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09)
28장.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불길한 칠흑 같은 액체가 돈바스의 상체를 뒤덮자 그의 몸을 불태우고 있던 뜨거운 불꽃이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크아아아아아!”
돈바스가 괴성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에 유진은 그를 경계하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어쩌면 강화 효과가 있는 물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그건 아니었다. 돈바스가 마구 괴성을 지르고 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변화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화염을 진압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평범한 물약이었던 것 같다.
괴성을 지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물약이 상체를 불태우고 있던 화염을 진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끔찍한 고통을 이겨 내지 못 한 탓에 괴성이 쏟아져 나왔던 모양이다.
안전하다고 판단한 유진은 다시 돈바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조금 전에 ‘일검필살’ 스킬을 사용하면서 다량의 마나를 소모하기는 했지만, 아직 마나 홀이 바닥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상대는 많이 지쳐 있다.’
유진의 싸늘한 시선이 돈바스에게 닿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돈바스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상체가 깊이 베였을 뿐만 아니라 정령의 힘으로 만들어진 화염이 두꺼운 철제 갑옷을 반쯤 녹이는 바람에 육신과 갑옷에 흉물스럽게 들러붙어 있었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마치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흉측한 괴물 같은 외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비를 베풀 수는 없다.
고인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루베니아 연대기를 많이 플레이한 유진은 게임 속 세계라도 원활한 클리어를 위해서라면 적대 캐릭터한테는 절대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되며 후환을 남기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방장님! 슬슬 마무리하시죠!
―이제 체력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ㄹㅇㅋㅋ.
―손쉽게 처치 가능!
―인정합니다.
시청자들이 유진을 재촉했다. 그들에게 루베니아 연대기는 그저 게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하앗!”
기합과 함께 유진은 땅을 박차고서 돈바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체가 완전히 새까맣게 타 버린 돈바스는 힐링 포션을 사용할 틈도 없이 유진과 맞서기 위해 대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대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매서웠으나 정확도는 형편없었다. 뜨거운 화염이 돈바스의 상체를 태울 때 그의 각막마저 크게 손상을 입혔기 때문이었다. 즉, 지금 돈바스는 각막의 손상 때문에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저 기척으로 유진의 접근을 알아채고 경로를 예상하여 대검을 휘두른 것이다.
콰앙!
암흑의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대검이 지면을 타격했다. 묵직한 소음과 함께 흙먼지가 솟구쳤다. 하지만 유진의 몸에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대검에 닿는 느낌이 ‘살덩이’를 잘라 내는 것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돈바스는 땅에 처박힌 대검을 서둘러 회수했다.
회수와 동시에 두 번째 검격을 준비하는 돈바스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유진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쿨럭!”
유진이 내찌른 검이 돈바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A랭크의 실력자라고 해도 ‘인간’의 영역에 있다. 심장이 크게 손상을 입으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돈바스는 입 밖으로 시뻘건 피를 왈칵 토해 냈다. 유진이 심장을 관통한 검을 뽑아내자 돈바스는 힘 없이 쓰러졌다.
―처치 완료!
―해치웠나?
―이번 활약을 루벤 국왕이 높게 평가!
―매우 좋았습니다.
―이걸로 당장은 안심일까요?
시청자들은 유진의 활약에 감탄했다. 힐끔 채팅 창을 살핀 유진은 돈바스의 목숨이 완전히 끊겼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방어 진형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마차가 위치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제기랄!”
유진은 욕설을 내뱉었다. 적들은 200여 명가량 남아 있었고, 마차를 중심으로 삼은 방어 진형은 완전히 박살 난 상태였다. 성기사들은 엘란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다행히 바이올라와 드레인 그리고 레이나는 지쳐 있을 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더 이상 버티는 건 무리야. 일행을 먼저 구해야 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진은 앞을 막는 맹약 기사단의 하수인들을 베고 찌르며 일행들과 합류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렸다.
뿌우우우우!
중간쯤 거리를 좁혔을 때였다. 어디선가부터 시작된 뿔 나팔 소리가 유진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뿔 나팔 소리?
―고인물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제 경험에 의하면 이건 유젤키아 영지군에서 사용하는 뿔 나팔의 소리인 것 같습니다.
―유젤키아 영지군의 뿔 나팔 소리 맞는 것 같은데요?
―제 생각도 같음.
―결계가 유지 중이었던 거 아니었어요? 영지군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임?
―조금 전에 환술사가 죽으면서 결계가 해제된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시청자들의 추측대로였다.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이는 맹약 기사단의 환술사였다. 그가 유진에게 목숨을 잃게 되면서 정상적으로 공급되어야 할 마나가 사라지자 자연히 결계도 더 이상 유지되지 않고 해제된 것이다.
뿌우우우우!
