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스트리머-103화 (103/175)

독식하는 스트리머 (103)

27장. 사악한 습격

엘란은 레이나에게 최종 결정권을 넘겨 버렸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호위 책임자인 엘란이 아니라 수습 성녀의 직위에 있는 레이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체계였다. 이번 견문행 도시 변경은 백색 교단에서 지시한 사안이었고, 레이나는 백색 교단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수습 성녀이며 그녀의 호위를 책임지는 성기사 엘란 또한 백색 교단의 소속이다.

백색 교단에서 주도하는 여정이었으며, 어디까지나 유진은 호위 역할의 용병으로 고용된 형태였기 때문에 호위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의견과 목소리를 낼 수는 있어도 엘란이나 레이나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호위 의뢰를 받아들이거나, 계약서를 작성할 때 여정의 전반적인 계획과 이동 경로 선정 등에 있어 결정권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진에게는 현 상황에서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짜증 나네.’

유진은 치밀어 오르는 격한 짜증을 억누르며 언뜻 보기에는 평온한 것처럼 표정을 관리했다. 그의 눈동자는 레이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닿는 시선을 느낀 것일까?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보던 레이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시선 또한 유진에게 향했다.

짧은 시선 교환이 끝나고, 레이나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던 유진은 마지막으로 설득을 시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레이나 경,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겠지만 노스로드 숲을 횡단하는 게 더 안전합니다.”

유진이 말했다. 그는 루메이 후작령까지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노스로드 숲을 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스로드 숲에는 마나 오염 현상으로 흉포해진 몬스터들이 있겠지만, 북부의 영주들이 치안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동 경로가 훤히 노출되는 도로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 북부에서는 맹약 기사단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들의 주목적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북부의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레이나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다만, 확증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왕실 정보대를 이끌며 협력하고 있는 란테르고 백작 측에서도 맹약 기사단과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함구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에 레이나에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진 경의 의견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중앙청에서 명시한 시일이 되기 전에 루메이 도시에 도착해야만 해요.”

레이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자신의 사정을 말하며 이해해 달라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지만 답답한 마음이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진은 티 나지 않는 선에서 짧은 한숨을 흘렸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엘란은 물론이고, 레이나조차 북부의 치안 악화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저희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루메이 도시에 도착해야 해요. 유진 경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고 싶지만, 노스로드 숲을 횡단하면 일정을 맞출 수가 없어요.”

레이나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엘란처럼 대놓고 의견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노스로드 숲으로 이동 경로를 잡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전히 노스로드 숲을 횡단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레이나 경의 뜻이 완고하다면 따를 수밖에 없을 테죠.”

“미안합니다, 유진 경.”

“제게 미안해할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준비는 철저하게 해야 할 것 같네요.”

결단은 내려졌다. 애초에 유진에게는 결정 권한도 없는 문제였으니, 괜히 심력만 소모했다는 느낌이었다.

―백색 교단 쪽 캐릭터들이 답답한 성향이 강하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이렇게 강력한 고구마일 줄은 몰랐네요.

―원래 백색 교단 쪽 캐릭터들이 전반적으로 고구마에요. 저도 그래서 그쪽 캐릭터들 별로 안 좋아함.

―ㄹㅇㅋㅋ.

―백색 교단이 나름 깔끔한 세력이긴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구마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죠.

―으아아악! 치사량의 고구마다! 다들 도망쳐!

―방장님. 사이다는 언제 마실 수 있나요?

―그런 건 없습니다. 우리는 퇴각해야 할지도 몰라요.

채팅 창을 슬쩍 살펴보니까 시청자들도 많이 답답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진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는 레이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출발 일정은 언제입니까?”

“내일 오후 2시에 출발할 계획이에요.”

일정이 급박하다고 할 때부터 예상했지만 막상 들어 보니 지나치게 빠르다. 내일 오후 2시 출발이라면 제대로 준비를 갖출 시간도 부족하다.

“빠르네요.”

혼잣말에 가까운 유진의 중얼거림에 레이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서두를 수밖에 없어서요.”

“계속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행히 저희 파티는 언제나 여정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늦게 출발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안도하는 레이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호위대의 규모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저를 포함하여 성기사 13명이 레이나 님의 호위를 위해 동행할 겁니다.”

유진의 질문에 대답한 이는 레이나의 바로 뒤에 서 있는 엘란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성기사 13명이라면 결코 적은 수의 호위는 아니었지만, 현재 북부의 치안이 극심하게 악화되어 있으며 맹약 기사단이 레이나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게 문제였다.

