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30)
32장. 성물을 찾는 자들
백색 교단의 성기사들은 맹약 기사단의 단원과 한창 전투 중이었다. 절명의 숲에 처음 진입할 때만 해도 성기사들 그리고 소수의 사제들로 구성된 백색 교단의 군세는 도합 100명에 근접한 숫자였지만, 맹약 기사단의 일방적인 습격으로 인해 발생한 전투로 인해 전사한 이들이 70여 명에 이르렀다. 목숨을 부지한 채 필사의 저항을 이어 가고 있는 이들 또한 대부분 부상이 깊었다.
“커, 커헉!”
“진형을 유지해! 흐트러지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전열을 사수해야 해!”
또 한 명의 성기사가 목에 화살이 꽂힌 채, 짧은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힘없이 쓰러졌다. 그가 무너지듯 쓰러지자 바로 뒤에 서 있던 성기사가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쓰러진 이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기사들의 시체는 쌓여 갔다. 방패를 든 채, 진형을 유지하는 성기사들의 호흡이 거칠게 변했을 때, 백색 교단의 진영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숫자는 고작해야 20여 명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백색 교단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공격하는 맹약 기사단의 전투원들은 여전히 100여 명 이상이었다.
맹약 기사단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열을 유지하고 있는 백색 교단의 성기사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옆의 동료들은 하나둘 쓰러지고, 적의 수는 지속적으로 충원되는 상태니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백색 교단 놈들을 모두 죽여라!”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검은 갑주를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맹약 기사단의 하수인들이 공세의 강도를 높이자, 동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던 성기사들의 대열이 크게 흔들렸다.
“크아아악!”
“막아야 한다!”
“이, 이대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열이 무너졌다. 맹약 기사단 진영의 선봉에서 검은 갑주를 입은 흑기사가 거대한 전투 도끼를 휘두르며, 백색 교단의 무너진 대열로 침투하려는 순간이었다.
“커헉!”
어디선가 하얀 궤적을 그리며 날아온 백색의 투창이 거대한 전투 도끼를 든 맹약 기사단 하수인의 흉부를 관통했다.
칠흑의 두꺼운 철갑옷은 백색의 투청으로부터 착용자를 지켜 주지 못하고 허망하게 꿰뚫렸다. 흉부에 바람구멍이 생긴 하수인은 입 밖으로 붉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고, 그 틈에 바로 앞의 젊은 성기사가 창백한 얼굴로 힘차게 ‘메이스’를 휘두르는 것으로 하수인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갑작스러운 의문의 개입에 모두가 당황했으나, 이어서 맹약 기사단 하수인들의 머리 위로 불벼락이 떨어지자 백색 교단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돕기 위한 도움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지원군이다!”
백색 교단의 진영에서 누군가 외쳤다. 성기사들은 물론이고, 차분한 성격의 사제들조차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쁨의 감정을 쏟아 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바닥을 치던 사기가 순식간에 회복됐다. 지휘봉을 잡은 신관 계급의 사제는 돌처럼 경직된 얼굴로 휘하의 성기사들에게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 태세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성기사들이 방패를 들어 올린 채 적들과 맞섰다. 다시 한 번 전투가 과열되려는 찰나, 하수인들의 머리 위로 사람의 형체가 낙하했다. 하수인들의 진영 정중앙에 낙하한 인물은 다름이 아니라 레이나와 엘란의 지원 요청에 기꺼이 응하여 맹약 기사단을 징벌하기 위해 공격에 나선 유진이었다.
“모두 안녕?”
고인물 플레이어 특유의 여유로운 인사말과 함께, 유진은 망설임 없이 뽑아 든 검을 하수인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끄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수인들의 숫자는 많았지만, B랭크의 실력자들은 전투 초반에 다수가 목숨을 잃었고, 현재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C랭크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진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혈흔이 치솟고, 비명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정령검까지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로 충분했다.
“마, 막아라!”
평기사 계급의 단원이 소리쳤다. 그러자 얼마 남지 않은 B랭크의 하수인들이 유진을 향해 원형으로 포위망을 형성하고서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포위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방장님한테는 안 될 듯.
―B랭크 11명은 A랭크한테 있어서 훌륭한 제물에 불과하죠.
―방장님의 식후 운동 거리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깔끔하게 원 샷 원 킬로 처리합시다!
―방장님! 어서 빨리 고인물 무빙 보여 주세요!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시청자들은 유진의 고인물 무빙과 압도적인 무력 차이로 인한 일방적인 학살을 원하는 것 같았다.
‘원한다면 보여 줘야지.’
유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가까이 다가온 하수인들이 인지하기도 전에 유진의 검격이 그들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쇄도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두꺼운 철갑옷을 종잇장처럼 찢고서 하수인의 복부를 깊숙하게 베었다. 복부에 치명상을 입은 하수인은 일순간, 시야가 아득하게 변하는 걸 느끼며 힘없이 비틀거렸다.
