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07)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무려 8백여 명을 넘는 숫자였다. 그에 비해 수습 성녀를 지키기 위해 백색 교단에서 붙여 준 성기사들의 숫자는 엘란을 포함하여 13명에 불과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루벤 국왕과 지벨 백작으로부터 의뢰금을 받고 합류한 유진 파티를 포함해도 고작 16명이다. 8백여 명의 적대적인 무장 집단을 상대로 수습 성녀 레이나를 완벽하게 지키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백색 교단의 성기사들은 최선을 다해 적들과 맞서 싸웠지만, 그들은 절망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둘씩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수습 성녀 레이나가 부상자들을 신성 마법으로 치료했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자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성기사들은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 30분은 잘 버텨 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목숨을 잃는 이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대략 1시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마차를 중심으로 한 방어선에서 두 발로 서 있는 성기사들의 숫자는 이제 겨우 7명에 불과했다. 엘란을 포함한 성기사들 중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제기랄!”
바로 뒤에서는 바이올라가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는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쉴 새 없이 공격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벌써 상당량의 마나를 소모한 것인지 바이올라의 안색은 심각하다는 표현이 붙을 정도로 많이 창백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바이올라와 레이나를 지키고 있는 드레인과 엘란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단 전투에서는 다수의 인원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전투 마도사와 우군 세력의 피해를 회복시킬 수 있는 사제를 최대한 빠르게 제거할 필요가 있다.
유진의 일행들을 습격한 맹약 기사단의 하수인들을 뒤에서 지휘하는 평기사 또한 그런 기본적인 전술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소 무리해서라도 바이올라를 최우선적으로 제거하려고 계속해서 하수인 계급의 전투원들을 밀어 넣고 있었다.
“바이올라! 마나 잔량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유진의 물음에 바이올라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오래는 못 버텨. 포션으로 마나를 회복하는 속도보다 마법으로 마나를 소모하는 속도가 몇 배나 빨라.”
몇몇 게임이나 웹소설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등의 매체에서 ‘마나 포션’은 고성능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루베니아 연대기 세계관에서는 아니었다.
루베니아 연대기 세계관 설정상 ‘마나 포션’은 ‘힐링 포션’에 비해 효능이 좋지 않다. 사실상 즉효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힐링 포션’과는 다르게 ‘마나 포션’은 섭취하더라도 마나가 느리게 회복될 뿐만 아니라 서로 중첩도 되지 않고, 무엇보다 최상급의 범주에 있는 고급품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 병을 다 비워도 회복량은 크지 않다.
공식적인 설정이 이렇다 보니 마도사들은 전투에 대비하여 마나 포션을 몇 개 챙겨 두기는 하지만, 비축된 마나 포션을 믿고 마법을 난사하는 것보다는 마나의 소모를 최대한 피하며 안정적으로 전투를 이어 가는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바이올라는 마나의 소모와 회복 속도를 신경 쓰며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전황이 여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사방에 대고 공격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주군! 이대로는 얼마 못 버팁니다!”
드레인의 고함 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적들을 향해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던 유진은 드레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멀리서 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버린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마차를 중심으로 형성한 방어 진형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유진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요.
―ㅇㄱㄹㅇ ㅋㅋㅋㅋ.
―이게 바로 인해전술이라는 겁니까?
―그래도 절반은 처리한 것 같아요.
―바꿔 말하면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음.
―진짜 너무 많네요. 적들 수가 왜 이렇게 안 줄어드는 거예요?
―대부분이 B랭크인 최정예라서 그런 것도 있고, 애초에 방장님 쪽 인원이 너무 부족해서 전력 차이가 압도적이라 그런 거예요.
―ㄹㅇㅋㅋ 솔직히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이만큼 처치한 것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리였음.
채팅 창이 소란스럽다. 하지만 유진은 전투에 온 신경을 쏟아 내고 있는 탓에 잠시라도 채팅 창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드레인!”
마차 옆으로 복귀한 유진은 적들을 향해 붉은색의 오러 블레이드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드레인을 불렀다.
“네! 주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길면 30분! 운이 없다면 20분이 지나기 전에 성기사들이 유지하고 있는 방어 진형이 완전히 무너질 겁니다!”
냉정한 분석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엘란을 포함하여 성기사들이 고작해야 5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2, 30분을 더 버틴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지극히 낙관적인 예측이었다.
유진은 다가오는 적들을 베었다. 한 편으로는 불리하게 기울어 가고 있는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만한 해결책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신중한 고민 끝에 떠오르는 ‘해결책’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적들을 통제하는 지휘관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것이다.
“드레인! 적 지휘관들의 위치! 파악할 수 있겠나?”
“지휘관을 특정하는 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진에 섞여 있는 A랭크들의 위치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드레인의 대답에 유진은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 보니, 굳이 지휘관을 특정하지 않더라도 A랭크만 찾아내서 죽인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B랭크가 전투 인원의 주축이라면 지휘권을 잡은 이는 A랭크일 가능성이 크다. 신속하게 판단을 끝낸 유진은 눈앞에서 찔러 들어오는 창을 회피하는 것과 동시에 드레인을 불렀다.
