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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스트리머-114화 (114/175)

독식하는 스트리머 (114)

“폴리냐!”

날카로운 음성이 공기를 찢을 기세로 울려 퍼졌다. 맹약 기사단의 루벤 북방 지부를 이끄는 9명의 간부 중 하나이자 ‘환술사’라고 불리는 타니아의 목소리였다. 디엘론에 이어 비장의 카드나 다름없었던 돈바스마저 실패했다는 보고를 전해 들은 그녀는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

분노와 짜증으로 가득한 절규 맺힌 고함 소리에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라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폴리냐로 타니아를 모시는 충직한 부관이다.

“타니아 경, 부르셨습니까?”

방 안은 엉망이었다. 창문은 다 박살 나 있고, 깨진 유리가 바닥에 널려 있다. 멀쩡한 가구가 하나 없을 정도였지만, 폴리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번이나 겪은 거처럼 익숙하게 깨진 유리 조각들을 마법의 바람으로 치워 내고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박살 난 창문 앞에 서 있는 타니아의 바로 앞까지 걸어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올렸다.

“폴리냐…….”

“네, 저 여기 있습니다.”

“설마 돈바스가 실패할 줄은 몰랐어.”

타니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폴리냐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타니아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폴리냐는 부관으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타니아를 모셔 왔다. 지금은 침묵을 지키는 게 일신의 안위를 위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이를 행한 것이다.

비록 지금은 부하들의 연이은 실패로 인해 멘탈이 무너졌지만, 그녀는 본래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냐가 부관의 신분으로 섣부르게 조언을 하거나 위로를 시도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폴리냐는 자신의 주제는 물론이고 타니아의 성격 또한 잘 알고 있다.

타니아에게 있어서 부관은 조언을 해 주는 게 아니라, 상관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충신에 가까운 존재다. 폴리냐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이 꼬여 버렸어.”

꼬여도 제대로 꼬였다. 디엘론의 실패까지는 그나마 용인될 수 있는 선이었지만, 이번에 돈바스가 실패한 것은 맹약 기사단 내에서 타니아의 입지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제기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타니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를 바득 갈았다. 그동안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고속으로 승급했을 뿐만 아니라 맹약 기사단 내에서도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맹약 기사단 전체는 무리라도 루벤 북방 지부 한정으로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이제는 모두 부질없다. 최근의 연이은 실패는 타니아를 실각 위기까지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익숙하지 않은 실패를 두 번이나 겪었을 뿐만 아니라 실각의 위기까지 찾아오자 냉정한 철혈의 존재 같던 타니아의 멘탈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타니아 경,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조금 전에 올슨 경이 방문하셨습니다.”

“올슨 경이 찾아 왔다고?”

올슨이 찾아 왔다는 폴리냐의 말에 타니아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맹약 기사단 내에서도 실각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 시점에,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올슨의 방문은 솔직하게 말해서 달갑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올슨 경이 찾아 왔습니다.”

“대체 언제?”

“약 5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왜 나한테 바로 알리지 않았지?”

“죄송합니다. 사전에 연락을 받지 못한 탓에 반응이 늦었습니다. 올슨 경의 방문 사실은 저도 방금 보고 받았습니다.”

타니아의 신경질적인 물음에도 불구하고 폴리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타니아가 이렇게 예민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전무하다는 표현이 붙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름의 대응 방식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아, 일단은 알겠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타니아는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놓인 스태프를 집어 들었다.

짧은 캐스팅과 함께 마법을 완성하자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박살 난 창문으로 다시 모여 들러붙었고 부서진 가구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복원되었다. 역시 마법의 힘은 위대하다.

엉망이었던 방 안을 마법으로 단숨에 정리한 타니아는 깔끔해진 주변을 훑어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폴리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올슨 경은 어디에 있지?”

싸늘한 기운이 묻어 나오는 차가운 음성이었다. 현재 타니아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말끝을 묘하게 떨었다.

“올슨 경은 지금 저택의 응접실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폴리냐는 ‘점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올슨을 불청객으로 인식하고 있는 타니아에게 은근히 동조해 주는 것이었다.

“응접실이라…… 알겠어, 일단 만나 봐야겠네.”

“네, 알겠습니다.”

폴리냐가 뒤로 물러나고 타니아는 저택 안의 응접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늦은 자정이 넘은 시각, 저택 안은 조용했다.

길게 이어진 낡은 복도는 온통 어둠으로 가득했고 낡은 등불 몇 개가 간신히 최소한의 조명이 되어 칠흑 속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 줄 뿐이었다.

