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05)
“저, 적습에 대비하십시오!”
엘란이 소리치자 백색 교단의 성기사들은 허리에 찬 장검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당장 검을 뽑아 들지는 않았지만, 무력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성기사들의 경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마부석에 앉아 있던 바이올라가 옆에 놓아둔 자신의 스태프를 집어 들고서 전투 태세를 취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유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바이올라의 옆으로 다가갔다.
“바이올라? 왜 그래?”
“안 좋은 소식이 두 가지 있어. 어떤 것부터 들을래?”
“둘 다 안 좋은 소식이네.”
“고르기 힘든 것 같으니까, 번호로 물어볼게. 1번이랑 2번, 둘 중에 어떤 것부터 들을래?”
심각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해맑은 웃음을 흘리며 선택하라고 농담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는 바이올라의 모습에 유진은 푹!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1번부터 듣죠.
―1번! 1번! 1번!
―저는 2번이 더 좋습니다. 왠지 친근한 느낌이라서요.
―1번으로 고고고고!
채팅 창을 슬쩍 확인했더니, 시청자들은 두 개의 나쁜 소식 중에서 1번을 먼저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사소한 요청을 들어주면 은근히 감동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유진은 바로 옆에 서 있는 바이올라를 바라보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1번으로 할게.”
1번을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채팅 창에서 1번을 연호하는 시청자들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 바이올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선 첫 번째 안 좋은 소식에 대해 말하자면 네가 우려한 것처럼 이 주변은 결계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어.”
왠지 싸한 느낌이 강하게 와닿는가 싶었는데, 역시 결계의 영향력 안에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다른 정보는? 무슨 결계인지 알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계의 규모와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어.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마나의 간섭이랑 유동을 바탕으로 결계가 존재하는 사실을 파악한 게 고작이었어.”
바이올라가 대답했다. 이걸로 두 가지의 안 좋은 소식 중 하나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다.
“남은 하나는?”
“아까 드레인이 대충 500명 이상인 것 같다고 말했잖아.”
“분명 그랬지.”
“내가 대략적으로나마 결계의 규모를 확인하려고 광역 탐색 한 번 돌렸단 말이지.”
“지금 당장 공격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니까, 서론 길게 잡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줄래?”
여정 시작부터 쭉 이어진 긴장의 연속 탓에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져 있다. 온갖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유진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만, 이런 상황 속에서 바이올라가 영양가 없는 서론으로 질질 끄는 걸 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는 서둘러 본론부터 말해 달라고 재촉했다.
“아! 미안해! 쓸데없는 설명을 너무 길게 했네.”
“괜찮으니까, 어서 본론부터.”
“설명 다 생략하고 중요한 부분만 말하자면 지금 우리를 향해 접근 중인 놈들 말이야. 500여 명 규모가 아니라, 1천여 명에 근접한 수준이야.”
1천여 명이라 적의 수가 너무 많다. 바이올라의 보고에 유진은 이를 꽉 악물었다. 부디, 바이올라가 틀리기를 바랐지만 유감스럽게도 드레인 또한 적대적인 접근을 감지한 상태였다. 그들이 모두 착각했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한 명은 왕립 마탑에서 인정한 상급 마도사였으며, 다른 한 명은 생명체의 기척을 읽는 데 특화된 뱀파이어 종족에서도 A랭크라는 높은 경지에 오른 뛰어난 실력자였다. 오히려 그들의 경고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적대적인 세력이 접근 중!
―1천 명이라 이건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그냥 도적떼 1천 아님? 그냥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에요?
―제가 설명하기는 귀찮네요. 그러니까! 도와줘요! 설명 요정!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북부 치안이 악화되었다고는 해도 일개 도적들이 1천 명 넘는 인원을 동원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고, 무엇보다 A랭크에 해당하는 상급 마도사가 까다롭게 여길 만한 결계를 전개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한 놈들이 겨우 도적들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고마워요! 설명 요정!
채팅 창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새로 유입된 소수의 시청자가 루베니아 연대기의 세계관 설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자 흔히 말하는 고인물들이 등장하여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상급 마도사조차 간단하게 해제할 수 없는 결계가 등장한 시점부터 일개 도적 집단의 소행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나름 합리적인 추측이었고, 유진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바이올라.”
“응.”
“아까 네가 말한 1천 명의 적대 세력 말인데 계속 이쪽으로 오고 있냐?”
“오고 있어. 확실하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우리를 포위할 생각인 것 같아. 이쪽으로 직진하고 있는 녀석들이 대부분인데 일부는 넓게 산개해서 포위망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바이올라의 설명에 유진은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예리한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검을 뽑아 드는 유진의 행동에 깜짝 놀란 엘란이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유진 경! 무슨 일입니까?”