“드레인!”
“네! 주군! 말씀하십시오!”
“A랭크들! 위치 확인해! 내가 간다!”
“알겠습니다!”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드레인은 유진의 요청을 성실하게 이행했다. 그는 적들을 향해 붉은 오러를 흩뿌리며 적진의 인파에 섞여 기회를 엿보고 있는 A랭크들의 위치를 파악했고 이를 유진한테 전했다.
“확인했다!”
드레인이 위치를 파악한 A랭크 실력자들은 총 셋이다. 그들 외에 더 많은 수의 A랭크 강자들이 전장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드레인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철저하게 기척을 숨기고 있는 탓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들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무리였다.
“일단 가까운 놈부터 처리한다.”
유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바로 앞을 막아선 하수인 계급의 전투원 넷을 동시에 베어 버렸다.
일순간이지만, 적들의 기세가 꺾인 틈에 유진은 푸른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빛나는 장검 안으로 다량의 마력을 불어 넣었다. 스킬을 발동하기 위함이었다.
[액티브 스킬, ‘정령검’를 사용합니다.]
[오러 블레이드에 부여할 정령의 속성을 선택해 주십시오.]
“화염.”
[오러 블레이드에 화염 속성의 정령을 부여합니다.]
오러 블레이드에 화염 속성의 정령이 깃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뜨거운 화염의 오러 블레이드가 맹약 기사단의 진형을 뒤흔들었다.
―속 시원하네요! 이제야 방장님답습니다!
―엄청나다!
―사이다 쭉쭉 들어오는 중! 이대로 다 쓸어 버립시다!
―이게 바로 정령검이다! 희망편!
―이런 사기급 스킬을 왜 지금까지 안 쓴 건가요?
―도와줘요! 설명 요정!
―설명 요정 역할을 수행하자면, 정령검은 마나 소모가 엄청난 스킬이라서 장기전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방장님이 잘 판단하신 겁니다
―ㄹㅇㅋㅋ.
유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화염의 파도가 일어나 적들을 덮쳤고 시원시원한 전투 장면에 시청자들을 환호했다. ‘정령검’에 대해 잘 모르는 극히 일부 시청자들이 왜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표했지만 다행히 고인물에 속하는 설명 요정들이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크아아악!”
하수인 계급의 전투원들은 ‘정령검’까지 사용한 유진의 돌진을 막지 못했다. 유진은 수많은 적을 뚫고서 첫 번째 A랭크 실력자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을 줄이야. 제법이군.”
호기롭게 장검을 뽑으며 방패를 들어 올리는 그는 맹약 기사단에서도 평기사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전투원이었다.
―보스인가!
―중간 보스급인 듯?
―ㅇㅇ 중간 보스급인 것 같아요.
―A랭크이면 나름 까다로운 상대라고 볼 수 있죠.
―인정합니다.
시청자들의 호들갑 속에서 유진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대는 A랭크의 강자, 어중간하게 상대한다면 시간만 버릴 뿐이다.
‘처음부터 최대 전력으로 간다.’
현명한 판단이다. 적어도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A랭크들을 처치하고 마차로 복귀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일행들이 위험하다.
스킬 발동을 위해, 유진은 침착하게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액티브 스킬, ‘일검필살’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숙련도가 높습니다. 출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출력 조절 완료. 최대 전력의 30%입니다.]
이미 많은 마나를 소모한 상태다. 때문에 30% 이상으로 출력을 올리면 오히려 위험하다. 철저한 계산 끝에 그는 스킬을 발동했고 찰나의 순간 뻗어 나간 참격은 맹약 기사단의 평기사를 방패와 함께 반으로 갈라져서 죽게 만들었다.
―반으로 갈라져서 죽었다!
―와우!
―A랭크가 이렇게 약했나?
―방장님이 센 거예요? 아니면 저 캐릭터가 약한 걸까요?
―도와줘요! 설명 요정!
―설명 요정입니다. 객관적으로 분석하자면 둘 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포인트 후원도 몇 차례 이어졌다. 유진은 채팅 창을 힐끔 확인하고는 다음 표적을 향해 움직였다. 이번에는 다섯 개의 투창이 들어 있는 가방을 메고 있는 검은 철갑주의 평기사였다. 그는 유진의 접근을 확인하기 무섭게 등의 가방에서 투창을 뽑아서 던졌다.
평범한 투창이 아니었다. 칠흑의 오러를 머금은 투창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매섭게 날아오는 투창. 하지만 유진은 피하지 않았다.
[아티팩트, ‘보호의 약속’을 사용합니다.]
지벨 백작으로부터 받은 마도구를 사용했다. 백색의 방패가 오러 투창을 막아 냈고 유진은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스킬 사용을 위한 마나를 모았다.
[액티브 스킬, ‘일검필살’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숙련도가 높습니다. 출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출력 조절 완료. 최대 전력의 10%입니다.]
거리가 가까울 뿐만 아니라 상대는 유진이 회피를 포기하고 이렇게 달려올 줄은 몰랐는지 기습에 대비하지 못한 상태라서 최대 전력의 10%면 충분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