사방에서 목을 조여 오는 위협 속에서 과연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지킬 수 있을까? 루베니아 연대기라는 게임을 수십 번 클리어 했으며, 커뮤니티 등에서도 고인물 유저라고 불리는 유진조차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여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도시의 북문을 통해 출발합니까?”

“그렇습니다, 유진 경. 오후 1시 30분까지 도시의 북문에서 집결하여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고 출발할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엘란 경. 집결 시간을 준수하겠습니다.”

모임은 끝났다. 축객령은 없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유진과 바이올라는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신전을 빠져나왔다.

신전을 빠져나오자 뒷골목 방향에서 드레인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는 말없이 유진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오자마자 인사부터 올리는 예의 바른 드레인.

―역시 드레인이야. 이번 루트에서는 예의가 확실하구먼!

―솔직히 말해서 엘란 같은 캐릭터보다는 드레인이 100배 더 나은 듯?

―인정합니다.

유진은 시청자들의 채팅을 잠시 확인하고는 이어서 드레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주군. 어떻게 되었습니까?”

“간단하게 설명할게.”

설명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5분 정도 이어진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드레인 역시 답답함이 잔뜩 묻어 나오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예상은 했지만 절망적이로군요.”

“어떻게 생각해?”

“이동하는 동안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 같군요.”

“동감이야.”

대화가 끝나고 유진은 파티원들과 함께 상점가에서 필요한 물품들과 식량을 충분히 구입하여 아공간 주머니에 저장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시작될 여정에 대비하여 영주성의 저택에 마련된 각자의 침실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다음날 오후 1시가 되었다. 유진과 바이올라, 그리고 드레인은 점심 식사를 끝내고서 지벨 도시의 북문으로 향했다. 북문에 도착했을 때는 1시 30분에 가까운 시각이었고, 레이나와 엘란 등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백색 교단을 상징하는 하얀색 망토를 두른 성기사들이 모여 있는 광경은 멀리서도 제법 잘 보였기 때문이다.

유진은 파티원들과 함께 백색 교단의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접근하자 엘란으로부터 뭔가를 보고 받고 있던 레이나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유진과 그의 파티원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유진 경.”

“늦지 않게 도착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짧은 대화를 끝낸 그들은 여정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비 상태를 점검했다. 점검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그들은 2시가 되기 직전에 지벨 도시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본래 계획대로 영지에서 정비한 도로를 이용해서 그런지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벨 도시에서 꽤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이었다.

“호위 대형을 변경하겠습니다.”

엘란은 호위 대형의 변경을 지시했다. 지금까지는 이렇다 할 대형 없이 거의 일렬로 이동 중이었지만, 도시에서 멀어짐에 따라 호위 대형의 필요성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변경된 호위 대형은 간단했다. 수습 성녀인 레이나가 탑승한 마차를 중앙에 두고 성기사들과 유진 파티가 얇은 방진을 형성하는 형태였다. 12명의 성기사들이 전열과 후열을 맡았고, 유진의 파티원들과 엘란이 레이나가 탑승한 마차의 근접 호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일행 중 유일하게 원거리 화력 지원이 가능한 바이올라는 마차의 마부석에 앉았고, 나머지 호위들은 모두 말을 타고 이동 중에 있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밤이 되었다. 9시에 근접한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호위 책임자를 맡고 있는 엘란은 행렬을 멈추고 야영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전파했다.

성기사 3명이 장작으로 사용할 만한 마른 나무를 구해 오는 동안에 다른 인원들은 밤을 보낼 수 있는 천막을 설치하고 주변을 경계했다. 바이올라는 야영지 인근에 일정 수준 이상의 마나를 지닌 자들이 접근하면 시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간단한 결계를 펼쳐 두었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성기사들이 구해 온 장작을 모아서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지 주위에 횃불을 설치했다.

“불침번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엘란이 다가와 의견을 구했다. 처음에 이동 경로 문제로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협상의 여지가 없는 독선적인 성격으로 보였지만, 오늘 하루 함께 대열을 맞춰 이동하면서 느낀 점인데, 그에게는 일정한 영역의 ‘선’이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강경하지만 일부분에 한해서는 유하게 대처할 때도 많았다.“불침번이요?”

“네, 유진 경. 야영지를 넓게 형성한 상태라서 가능하면 불침번은 3인 1조로 구성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2인 1조가 좋지 않을까요?”

“2명이 경계하기에는 야영지가 넓어서요.”

“3인 1조도 무리가 없을 것 같기는 하네요. 그렇게 진행하시죠.”

“알겠습니다. 첫 불침번은 유진 경의 파티에게 맡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 만남에서 호감형은 아니었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나쁜 캐릭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모두가 숙면에 빠져들 때, 유진과 파티원들은 불침번 근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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