정님께서 등장하시면 잘 설명해 줄 겁니다.
―간단하게 설명 드리자면, 루베니아 연대기는 변수가 많아서 선택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루트가 정말 많이 갈리는데 백색 교단에 정보를 공유하는 루트 진행하다가 성검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고마워요! 설명 요정!
채팅 창에서는 일부 고인물 시청자들이 신입들한테 유진이 신중하게 고민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시청자들은 이제 유진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유진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의 선택이 지금까지 진행한 루트의 성격을 바꿔 놓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고인물이라고 불리는 다회차 플레이어조차 루트가 어떻게 바뀔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루베니아 연대기의 매력이면서도 반대로 높은 진입 장벽이기도 했다.
“결정을 내리기 힘드신가 봅니다.”
델로우의 물음에 유진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 이상 고민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유진은 결정을 내렸고, 진지한 얼굴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
검은 로브를 입고 진홍색의 가면을 쓴 남자가 밤하늘 아래에 어둠으로 물든 숲의 길을 따라 걷고 있다. 그는 맹약 기사단의 루벤 북방 지부를 이끄는 9명의 간부 중 하나로 올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현재 타니아와는 대립하는 위치에 있지만, 루벤 북방 지부장은 그를 타니아가 영역으로 삼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절명의 숲에 배치했다.
타니아에 대한 감시 및 성검 수색 활동에 대한 지원이 올슨이 하달받은 임무였다. 분주히 발걸음을 옮긴 끝에 그는 타니아의 은신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절명의 숲에는 타니아가 세운 거점이 꽤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이곳은 오직 타니아와 그녀의 부관만 이용하는 소규모의 은신처였다.
은신처의 결계 공간으로 진입하자 어디선가 나타난 폴리냐가 올슨에게 천천히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올슨 경, 무슨 일이신지요.”
“타니아 경을 만나러 왔다.”
“현재 휴식 중이십니다.”
“지부장님의 명령이다, 비켜라.”
“알겠습니다.”
지부장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다. 올슨이 다그치자 폴리냐는 옆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타니아의 부관이었고, 지부장의 위치는 맹약 기사단 내에서도 아득히 높은 곳에 있다.
올슨은 폴리냐의 옆을 지나쳐 2층짜리 석조 건물 앞으로 향했다. 저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투박하고 작은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1층에 들어서자 2층 계단에서 타니아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신경질적인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기세를 읽은 올슨은 가면 아래에서 씨익 웃었다.
“실패했다고 들었다.”
“소식이 빠르네, 올슨 경.”
“네 실패는 계속 축적되고 있다. 지부장님께서도 우려하고 계신다.”
“이제는 더 이상 실패하지 않을 거야.”
“저번에도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말이지.”
올슨의 비난에 타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지부장님께서는 어떤 결정을 내렸지?”
“간단해. 이제 절명의 숲의 총지휘는 내가 한다. 지금 내 수하들도 이곳으로 집결 중에 있어.”
“굴욕적이네. 정말 짜증이 나.”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타니아 경.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올슨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기에 타니아는 애꿎은 입술만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