“적들이 근접했습니다. 저희는 수적으로 열세입니다.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 하지만 저들이 적대적인 세력이라는 확신은 없지 않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본인 입으로 적습에 대비하라고 휘하 성기사들에게 지시까지 내렸으나, 끝까지 고구마처럼 답답하게 행동하는 그를 보며 유진은 이번만큼은 강하게 의견을 주장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엘란 경! 정체불명의 결계가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희 쪽으로 접근 중인 소속불명의 인원들이 수십, 수백 명도 아니고 1천여 명에 달합니다. 게다가 대놓고 저희를 대상으로 포위망을 형성하는 중이에요. 이게 적대 행동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공격입니까? 당장 머리 위로 화살이 쏟아질 때 검을 뽑을 겁니까?”
유진은 폭풍처럼 몰아쳤고, 엘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진의 말은 전부 옳았다. 틀린 부분이 없어서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저, 저는…….”
“포위망이 완성되고 결단하면 늦어요!”
엘란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유진은 거칠게 고함을 내지르며 다그쳤다.
“다, 다들 다시 말에 탑승하세요! 포위망이 형성되기 전에 최대한 도시와의 거리를 좁히겠습니다!”
몇 번이나 다그치고 재촉하자 결국 엘란은 휘하의 성기사들에게 이동을 지시했다. 당연한 결정이었다. 처음에는 적의 숫자가 500여 명 이하일 것이라 판단하여 하마하고 전투를 준비했지만, 지금은 1천여 명에 근접한 수의 적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들이 더 가까이 접근하거나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도시와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야 했다.
도시 인근에서 전투가 발생하면 성벽이나 망루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들에게 발견될 가능성이 크니 운이 좋다면 유젤키아 도시의 경비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변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결계’의 존재였다.
급박한 상황이라 바이올라가 결계의 종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도시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종류의 결계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도시 경비대의 지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 보는 것이었다. 하마했던 성기사들이 다시 말에 오르고,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그들은 유젤키아 도시를 향해 최대한의 속도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도시의 성벽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진! 아무래도 결계 때문인 것 같아!”
마차의 마부석에서 바이올라가 외쳤다.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조용히 긍정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행렬의 전방과 후방에서 말을 탄 무장 병력들이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말을 탄 이들은 검은 철갑옷과 방패 그리고 기병창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들 중 일부는 말을 타고 기동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소형 석궁을 들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도사라고 하여 무조건 갑옷이 아닌 로브를 입고 있어야 한다는 규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원거리 공격 마법 또한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바이올라! 선제 공격이다! 큰 거 하나 날려!”
“오케이!”
유진의 외침에 바이올라는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인 마차의 마부석에서 마법진을 그리고 주문을 캐스팅하는 것은 난이도가 높은 편에 속하지만 A랭크이자 상급 마도사의 경지에 있는 바이올라에게는 크게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파이어 캐논!”
바이올라는 캐스팅을 끝맺고 시동어를 외치는 것으로 화염계 공격 마법을 완성했다.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이 열리면서 바이올라가 탑승한 마차보다 훨씬 거대한 화염구를 투사했다. 뜨거운 화염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투사체는 정면에서 달려오는 기마병들을 향해 날아갔다.
“마법이다!”
“산개하라!”
전방에서 달려오는 기마병 중에서는 마도사가 없는 것인지 그들은 방어 마법을 사용하는 대신에 피해를 줄이기 위해 산개하는 것으로 바이올라의 화염계 공격 마법에 대응했다.
파이어 캐논은 지면을 강타했지만, 화염구가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불길이 퍼졌고 신속하게 산개하지 못한 기마병들의 몸에 불꽃이 옮겨붙었다. 마나로 만들어진 마법의 화염은 순식간에 그들의 온몸으로 번졌다.
“크, 크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10여 명의 기마병이 목숨을 잃었으나 살아남은 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수습 성녀가 탑승한 마차 행렬을 노렸고 산개하여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전방에서만 100명 가까이 접근 중입니다. 저희 뒤를 노리고 있는 놈들은 대략적으로 150명 정도인 것 같습니다.”
드레인이 바로 옆으로 다가와서 보고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듯 크게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들이 전부는 아니겠지?”
유진의 물음에 드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마 부대는 행렬의 발을 묶기 위한 선봉에 불과합니다. 저희가 기마 부대와 교전함에 따라 기동력을 잃게 된다면 후발로 보병대가 달려올 겁니다.”
“결계 때문에 도시의 지원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해. 이렇게 된 이상,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겠어.”
유진은 어렵게 결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