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21)
30장. 루메이 후작령
“중앙청의 명령은 절대적이에요. 따를 수밖에 없죠.”
고민은 없었다. 레이나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솔직히 여기까지 와서 레이나가 망설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유진이 씨익 웃자 레이나 또한 희미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중앙청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재앙의 시대가 시작되면 백색 교단의 성물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레이나가 설명을 덧붙이는 것으로 말을 끝맺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재앙의 시대가 찾아오고 마왕이 강림하면, 하나라도 더 많은 성물을 확보하고 있어야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맹약 기사단으로부터 경고와 함께 살해 협박을 받았지만, 레이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위협적인 상황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백색 교단 중앙청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시작은 백색 교단의 명령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행동하는 레이나의 모습에 유진은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고마워요, 유진 경. 덕분에 조금은 힘이 나는 것 같네요.”
“그렇다면 계속 이동하겠습니다.”
유진은 다시 호위 행렬을 움직였다. 마차를 중심으로 한 행렬이 다시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마차의 마부석에 앉은 바이올라가 유진을 불렀다.
“유진!”
“바이올라, 무슨 일이야?”
“마법 통신 요청이야.”
“마법 통신이라고? 어디서?”
“우리 집!”
바이올라의 목소리가 유난히 밝고 활기차다. 그녀가 ‘집’이라고 표현할 만한 곳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루메이 후작가’다.
“루메이 후작가에서 호출한 거야?”
루베니아 연대기 세계관에서는 마법 통신이 존재한다. 다만, 상호 간에 마법으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제한적이다. 만능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표적인 방식으로는 연락을 맡은 마도사가 상대방에게 호출 마법을 사용하여 마법 통신을 연결해 달라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고유의 연락 좌표로부터 호출 신호를 받은 마도사는 안전한 장소에서 마법진을 설치하고 마법 통신을 연결하면 된다. 마법 통신은 특별한 마도구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마법진을 설치하고 통신을 연결해야 하는 번거로운 면이 있지만 호출은 이동하면서 보내거나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몇몇 마도사들은 마법 통신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호출로 신호를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응, 아빠가 호출했어.”
유진이 묻자 바이올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바이올라 아빠라면 에르빈 루메이 후작이죠?
―맞아요.
―철혈의 사자! 에르빈 루메이 후작!
시청자들의 설명대로 바이올라의 부친은 에르빈 루메이 후작이다. 그는 루벤 왕국의 북부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진 대영주였다.
“루메이 후작님이 호출하신 거라면 잠시 멈추고 마법 통신을 연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네.”
유진이 말했다. 바이올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
“그렇지 않아도 루메이 후작가에 연락을 취해야 해. 후작님께서 경계 근처로 호위대를 보내 주기로 하셨잖아. 중간에 이동 경로가 틀어졌으니까, 접선 장소를 다시 정해야지.”
유젤키아 도시에서 루메이 후작과 마법 통신으로 대화를 나눴었다. 루메이 후작은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 레이나가 안전하게 도시까지 올 수 있도록 호위대의 지원을 약속했다.
여러 이유 때문에 루메이 후작이 보낼 호위대는 지벨 백작령으로 진입할 수 없지만, 대신에 경계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유젤키아 자작이 붙여 준 호위들과 교대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오케이!”
바이올라의 대답을 들은 유진은 루센버그 준남작과 엘란에게 호위 행렬을 잠시 멈추자고 전했다. 루메이 후작과 연락해야 한다며 이유를 설명했더니, 반대는 없었다. 이동 경로가 틀어졌기 때문에 접선 장소를 다시 정해야 한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총원 경계 위치로.”
루센버그 준남작이 기사들을 경계 위치로 이동시켰다. 기사들이 경계를 위해 각자 위치로 이동하고 성기사들이 방어 진형을 갖추는 동안, 바이올라는 통신 마법진을 그렸다.
통신 마법진이 완성되고, 바이올라가 연락 좌표를 입력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메이 후작가의 연락 마도사의 환영체가 나타났다. 그녀는 바이올라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바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루메이 후작의 막내딸에 대해 예를 갖추는 것이다.
―영주님께 말씀 전하겠습니다.
“고마워.”
연락 마도사의 환영체가 잠시 사라졌다. 5분을 기다리자 마법진 위에 다시 환영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번에는 연락 마도사가 아니라 루메이 후작이었다.
바이올라는 당연히 한눈에 알아봤고, 유진 또한 유젤키아 도시에서 마법 통신을 통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서 루메이 후작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빠!”
루메이 후작의 환영체가 나타나기 무섭게 바이올라는 반가움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비록 마법 통신이지만 오랜만에 보는 딸의 모습에 루메이 후작은 환하게 웃었다.
정말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는 바이올라의 옆에 유진이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한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과하지 않게 표정을 관리했다.
―커흠! 유진 경, 여정은 좀 어떤가?
