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10)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루센버그 준남작님.”
“늦어서 미안합니다. 전투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지했지만, 결계 때문에 전장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벨리오 루센버그 준남작은 유진과 일행들이 피의 항전을 이어 가는 동안 신속하게 개입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루센버그 준남작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가 늦장을 부리거나 어설프게 딴짓을 하다가 전장에 늦게 도착한 게 아니라 맹약 기사단의 환술사가 펼친 결계 때문에 늦은 것을 유진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루센버그 준남작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루센버그 준남작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결계가 없었다면 더 일찍 도착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진 경,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유진의 말에 루센버그 준남작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이어서 그는 유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일행들의 모습을 살폈다. 중상자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인 레이나 덕분에 중상자는 없었다. 선두에서 가장 치열하게 적들과 맞섰던 드레인과 엘란 같은 경우에는 각각 한 번씩 치명상을 입고 말았지만, 레이나가 다량의 신성력을 소모한 신성 마법으로 그들을 치유해 준 덕분에 지금은 가벼운 부상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루베니아 연대기의 설정상 뱀파이어는 ‘언데드’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신성력을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성 마법의 치유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드레인이 백색 교단의 신전에 출입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그런 설정과는 별개로 그가 적혈교의 성기사단장 출신이다 보니 타 교단의 신전 방문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중상자는 없는 모양이군요.”
루센버그 준남작의 말에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중상자는 없으나 전사자가 너무 많았다. 엘란을 제외한 성기사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고 적의 매서운 공세 앞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다.
12명의 성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습 성녀인 레이나를 제외하면 호위로 붙은 성기사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엘란은 멘탈이 완전히 무너진 것 같은 몰골이었다. 그의 공허한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는 여러 복잡한 심경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멘탈이 박살 난 엘란의 모습에 그 누구도 전사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엘란의 심리적인 부담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전장의 뒷정리는 제 부하들한테 맡겨 주세요.”
“감사합니다, 루센버그 준남작님.”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선 도시로 안내하겠습니다. 유젤키아 자작님께서는 잠시 외출 중이십니다. 나가실 때 제게 백색 교단의 손님이 찾아오면 영주성의 저택에 숙소를 제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센버그 준남작의 설명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젤키아 자작이 미리 언질을 해 두고 외출한 덕분에 유진 일행은 도시에서도 가장 안전하다고 볼 수 있는 영주성 안에 위치한 영주의 저택에서 임시 숙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루센버그 준남작의 배려 덕분에 일행들이 배정된 방은 서로 붙어 있었다.
외부에서 습격이 발생하거나 암살 시도가 있다면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각자의 방 사이에 간격이 좁았다. 또한 일행의 안전을 위해 저택의 경계 태세가 강화되었다. 순찰 동선이 추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진 일행이 머무르는 3층 복도에는 중무장한 기사 4명이 배치되었다.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멘탈의 손상이 심한 것인지 저택에 도착해서도 계속 불안해하면서 손까지 덜덜 떨고 있던 엘란은 결국 식당에서 일행들의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자리에 일어나 자신이 배정받은 방이 있는 3층으로 먼저 올라갔다.
바이올라와 레이나는 물론이고 드레인과 유진조차 격렬한 전투로 인해 누적된 피로로 지쳐 있었지만, 부하들을 전부 잃은 엘란은 유난히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엘란 경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건 처음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레이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드레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가서 한마디 위로라도…….”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레이나 경.”
유진은 레이나의 말을 끊었다. 중간에 말이 잘렸지만 레이나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짜증 섞인 말투를 쏟아 내는 대신에,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건 힘들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격한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잠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배려해 주는 게 좋습니다.”
“듣고 보니까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유진의 설명에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납득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일행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모두 피로도가 극심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휴식을 취하는 데 집중하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내일 오전에 의논하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온 유진은 환복을 끝내기 전에 새로운 스킬을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상점 창’을 열었다.
[보유 포인트: 12,400.]
―투신의 검무(B)
―진홍의 뇌격(A)
―명가의 운명(B)
상점 창을 열기 무섭게 눈에 보이는 것은 그동안 후원으로 모은 12,400의 포인트와 유용해 보이는 3개의 추천 스킬이었다.
오늘 있었던 전투에서 유진은 다수의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스킬의 필요성을 느꼈다. ‘진홍의 뇌격’이라는 이름이 붙은 스킬은 붉은 번개가 깃들인 검을 휘둘러 적들에게 뇌격을 날려 보낼 수 있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A랭크에 해당하는 스킬이라 현재 유진이 보유하고 있는 포인트로 구매하는 것은 무리였다.
