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04)
지벨 백작령의 북쪽에 위치한 유젤키아 도시에서 대기 중인 맹약 기사단의 평기사, 돈바스는 타니아의 호출을 받고서 그녀와의 마법 통신을 연결했다.
바닥에 그려진 통신 마법진의 위로 타니아의 환영이 생성되었다. 푸른 마나로 이루어진 타니아의 형상은 돈바스를 향해 올곧은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돈바스, 때가 되었다.
타니아의 말에 돈바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드디어 때가 된 겁니까?”
―그래, 때가 되었다.
타니아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섬뜩한 분위기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핏 보면 들뜬 악동의 웃음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사냥을 앞두고 흥분한 포식자에 더 가까웠다.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가 지벨 도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호위는 몇 명이나 됩니까?”
습격을 감행하기 전에 호위의 숫자와 전투력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호위는 백색 교단의 성기사가 13명이고, 고용된 용병이 3명이다. 용병들은 전원 A랭크로 판단되고 성기사들 중에서는 A랭크 1명을 제외하면 전원 B랭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A랭크는 도합 4명이로군요.”
―수습 성녀까지 계산하면 5명이야. 가능하겠어?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선에 충분히 처리 가능합니다.”
돈바스는 습격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었다. 나름 신중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가 자신만만하게 성공을 확신할 정도로 타니아가 많은 수의 전투원들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본래 돈바스의 휘하에는 3명의 평기사가 있었으나 타니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평기사 3명이 추가로 합류했으니 이는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습격하는 임무에 돈바스를 포함해 7명의 A랭크 전력이 투입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습 성녀가 A랭크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이며 같은 A랭크 4명이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돈바스가 훨씬 많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타니아의 지원 덕분에 A랭크 전력 외에도 1천여 명에 가까운 무장 병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B랭크와 C랭크의 전투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정예 병력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는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돈바스는 말을 끝맺으며 통신 마법진 위에 서 있는 타니아의 환영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자신감이 넘치는 돈바스의 모습에 타니아는 조용히 안도했다. 그녀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돈바스를 향해 신뢰감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돈바스, 너만 믿는다. 디엘론처럼 나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었으면 해.
“제가 타니아 경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처리하겠습니다. 제가 실패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네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타니아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통신 마법의 연결을 해제했다. 푸른 마나로 만들어진 타니아의 환영이 희미해지더니 이내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바닥에 그려진 통신 마법진 또한 빛을 잃었다.
빛을 잃은 통신 마법진을 앞에 두고서 묵묵히 서 있던 돈바스는 곧 무엇인가 크게 결심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 * *
“이 속도라면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유젤키아 도시의 인근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운이 좋다면 오늘 밤은 도시의 여관에서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지도를 보고 있던 드레인이 말했다. 아직 도시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변 지형과 도로의 일정 지점마다 꽂혀 있는 표지판에 적혀 있는 남은 거리를 계산해 보면 유젤키아 도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정을 계속하면서 야영만 한 것은 아니었다. 중간에 도로와 인접한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같은 곳에 들러서 낡은 여관에서 잠을 청한 적도 있으나 아무래도 백색 교단에서 명시한 기한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동 동선을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마을에 들러서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야영의 빈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유젤키아 도시는 루메이 도시로 가는 이동 경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굳이 동선 낭비를 하지 않아도 잠시 들를 수 있는 위치였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여관은 대부분 중소형 마을에 있는 낡은 여관에 비해서는 시설이 좋기 때문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쉴 수 있는 거야?”
지친 얼굴의 바이올라가 힘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였지만 마차의 바로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유진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편안한 마차의 내부와는 달리, 마부석은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불편했다.
더군다나 백색 교단의 기한에 맞추기 위해 중간에 마을에 들러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피로를 녹이는 과정을 최대한 생략하고 야영의 비중을 늘리는 강행군을 이어 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바이올라는 많이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일행 중에서는 바이올라의 체력이 가장 약했다. 수습 성녀인 레이나 또한 평소 육체를 단련하지는 않지만 백색 교단에서 제공한 마차의 내부는 꽤 안락하고 편안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하루의 대부분을 마부석에 앉아서 이동하는 바이올라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체력의 소모가 적은 편이었다.
여정이 계속되면서 지쳐 가는 바이올라에게 레이나는 몇 번이나 동승을 제안했지만, 오히려 바이올라 쪽에서 동승을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이올라는 일행의 안전을 위해 이동 중 마법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마차 안에 탑승하면 경계 마법의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레이나의 호의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일단 도시에 들어가면 쉴 수 있을 거야.”