응접실은 복도의 끝에 있었다. 복면을 쓰고 검은 갑옷을 입은 채 허리에 길쭉한 장검을 찬 남자가 응접실과 연결된 문 앞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는 평기사가 아니라 하수인 계급의 전투원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타니아와 폴리냐를 발견하고는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타니아 경, 올슨 경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수인의 말에 타니아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뒤에 선 폴리냐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폴리냐.”

“네, 타니아 경.”

“올슨 경은 나 혼자 만날 거니까, 너는 여기서 대기해.”

“알겠습니다.”

폴리냐의 대답을 들은 타니아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검은 가면’을 고쳐 쓰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응접실 내부는 넓었다.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머금은 가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올슨은 중앙의 직사각형 탁자 옆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타니아를 발견하고는 오른손을 살짝 흔드는 것으로 인사했다. 물론 의자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채였고, 그런 행동은 예민함 수치가 최고조에 닿아 있는 타니아의 심리를 불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타니아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으나 검은 가면을 쓰고 있는 탓에 올슨은 그녀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오랜만이야, 타니아 경.”

“올슨 경, 오랜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데?”

“미안하지만 그건 내 마음이야, 내가 오랜만이라고 말하면 그게 곧 옳은 말이라고.”

정말 어이가 없는 태도다. 타니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올슨과 언쟁이 붙으면 극히 피곤해진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더 이상 태클을 걸 생각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나도 네가 옳다고 생각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군. 전혀 새삼스럽지 않아.”

올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보며 타니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올슨과는 대화를 이어 갈수록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예민한 상태라서 그런지 유독 감정을 다스리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타니아는 타인의 앞, 그것도 자신과 우호적이지 않으며 대립 관계에 있는 경쟁자 앞에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낼 만큼 하수는 아니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감정을 진정시키고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다시 온 거지?”

“꼭 용무가 있어야 하나?”

“우리 사이가 용무도 없이 서로 안부나 묻자고 만날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거야?”

“타니아 경, 너는 정말 눈치가 빨라. 그래서 내가 널 싫어하는 거야.”

“용무가 있다는 뜻이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전달하고 퇴장했으면 하는데 말이야.”

타니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올슨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그렇게 원한다면 바로 알려 주지.”

올슨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타니아 경, 내가 이런 외진 곳까지 또 찾아온 이유는 네게 지부장님의 경고를 전하기 위해서다.”

“경고라고……?”

단어 선정이 심상치 않다. 타니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정확하게 들었다.”

“무슨 경고를 말하는 거지?”

“지부장님께서 네게 마지막 기회를 하사하셨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죽이라는 지령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마지막 기회다. 네 위치를 지키고 싶다면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거야.”

마지막 기회라고? 지부장이 마지막 기회를 줬다는 말인가? 맹약 기사단에서 마지막 기회는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며 일종의 경고나 다름없다. 만약 마지막 기회라고 주어진 임무에 실패한다면 타니아는 모든 것을 잃을 뿐만 아니라 맹약 기사단의 간부들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마, 마지막 기회라고? 그럼 내가 기존에 진행하고 있던 계획들은? 그건 다 어떻게 되는 거지?”

“당연하지만 내가 이어서 진행할 예정이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보다 너는 지부장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해.”

올슨의 말에 타니아는 불안함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 * *

란테르고 백작은 맹약 기사단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우려했다. 그는 백색 교단의 중앙청과 유젤키아 백작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그 결과, 백색 교단은 자존심을 굽히고 외부 호위를 조금 더 늘린다는 결단을 내렸고 유젤키아 자작은 루센버그 준남작이 지휘하는 기사들을 추가 호위로 붙여 줄 것을 약속했다. 유젤키아 도시의 신전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 35명도 호위로 합류했다.

루센버그 준남작과 25명의 기사들도 호위대에 편성되었고 그들은 이동 경로를 정하기 위해 영주 저택의 응접실에 모였다.

기사들의 대표로 루센버그 준남작이 참여했고 성기사들의 대표로는 엘란이 참가했다. 엘란은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전투가 끝난 직후보다는 많이 회복한 것으로 보였다. 마지막으로 유진은 호위대의 지휘관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동 경로를 정해야 합니다.”

모두 모였을 때 유진이 먼저 주제를 꺼냈고 논의가 시작되었다. 도로를 이용하다가 크게 화를 입은 엘란이 이번에는 노스로드 숲을 횡단하자고 뒤늦게 주장했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인원이 너무 많아서 노스로드 숲을 이용해도 은밀한 이동이 보장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최종 결정권은 유진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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