중심을 잃고서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이는 하수인을 향해 유진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목이다. 하수인의 목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고, 그는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유진이 화려한 검술을 펼치자 그를 포위했던 하수인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역시 방장님이야!
―고인물 무빙이네요.
―이제 잔챙이 말고 적장을 칩시다.
―ㄱㄱㄱ!
현란한 무빙에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포인트 후원도 이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B랭크의 정예 하수인들이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하고 죽어 가자 지휘권을 잡고 있던 평기사 계급의 단원은 결국 부하들한테 후퇴를 명령했다.
“정말 후퇴하는 겁니까?”
“기사님! 백색 교단의 추종자들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모두 죽여야 합니다!”
“오랜 맹세를 저버리는 겁니까? 우리의 적이 코앞에 있습니다!”
단원들이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지휘관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수습 성녀를 놓쳤다! 놈들한테 지원군이 붙었으니,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해! 즉각 퇴각하라! 불이행한다면 즉결 심판하겠다!”
지휘관이 고함을 내지르자, 결국 단원들은 교전을 포기하고 일사불란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추격을 피하기 위해 흩어져서 후퇴하려는 것이었다.
“추격할까요?”
“지금 우리는 추격전을 벌일 여력이 없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추격 여부를 묻는 부하를 향해 벤자민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퇴각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새로운 은신처라던지, 도주 경로를 파악하고 싶었지만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소수의 인원으로는 추격을 진행하는 게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들을 쫓으라고 섣불리 명령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색 교단의 인원에서 부상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보조하려면 소수의 인원이라도 간절하게 필요한 실정이었다.
“아쉽나?”
“부정한다면 거짓말이겠죠. 추격한다면 저희가 파악하지 못한 거점이나 은신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리해서 움직이다가 과도한 희생이 발생하는 건 피해야 하는 법이지. 명심해, 로우센. 지금 우리는 전투 조 편성이 아니라 조사 목적으로 조원들을 편성한 상태다.”
“명심하겠습니다.”
로우센이라고 불린 남자는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 시체가 사라지고 있어?”
전투의 흔적으로 가득한 전장에서 이탈하기 전에 중상을 입은 이들을 응급 처치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죽은 이들 중에는 맹약 기사단의 평기사들도 소수 섞여 있었는데, 그들의 심장이 완전히 멎으면서 증거를 멸하기 위한 ‘맹세’에 의해 시체를 불태우는 암흑 마법이 발현된 것이다. 시체에서 암흑 마법이 발동하는 걸 처음 본 몇몇 성기사들은 암흑의 불길에 타오르는 시체의 모습을 보며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다.
지휘권을 잡고 있던 신관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지만, 성기사들한테는 그 어떤 설명도 없었다. 다소 답답한 광경이었지만, 벤자민에게는 백색 교단의 내부 사정에 개입할 권한이 없었다. 대신 그는 철제 흉갑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 경.”
“네, 벤자민 씨.”
“불에 탄 시체는 총 다섯 구입니다. 즉 백색 교단과의 전투에서만 평기사가 최소 5명은 동원되었다는 걸 의미하죠. 단순한 추측이지만, 전투에 동원한 병력의 숫자로 볼 때 맹약 기사단은 절명의 숲 안에 꽤 많은 거점을 두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벤자민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조했다. 엘란의 상황 설명에 의하면 백색 교단의 조사대를 공격한 이들의 숫자는 250여 명이었다.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지원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유진이 말했다. 하지만 벤자민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목적은 맹약 기사단의 거점 토벌이 아니라 정보 수집과 지형 조사입니다. 백색 교단을 돕기는 했지만, 맹약 기사단과 정면 대결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일리 있다. 벤자민의 설명에 유진은 금세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틀린 말은 아님.
―지금 싸우면 안 될 것 같기는 해요.
―칫! 아쉽지만 일단 후퇴한다!
―도, 망, 쳐.
―때로는 타이밍 맞춰서 물러나는 것도 좋습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채팅 창을 슬쩍 확인한 유진은 다시 눈앞의 벤자민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저는 레이나 경에게 가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유진 경. 저는 부하들과 함께 주변을 경계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진은 벤자민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짧은 감사 인사를 표하고는 곧장 레이나와 엘란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레이나는 중상을 입은 이들을 신성력으로 치료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이 기본적으로 신성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 클래스이기 때문에 중상 레벨의 부상은 레이나의 도움을 받는 편이 좋았다.
“유진 경, 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레이나의 옆을 지키는 엘란이 허리까지 숙이며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엘란과는 여러모로 불편한 일들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진은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도하게 예를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맹약 기사단은 저의 적이기도 하니까요.”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요?”
“백색 교단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