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22)
“벨로인 남작의 깃발인 것 같습니다.”
루센버그 준남작이 말했다. 노을이 지고, 서정적인 색깔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아래로 벨로인 남작의 깃발이 보였다.
벨로인 남작의 깃발이 보인다는 것은 이제 루메이 후작령의 경계로 진입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말은 즉, 루센버그 준남작과 그의 휘하에 있는 유젤키아 영지군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슬슬 회군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칙적으로는 유젤키아 영지군 소속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루메이 후작령의 경계를 넘을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용병이라면 그나마 낫지만 다른 영지의 무장 병력이 영지 간의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해당 영지의 영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이동할 수 있는데, 그 허가라는 걸 받으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군사 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조율이 필요한 것이다.
유젤키아 영지군에게는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호위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루메이 후작령 내에서의 무장 군사 이동에 관한 허가를 받기 위한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회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허가 절차를 진행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레이나가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루메이 후작으로부터 허가를 요청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이쯤에서 회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루메이 후작령 방향으로 더 접근하면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루센버그 준남작이 말했다.
“유진 경,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루센버그 준남작님이 동행해 준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안전한 여정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센버그 준남작은 휘하 기사들과 함께 회군했다. 이윽고, 할리드 벨로인 남작이 5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호위대를 이끌고 다가왔다.
호위대의 인원 중 절반은 기사였고, 나머지 절반은 영지군 소속의 병사들이었다. 루벤 왕국의 북부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루메이 후작령의 영지군 병사들이라서 그런지 다들 무장 상태가 좋았다.
“반갑습니다. 저는 루메이 영지군의 제 2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할리드 벨로인 남작이라고 합니다. 도시까지 여러분을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철갑옷을 입은 기사가 다가와 투구를 벗고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벨로인 남작이었다. 다회차 플레이어라고는 해도 세계관이 방대한 루베니아 연대기 속의 모든 캐릭터를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벨로인 남작은 여러 루트를 클리어 한 유진도 처음 만나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인사에 대답하는 대신에 시스템의 힘을 사용하여 ‘주시자의 눈’ 스킬을 발동했다.
[액티브 스킬, ‘주시자의 눈’을 사용합니다.]
[대상 캐릭터의 정보를 표출합니다.]
이윽고, 유진의 눈앞에 벨로인 남작의 상태 창이 나타났다.
[루메이 영지군의 제 2기사단장 할리드 벨로인 남작(A)]
―할리드 벨로인은 먼 옛날부터 대대로 루메이 후작가에 충성을 바쳐 온 가신 가문인 벨로인 남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루메이 후작가에 충성을 바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충심이 깊습니다. 이후,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벨로인 남작가의 가주가 되면서 그는 루메이 영지군의 제 2기사단장 자리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 기사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루메이 후작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벨로인 남작의 정보가 담겨 있는 상태 창이었다. 원래는 ‘이명’이 들어가는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레인의 상태 창도 확인했는데 역시나 없는 걸 보면 최근에 또 업데이트가 있었던 모양이다.
최근 업데이트가 잦은 느낌이었지만, 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업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유진이 거부할 수 있는 수단은 없기 때문에 그냥 넘기는 수밖에 없다.
“저도 반갑습니다, 벨로인 남작님. 덕분에 든든합니다.”
“행렬에 바이올라 아가씨도 함께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루메이 후작가를 수호하는 검으로서 당연히 호위대에 참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벨로인 남작의 말에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조용히 동조했다.
“오랜만이에요, 벨로인 아저씨.”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부석에 앉아 있던 바이올라가 인파를 뚫고 불쑥 튀어 나왔다.
“바이올라 아가씨? 정말 오랜만입니다. 도중에 습격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벨로인 남작은 바이올라를 향해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메이 후작의 막내딸인 바이올라는 벨로인 남작과 안면이 있었다.
바이올라는 마도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루메이 후작령을 벗어나 왕립 마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마도사의 진로를 결정하기 전에 해당하는 10대 중반까지는 루메이 후작령의 영주성에서 지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루메이 후작가를 위해 충성을 바쳐 온 벨로인과는 친분이 있었다.
특히 벨로인 남작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쾌활하고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바이올라가 친근하게 생각하는 몇 안 되는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유진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바이올라의 말에 유진을 바라보는 벨로인 남작의 시선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감정이 섞이지 않은 시선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유진에게 향하는 벨로인 남작의 눈동자에서 호의적인 감정이 묻어 나왔다.
주군의 막내딸을 지켜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유진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품은 것이었다. 벨로인 남작은 충성과 봉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사도를 따르는 전형적인 기사 캐릭터다.
