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31)
사실 지금 이 시기에 백색 교단의 사제들이 절명의 숲에 있는 이유는 예상이 간다. 백색 교단이라는 집단과 절명의 숲이라는 장소를 겹치면 하나의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그, 그것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와 눈동자에 엘란은 크게 당황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섣불리 판단하기 힘든 것 같았다. 백색 교단이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꽉 막힌 집단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다.
―역시 백색 교단이야. 입막음은 확실하네.
―백색 교단은 루베니아 대륙에서도 융통성이 없는 걸로 유명하죠. 이건 뉴비들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인정합니다. 다른 방송에서도 백색 교단의 성기사랑 파티하는 거 봤는데 ㄹㅇ 꽉 막혀 있음.
―타 방송 언급 자제해 주세요.
답답하게 행동하는 엘란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분주하게 채팅을 입력했다.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시죠. 사정을 모르면 저도 도와주기 힘듭니다.”
“유진 경, 저도 말하고 싶지만 제게는 이 문제를 언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엘란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엘란은 A랭크의 실력자로 백색 교단 내에서도 성기사들을 통솔하는 간부의 직위에 있지만, 성기사단은 무력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신관 계열의 동급 간부들에 비해 기밀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이 다소 약했다.
“유진 경, 안타깝지만 지금 엘란 경을 붙잡고 늘어져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거예요.”
가녀린 목소리와 함께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 레이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한숨을 푹, 하고 내쉬고는 엘란을 보호하듯이 유진의 앞을 막아섰다. 유진의 시선이 곧바로 레이나에게 향했다.
“그렇다면 레이나 경을 붙잡고 늘어져야겠네요. 그러면 뭔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장담할 수 없는 문제죠.”
“그렇습니까? 확실해요?”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여긴 위험하다는 거예요. 대화를 길게 이어 간다고 이로울 게 없을 것 같네요.”
레이나가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여긴 위험하다. 유진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숲의 외곽으로 물러나죠. 중심부는 맹약 기사단이 아니더라도 위험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도와주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외면할 생각 없었습니다.”
유진의 말에 레이나는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감동한 표정 보셈 ㅋㅋㅋㅋ.
―이걸로 백색 교단의 성녀(진)한테도 플래그 꽂는 걸까요?
―정작 방장님은 의도하지 않은 것 같음.
―그래도 플래그는 꽂은 겁니다.
―이걸로 히로인 후보가 추가되는 건가요?
―오오오!
―저는 하렘 엔딩을 지지합니다.
플래그를 꽂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유진이 백색 교단의 성녀가 될 운명인 레이나 루트에 필요한 호감도를 쌓기 시작하자 시청자들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레이나를 지지하는 시청자들로부터 포인트 후원도 몇 차례 이어졌다. 당장 상점 창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쯤이면 적지 않은 스킬 포인트가 쌓여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유진은 레이나를 안심시키고는 곧바로 벤자민을 찾았다. 레이나와 백색 교단의 사람들을 은신처에 숨겨 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현재 유진이 사용 중인 은신처는 암약회의 소유였기 때문에 이용하려면 벤자민의 허락이 필요했다. 계속 요구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당장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절명의 숲을 벗어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도중에 추격이 붙을 가능성도 크다.
“제 권한으로 커버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백색 교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저희 길드의 높으신 분들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백색 교단 사람들의 대피에 대해 벤자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정보 길드원이나 암살자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은 편이지만, 벤자민이라는 캐릭터는 달랐다. 그 역시 손익을 따지는 계산적인 남자였으나 융통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놀랄 정도로 시원스럽게 행동할 때도 많았다.
벤자민의 부하들도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들 벤자민의 성격을 알고 있기도 하고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은 것이다.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더 지체하면 추격이 붙을 수도 있습니다.”
드레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엄중한 경계를 유지하며 암약회의 은신처로 물러났다.
부상과 전투로 인해 지쳐 있는 백색 교단의 사람들이 은신처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벤자민은 부하들에게 은신처 주변의 경계를 명령했다.
“유진 경.”
은신처의 오두막 옆에 마련된 나무 의자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유진에게 벤자민이 다가왔다.
“말씀하세요.”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벤자민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유진의 대답에 벤자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흔쾌히 돕겠다고 말해 줘서 고맙다는 표정이었다.
“저 대신 란테르고 백작님께 지금 상황의 전달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희 측에도 마도사가 있습니다만, 추격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탓에 한동안 결계 점검에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서요.”
사소하고 간단한 부탁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유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벤자민은 선명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암약회의 길드원들과 합류했다.
“바이올라!”