“다행이다.”
유진의 말에 바이올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행렬은 유젤키아 도시를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갔다. 오후 5시가 넘으면서 붉은 석양이 하늘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 유진은 저 멀리서 흐릿하게나마 도시의 형상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유젤키아 도시가 멀지 않았다. 서둘러 이동한다면 오늘 밤은 안전한 도시의 성벽 안에 위치한 여관의 편안한 침대 위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조금만 더 힘냅시다.”
엘란이 일행들을 독려했다. 그들은 강행군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유젤키아 도시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도시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질수록 긴장의 끈이 풀리면서 육신의 피로가 누적되는 게 강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상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해.’
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서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그는 이상한 점을 하나씩 짚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유젤키아 도시를 향해 쉴 새 없이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으며, 두 번째로는 감각을 극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커녕 마땅히 있어야 할 동물들의 기척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유진은 서둘러 바이올라의 옆으로 다가갔다.
만약 결계에 갇힌 것이라면 일행 중 유일한 마도사인 바이올라가 나서야 했다. 유진이 가까이 다가가자 마부석에 앉아서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던 바이올라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이올라. 뭔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마나의 냄새가 나긴 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결계의 존재를 의심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
“확실하게 파악할 수는 없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정밀 분석을 하려면 집중력이 많이 필요해서 일단은 행렬을 멈춰야 해. 마부석에 앉아 있다고는 해도 움직이면서 고등 결계의 전개 여부를 판단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바이올라가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유진은 사실상 행렬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엘란의 옆으로 다가갔다.
“엘란 경. 잠시 이동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동을 멈출 수 있겠냐는 조심스러운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엘란의 다소 신경질적인 음성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도시가 코앞에 있는데 갑자기 왜 멈춰야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날 선 반응이었지만 유진은 과민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침착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적대적인 결계의 영향력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잠깐만 정지해서 정밀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에 엘란은 여전히 짜증이 묻어 나오는 표정이었지만, 유진의 요청을 묵살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잠깐 멈춰서 10분간 휴식하도록 하지요. 바이올라 경께서는 10분 안에 정밀 분석을 끝내 주셨으면 합니다.”
엘란은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지만, 바이올라가 10분이면 충분하다는 수신호를 보내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유진은 엘란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10분간 휴식하겠습니다!”
엘란의 외침에 행렬이 정지하고 성기사들이 잠시 말에서 내려서 자유롭게 휴식을 취했다. 그들이 쉬는 동안 바이올라는 결계의 유무를 파악하기 위해 분석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가 한창 분석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수습 성녀가 탄 마차의 좌측을 담당하고 있던 드레인이 수상한 기척을 다수 감지하고서 이를 유진과 엘란에게 보고했다.
“수, 수상한 기척이라고요?”
“숫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엘란을 대신하여 유진이 드레인에게 감지된 기척의 숫자에 대해 물었다. 질문을 받은 드레인은 잠시 두 눈을 감고서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이윽고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근처에서 감지되는 이들의 숫자는 대략적으로 50여 명입니다만, 더 먼 곳에서 더 많은 기척이 접근해 오는 게 느껴집니다. 거리가 멀고 교란 마법을 사용 중인 것 같아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500명 이상의 인원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드레인의 대답에 유진의 표정 또한 심각해졌고, 엘란은 부하 성기사들에게 수습 성녀 레이나가 탑승한 마차에 대한 방어 대형을 갖추라고 지시했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12명의 성기사들이 재빠르게 방어 대형을 구성했다. 마차를 중앙에 두고 말들을 방해물 겸 엄폐물로 삼았다.
“드레인 경.”
“네, 듣고 있습니다.”
엘란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다,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드레인을 불렀고, 창백한 얼굴의 뱀파이어는 자신의 이름을 부른 성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빨리 용건을 말하라는 무언의 재촉에 엘란은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저들이 적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겁니까?”
“수백 명 규모의 인원이 교란 마법까지 사용하여 기척을 지우면서 접근 중입니다. 누가 봐도 적개심을 품었다고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요?”
드레인의 날카로운 지적에 엘란은 경직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유젤키아 도시의 인근까지 도로를 타고 오면서 이렇다 할 습격도 없었고, 몬스터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해서 그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많이 방심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