단순한 사고 구조를 가진 만큼이나, 그의 호감도를 올리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 다만 그의 가치관에 반대되는 행동을 보인다면 그동안 쉽게 쌓아 올린 호감도를 순식간에 잃을 수도 있다.
“호오? 유진 경, 사실입니까?”
벨로인 남작의 물음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이올라 아가씨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아가씨가 다치거나, 더 안 좋은 일을 당하셨다면 영주님께서 크게 진노하셨을 겁니다.”
슬퍼하는 게 아니라 ‘진노’하는 것이다. 루메이 후작은 막내딸을 아끼는 딸 바보 캐릭터로도 유명하다. 바이올라가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루메이 후작은 복수의 칼날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이동 계획에 대해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이대로 놔 뒀다가는 루메이 후작과 바이올라에 대한 얘기만 주야장천 듣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유진은 화제를 전환했다.
“여기서 루메이 도시까지 하루가 걸리지 않습니다. 말을 타고 서둘러 이동하면 내일 정오가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지요. 그래서 이동 계획은 간단합니다. 수면 시간을 줄이고 도시까지 신속하게 이동하는 겁니다.”
강대한 군세를 보유한 루메이 후작령이라고 해도 맹약 기사단이 레이나를 향해 칼날을 갈고 있을 테니, 도시 밖은 위험하다. 도시 외부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험은 커진다.
도시의 성벽 안으로 들어가야 그나마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휴식과 수면 시간을 다소 포기하더라도 신속하게 움직여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은 꽤 괜찮은 계획이다.
“좋은 방법 같네요.”
일행들의 반대도 없었다. 호위 행렬은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이동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서야 간소하게 만든 야영지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4시간의 짧은 수면이 끝나고 호위 행렬은 루메이 도시를 향해 다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추가 휴식은 없었고, 쉬지 않고 이동한 끝에 유진과 일행들은 루벤 왕국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로 유명한 루메이 도시의 성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루메이 도시!
―여기 사냥터들이 꽤 난이도 높지 않나요?
―방장님 실력을 생각하면 루메이 후작령의 사냥터 난이도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아요.
―ㄹㅇㅋㅋ.
―방장님이 고인물 그 자체라서 크게 상관없을 듯?
―인정합니다.
채팅 창을 힐끔 살피는 것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실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도시를 향해 다가가자 벨로인 남작의 깃발을 알아본 것인지 성벽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열린 성문을 통해 철갑옷을 입은 10여 명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괜찮다면 저희가 영주성까지 안내를 맡겠습니다!”
루메이 후작가의 깃발을 안장에 꽂은 젊은 기사가 힘차게 외쳤다. 북부의 찬 공기를 머금은 바람 소리가 강렬했지만, 힘차게 내뱉은 목소리가 파묻힐 수준은 아니었다.
영주성까지 안내를 해 준다고 하니까 고마웠지만, 유진은 바로 뒤에 있는 엘란과 마차 안에 타고 있을 레이나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레이나의 호위 의뢰는 아직 종료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레이나의 허가가 필요하다. 엘란이 마차 쪽으로 다가가 열린 창문을 통해 현 상황을 전달하자 마차의 문이 열리고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 레이나가 천천히 하차했다.
“유진 경, 저희를 루메이 도시까지 무사히 호위해 주셨으니 이쯤에서 의뢰는 종료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의뢰의 성공 보수는 굳이 신전까지 갈 필요 없이, 제가 먼저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레이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1,000골드의 가치를 지닌 금괴 10개를 꺼내서 가죽 주머니에 담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퀘스트의 완수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온다.
―띠링! 돌발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띠링! 보상으로 스킬 12,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띠링! 보상으로 백색 교단의 평판이 상승하였습니다. 현재 백색 교단의 평판은 ‘신뢰’입니다.
―띠링! 보상으로 루벤 왕실과의 평판이 상승하였습니다. 현재 루벤 왕실과의 평판은 ‘우호’입니다.
―띠링! 돌발 퀘스트의 완수로 메인 이벤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습니다.
―곧 메인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시끄럽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시스템 메시지가 쉬지 않고 울렸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으나, 바로 앞에 레이나가 있었기 때문에 표정을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배려해 줘서 고맙습니다.”
레이나와 엘란 그리고 성기사들과는 짧게 작별을 고했다. 아쉽지는 않았다. 곧 진행 될 메인 이벤트는 ‘숲에 잠든 성검’으로, 엘란은 몰라도 레이나와의 재회는 확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레이나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또 만나게 될 겁니다.”
유진은 레이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을 흔들며 백색 교단의 인원들로부터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