루메이 후작이 그동안의 여정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아직 그는 유진이 지휘하는 호위 행렬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전달받지 못 했다. 스톤 골렘과의 교전 사실을 마법 통신으로 지벨 백작과 유젤키아 자작에게 보고하기는 했지만, 두 귀족은 루메이 후작의 가신이나 부하가 아니기 때문에 최우선 보고 의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호위 행렬이 공격당했다는 사실이 루메이 후작에게 빠르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었다.
“스톤 골렘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스톤 골렘이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유진이 딱딱한 음성으로 대답하자 루메이 후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한 반응이다. 스톤 골렘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몸체를 가지고 있으며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작동이 정지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A+랭크의 몬스터 중에서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련한 A랭크 용병들 다수로 구성된 파티조차도 던전에서 스톤 골렘과 조우하면 공략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체불명의 집단이 소규모 상단으로 위장했더군요. 스톤 골렘의 소환 마법진 혹은 소환용 마도구를 상단의 짐마차 안에 넣어 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검문을 시도했더니, 스톤 골렘을 꺼내 들고서 반격해 왔습니다. 아마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군을 부르거나 야밤에 기습을 당했을 겁니다.”
유진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맹약 기사단과 관련된 정보는 왕실 정보대의 란테르고 백작과 약속한 것들 때문에 과도하게 풀 수 없어서 적당히 ‘정체불명의 집단’이라고 둘러댔지만, 루메이 후작은 이미 맹약 기사단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맹약 기사단 놈들이로군.
이를 바득 갈며, 맹약 기사단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루메이 후작이었다. 스톤 골렘은 개체에 따라 레이드 보스급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강력한 몬스터다. 그렇기 때문에 루메이 후작은 바이올라를 잃을 뻔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는 것이다.
“맹약 기사단에 대해 알고 계셨군요.”
―왕실 정보대의 란테르고 백작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네.
“맹약 기사단과 관련된 정보를 함구해 달라고 부탁을 받아서 먼저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유진의 말에 루메이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해하네. 맹약 기사단과 관련된 내용은 왕실 정보대에서 최고 레벨의 기밀로 취급하니, 어쩔 수 없지. 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걸세. 얼마 전에 란테르고 백작으로부터 들은 내용이네만, 자네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군.
“맹약 기사단과 관련된 정보에 대한 기밀 등급을 해제한다고 하던가요?”
―정확하네, 맹약 기사단 측에서 왕실 정보대의 정보 수집 활동을 눈치챈 것 같다고 하더군. 계속 기밀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일정 위치에 있는 귀족들이나 지휘관들에게 맹약 기사단에 대해 밝히고 주의를 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네. 물론 이건 란테르고 백작의 판단이고 국왕 폐하께서는 확실하게 결정하시지 않으셨다고 하네.
루메이 후작이 길게 설명했다. 설명이 끝났을 때, 유진은 납득하는 표정이 되었다. 왕실 정보대가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밀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이 노출된 상황이라면 기밀을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존재를 밝히고 북부의 귀족들한테 경고하는 게 오히려 맹약 기사단에 의한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미리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신다면, 란테르고 백작도 자네한테 이 사실을 알릴 생각인 것 같더군.
“이해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경계는 넘었는가?
“아직입니다만, 접선 장소를 변경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접선 장소의 변경이라…… 그렇군, 스톤 골렘의 공격을 받고 이동 경로를 바꾼 겐가?
역시 루메이 후작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가 빠르다.
“그렇습니다. 이동 경로를 바꿀 필요성이 있는 것 같아서 변경했습니다.”
―변경된 경로를 알려 준다면 그쪽 경계로 호위대를 보내겠네. 유젤키아 영지군은 거기서 내 부하들과 교대를 하면 될 것이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루메이 영지군이 지벨 백작령의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지벨 백작을 따르는 유젤키아 자작의 기사들 또한 평시에는 루메이 후작령에 진입할 수 없다. 루메이 후작은 ‘교대’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유젤키아 영지군이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은유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호위대의 책임자는 할리드 벨로인 남작이라네.
이어서 루메이 후작은 할리드 벨로인 남작이 사용하는 깃발과 갑주 차림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내 딸을 부탁하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이올라는 저한테 소중한 동료니까요. 최선을 다해서 지키겠습니다.”
―유진 경, 자네의 활약은 많이 전해 들었네. 자네를 믿겠네.
루메이 후작이 말했다. 유진은 이미 루벤 왕국의 북부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오크 전쟁 군주를 물리치고, 오염된 정령기사를 격퇴한 젊은 금패 용병에 대한 소문은 흔치 않기 때문에 빨리 퍼질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유진이 다시 한 번 확답하자 그제야 루메이 후작은 안심하는 표정으로 마법 통신을 종료했다. 호위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진은 할리드 벨로인 남작의 깃발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