‘투신의 검무 정도면 무난하겠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진은 ‘투신의 검무’라는 이름이 붙은 스킬을 구입했다. ‘투신의 검무’는 ‘진홍의 뇌격’처럼 치명적인 광역 공격을 전개하는 스킬은 아니다.
마치 칼춤을 추는 것처럼 무아지경으로 사방에 검을 휘두르는 게 이 스킬의 특징이었는데, 정령검이나 오러 블레이드와 함께 사용하면 A랭크 스킬에 근접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스킬 구매를 끝낸 유진은 확인을 위해 상태 창을 열었다.
[유진.]
―직업: 정령기사(히든 클래스)
<보유 스킬>
―만독불침(A)
―정령검(A)
―정령군주의 호흡(A)
―강철이 깃들인 육신(A)
―원소 부여(B)
―원소 참격(B)
―살기 방출(B)
―투신의 각오(B)
―투신의 검무(B)
―빛의 투창(B)
―선천적 마나 친화(B)
―오러(B)
―일검필살(B)
―루벤 왕립 기사 검술(C+)
―불굴의 전사(C)
―레인저의 직감(C)
―중급 궁술(D)
―사냥꾼의 시야(B)
―상급 기척 죽이기(C)
―상급 화염 저항(C)
―중급 방패술(D)
―선봉 기사의 임전태세(B)
―최상급 기척 감지(B)
―주시자의 눈(B)
이어서 그는 마나 홀의 상태도 살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마나 상태 창.”
상태 창을 열자 눈앞에 마나 수치가 선명하게 보였다.
[유진의 마나 홀.]
마나: 4,500/4,500.
불과 얼마 전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마나 수치는 4,100 정도였지만 지금은 400이 상승하여 4,500을 찍었다. 그동안 여유 시간이 있을 때마다 마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성과였다. 마나 홀의 확인을 끝낸 유진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왠지 오늘 밤은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로그아웃.”
유진은 로그아웃을 하고 채팅 창이 비활성화된 것을 확인한 뒤, 환복을 하고서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 * *
짙은 어둠으로 가득한 어느 숲속.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늪지대를 앞에 두고서 검은 가면을 쓰고 같은 색의 로브를 걸친 여인이 철로 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진홍색의 가면을 쓴 남성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좋은 아침이야, 타니아 경.”
“올슨 경,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닐까?”
“내가 방금 일어났으니까 지금은 아침이야. 나는 그렇게 정했어.”
“정말 어이가 없네.”
타니아는 짧은 한숨을 내뱉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올슨이라고 불린 남자는 맹약 기사단의 루벤 북방 지부를 이끄는 9명의 간부 중 한 명이다.
“그나저나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는 죽였겠지? 지벨 도시를 장악하지 못한 현 상황에서 루벤 왕국 북부에 대한 혼란을 야기시키려면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는 지벨 백작령에서 죽어야 해.”
올슨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타니아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친우보다는 오히려 적대적인 경쟁 관계에 가깝다. 오늘 타니아를 찾아온 이유도 그녀를 지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루벤 왕국의 북부에 대한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온 것이었다.
“지부장님이 시킨 거야? 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일단 내 질문에 대답하는 게 먼저야.”
“돈바스를 보냈어. 조만간에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돈바스 경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단독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수습 성녀를 호위하는 인원은 고용된 용병들을 더하면 A랭크만 해도 4명이야.”
“다른 평기사들도 충분히 파견했어.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제 더 이상 나는 실패하지 않아.”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만큼 타니아는 돈바스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올슨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는 오히려 자신감을 드러내는 타니아를 보며 조소를 흘렸다.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
“돈바스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해? 도발하는 것 같은데?”
타니아가 쏘아붙였다. 돈바스는 맹약 기사단의 루벤 북방 지부에 속한 평기사 중에서도 뛰어난 전투력과 상황 판단 능력을 가진 우수한 인재로 타니아가 가지고 있는 소수의 ‘히든 카드’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올슨의 냉담한 반응과 불신으로 가득한 발언은 타니아로서는 도발로 받아들일 만했다.
“도발로 들려?”
“그럼 이게 도발로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해? 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비가 넘치는 마도사였구나?”
“나름 불살주의야.”
“다 불태워 버리겠다는 뜻이겠지.”
타니아의 말을 올슨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화가 끝나고 침묵이 이어지고 있을 때 검은 갑옷을 입은 평기사가 달려와 타니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돈바스 경이 전사했습니다! 그가 목숨을 잃고 잔존 병력이 공세를 펼쳤으나 결국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평기사의 보고에 타니아는 할 말을 잃었고,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올슨은 어깨를 들썩이며 마구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