뿔 나팔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유젤키아 영지군이 사용하는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기세등등하게 공세를 펼치던 하수인 계급의 전투원들도 크게 당황했다.
“유젤키아 영지군의 뿔 나팔 소리입니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세를 유지합니까? 아니면 퇴각합니까?”
“제기랄! 잠깐만 기다려 봐!”
최대한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하수인들을 지휘하는 중간 위치의 지휘관들은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모든 지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돈바스와 그다음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평기사들이 대부분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중간 지휘관들이 스스로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단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막중한 책임감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고 서로에게 결정을 미루기 바빴다. 결국 그들의 공세가 주춤한 틈을 타 유진은 레이나와 바이올라 그리고 드레인과 엘란과 함께 맹약 기사단의 포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위대한 탈주! 축하드립니다!
―성기사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게임 오버는 피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고 볼 수 있겠네요.
―ㅊㅋㅊㅋㅊㅋ!
―오늘도 살아남았다!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유진이 일행들과 함께 포위망을 탈출하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몇몇 지휘관들이 황급히 명령을 전파했다.
“추, 추격하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이대로는 다 죽는다!”
본격적인 추격이 시작되려는 찰나, 낮게 솟은 언덕 위로 철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나타났다. 유젤키아 자작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세찬 바람에 펄럭인다.
유젤키아 자작의 가신이자 영지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벨리오 루센버그 준남작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 끝에 상황 판단을 끝마쳤다.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가 유젤키아 도시를 향해 이동 중이라는 사실을 이미 전달받았기 때문에 상황 판단이 신속할 수 있었다. 그는 두 눈을 빛내며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들었다.
“유젤키아 자작가의 용맹한 기사들이여! 돌격하라!”
힘찬 외침과 함께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요동치는 소음이 퍼진다. 30여 명의 기사들이 선두에서 말을 달렸고 100여 명의 기병이 뒤따랐다.
“유젤키아 영지군입니다!”
“결계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제, 제기랄!”
유젤키아 영지군의 갑작스러운 전장 개입에 맹약 기사단의 하수인들은 동요했다. 하지만 지휘관은 여전히 판단이 느렸고 제대로 된 지휘관의 부재로 하수인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유젤키아 영지군의 기사단과 기병대가 그들을 덮쳤다.
기사들과 기병대가 맹약 기사단의 잔당들을 처리했다. 하수인들은 처음에는 유젤키아 영지군과 맞섰으나 이내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나선 유젤키아 영지군의 기사들과 기병대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숫자였기 때문에 남은 하수인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맞선다면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다만, 전투가 벌어진 장소가 유젤키아 도시 근처라는 게 문제였다.
결계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면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 지금은 결계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단시간 내에 전투를 끝맺지 못한다면 도시에서 영지군 병력을 추가로 보낼 가능성이 컸다. 당장 눈앞의 유젤키아 영지군 병력까지는 이길 수 있을 테지만, 도시에서 지원군을 보낸다면 필패다.
살아남은 지휘관은 후일을 위해 전력을 최대한 보전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휘하의 하수인 계급 전투원들한테 퇴각을 명령한 것이었다.
“적들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선두의 기사가 적들이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힘찬 음성으로 보고하자 유젤키아 영지군의 기사들과 기병들이 환호했다. 그들이 승전의 기쁨에 취해 있을 때 벨리오 루센버그 준남작은 유진과 그의 일행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유진은 천천히 다가오는 루센버그 준남작을 향해 ‘주시자의 눈’을 발동했다.
[준남작 벨리오 루센버그(A) 이명: 없음.]
―대대로 유젤키아 자작 가문에 충성을 바친 루센버그 준남작 가문의 현 가주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검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기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상당히 젊은 나이에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몬스터 토벌이나 도적 토벌 등으로 실전 경험을 풍부하게 쌓았습니다. 유젤키아 자작 가문에 충성하기 위해 쉬지 않고 수련을 거듭하고 실전 경험을 쌓은 덕분에 그는 마침내 영지 기사단을 통솔하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고 어렵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단순한 사람이지만 전투와 전술에 대한 식견은 나름 깊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센버그 준남작에 대한 캐릭터 설명이었다. 짧고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는 길다. 다만, 적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어느새 루센버그 준남작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유진의 앞에 도달하자 말에서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진의 바로 앞까지 걸어와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반갑습니다, 유진 경. 저는 유젤키아 영지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벨리오 루센버그 준남작이라고 합니다. 수습 성녀를 목숨을 걸고 지켜내신 분투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오호? 준남작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귀족인데, 자유 기사한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라니 이건 진귀하군요.
―그만큼 방장님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걸 의미하겠죠?
―ㄹㅇㅋㅋ 루베니아 연대기 세계관 자체가 귀족들이 콧대가 너무 높음.
시청자들의 채팅을 확인한 유진은 다시 루센버그 준남작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