유진은 바이올라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어차피 결계가 내부의 소음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해 주기 때문에 목이 터져라 외쳐도 상관없는 일이다.
두 번째 외침이 은신처에 울려 퍼지자 바이올라가 뛰어왔다. 유진은 그녀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오케이.”
바이올라는 대답과 함께 란테르고 백작의 연락 좌표로 호출 신호를 보냈다. 이제 답신이 오면 통신 마법진을 준비하면 된다.
“왔다.”
바이올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는 바로 통신 마법진을 그렸고 약 3분의 시간이 흐르자 란테르고 백작과 마법 통신이 연결되었다.
푸른 빛을 발산하는 통신 마법진 위로 귀족의 예복을 갖춰 입은 란테르고 백작의 환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진 경, 오랜만입니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가벼운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전달을 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네요.
유진은 피로해 보이는 얼굴의 란테르고 백작에게 절명의 숲 중심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 란테르고 백작은 복잡한 심경이 묻어 나오는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복잡한 상황이네요. 저희 쪽에 백색 교단의 협력 요청은 접수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서요.
절명의 숲에서 중심부는 통제 구역이기 때문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루메이 후작가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 절명의 숲에는 맹약 기사단의 거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루메이 후작은 란테르고 백작과 왕실 정보대에 출입자 명단을 공유하고 있었다.
란테르고 백작이 기억하기로 최근 루메이 후작가에서 공유해 준 출입 명단에는 백색 교단의 관련자들 이름이 없었다. 즉, 절명의 숲 중심부에 루메이 후작가의 허가 없이 들어 왔다는 해석이 된다. 이건 나중에 루메이 후작이 문제를 삼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제 부하들이 마침 절명의 숲 근처에 있으니 백색 교단 인원들의 안전한 탈출을 위해 지원을 보내도록 하죠. 벤자민 씨에게는 당분간 조사 및 정보 수집 임무를 중단하고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보호하는 것에 집중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유진 경에게도 레이나 경의 호위를 부탁하겠습니다. 덧붙여 백색 교단의 인물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감시도 부탁합니다.
이건 돌발 퀘스트가 생성될 것 같은 느낌이다, 라고 생각을 끝내기 무섭게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온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돌발 퀘스트: 백색 교단의 알 수 없는 행보.
당신은 란테르고 백작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암약회 길드원들의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정보 수집과 조사 임무를 위해 나서는 암약회 길드원들을 호위하기 위해 동행하여 절명의 숲 중심부에 들어섰을 때 당신은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 레이나와 A랭크 성기사 엘란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허가 없이 절명의 숲 중심부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란테르고 백작에게 보고하자, 그는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백색 교단의 인물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을 당부하며 동시에 감시의 임무도 부탁했습니다.
보상: 3,000골드, 스킬 포인트 1,000.]
“승낙하겠습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띠링! 돌발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고 란테르고 백작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뒤 마법 통신을 종료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은 기분이야.”
바이올라가 말했다. 그녀는 유진이 란테르고 백작과 마법 통신을 하고 있을 때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보통 연락 마도사들은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통신 마법진을 유지하지만 유진은 바이올라를 신뢰하기 때문에 바로 옆에 둔 것이다.
“잠시 쉬다 올게.”
“오케이.”
유진은 긍정이나 부정을 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오두막 바로 옆에 위치한 의자에 다시 앉았다. 슬슬 스킬 포인트가 충분히 모였다고 생각한 그는 상점 창을 열었다.
[보유 포인트: 34,200.]
―진홍의 뇌격(A)
―섬멸의 바람(A): 정령기사
―청풍의 다짐(A)
스킬 포인트는 충분했고, 마침 구매하려던 스킬도 바로 보였다. 유진은 망설임 없이 30,000포인트를 지불하여 A랭크 스킬인 섬멸의 바람을 구입했다.
섬멸의 바람은 예리한 칼날과도 같은 바람을 일으켜 다수의 적을 공격하는 스킬로 정령기사 직업의 전용 스킬이다. 당연하지만 바람 속성의 정령 친화력 수치가 높을수록 더 강력한 위력을 자랑한다.
유진은 정령 친화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상태 창을 열었다.
[정령 친화력.]
―화염: 160(+40)
―얼음: 110(+10)
―대지: 85(+10)
―바람: 85(+10)
바람 속성의 정령 친화력은 낮은 편이었다. 섬멸의 바람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관련 마도구를 구해서 장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속성의 마도구를 구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도시에 들를 일이 있을 때 마탑 상점에서 구입하면 된다.
재정비를 끝내고 의자에서 일어서는 순간,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레이나와 엘란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유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