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스트리머-102화 (102/175)

독식하는 스트리머 (102)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레이나 경.”

유진은 레이나를 향해 적당히 예를 갖췄다. 허리를 숙이거나,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라는 신분은 귀족 이상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유진은 그녀에게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야 했다.

―너무 과하게 예의 차리는 거 아님?

―ㅇㅇ 예의 차려야 함. 설명하고 싶은데 좀 귀찮네.

―도와줘요! 설명 요정!

―원래 백색 교단은 깐깐한 곳이고 수습 성녀는 ‘수습’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고는 하지만 절대 낮은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어쨌든 최소한의 예우는 갖춰야 합니다.

―ㄹㅇㅋㅋ.

―‘수습’이라고 해도 레이나는 A랭크의 실력자고 직위도 높아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이번에도 설명 요정님들이 등장하셨군!

몇몇 신규 시청자들이 궁금증을 드러내자 고인물 설명 요정들이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유진은 오늘도 평화롭게 흘러가는 채팅 창을 힐끔 확인하고는 이어서 정면에 앉아 있는 레이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긴 은발이 인상적인 외모의 그녀는 유진을 향해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가에 선명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거기다 엘프를 연상하게 만드는 자연스럽고 티 없이 하얀 피부와 순백의 사제복은 전체적으로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와 잘 어울리는 고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말 성녀스러운 분위기입니다.

―백색 교단에서는 레이나가 가장 성녀다운 성녀라고 생각함.

―ㄹㅇㅋㅋ.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이참에 히로인 추가하면 안 될까요? 레이나를 동료나 히로인으로 추가하는 루트도 있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레이나! 너! 내 동료가 돼라!

레이나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시청자들은 새로운 히로인의 추가 혹은 레이나의 동료 영입을 강하게 주장했다. 바이올라와 마찬가지로 레이나 또한 루베니아 연대기의 유저들과 관련 방송을 즐겨 보는 시청자들에게서 인기가 많은 캐릭터였다.

다만, 큰 어려움 없이 초반에 동료로 합류하는 루트가 다수 존재하는 바이올라에 비해 레이나의 영입 난이도는 매우 높은 편이었고, 그녀를 동료 캐릭터로 만들 수 있는 루트 또한 많지 않았다.

히로인이라고 불릴 만한 인기와 다양한 장점을 지닌 여성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동료로 영입하여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는 유저의 숫자가 적어서 루베니아 연대기와 관련된 주요 커뮤니티들에서는 인기에 비하면 언급이 적은 편에 속했다.

“유진 경이라고 했었죠?”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네요. 이거…… 영광이로군요.”

가벼운 농담을 건네자 레이나는 말없이 눈웃음을 지어 보였고,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역시 레이나야! 웃는 얼굴이 정말 예뻐!

―ㄹㅇㅋㅋ.

―이 정도면 미소 천사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루베니아 연대기에서 선정한 미소 천사에 가장 가까운 수습 성녀.

높은 영입 난이도 때문에 그녀와 함께 파티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의 숫자가 많지 않아서 주요 커뮤니티 등에서는 언급이 적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히로인 캐릭터의 필수 조건 중 하나로 손에 꼽을 수 있는 외모 부분에서 그녀는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인기가 대단했다.

“제 호위를 맡아 주신다고 들었어요.”

레이나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호위’라는 단어가 나오자 바로 뒤에 서 있는 엘란의 눈매가 일시적으로 꿈틀했다. 레이나의 호위 책임자인 그는 ‘유진’이라는 굴러온 돌의 존재가 달갑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습니다. 지벨 백작님과 루벤 왕국의 국왕 폐하께서 제게 레이나 경의 호위를 의뢰하셨습니다. 저와 파티원들이 루메이 도시까지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든든하네요. 유진 경 덕분에 루메이 도시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눈은 웃고 있었지만,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무감정한 어조였다. 그녀의 의중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유진이 추가 호위로 붙은 걸 반기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캐치 할 수 있었다.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이런 자리가 불편했지만 유진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의미 없는 웃음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에 그의 바로 옆에 앉은 바이올라는 레이나의 냉담한 반응에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나타냈다.

“호위 의뢰를 시작하기 전에 명심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얌전히 레이나의 뒤에 서 있던 엘란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멈춰 있던 대화에 참여했다. 은근히 위압적인 기세를 내뿜는 엘란. 아마도 기선 제압이 목적인 것 같았다.

직속 호위의 호전적인 행동에 레이나는 피곤한 표정으로 푹, 하고 한숨을 내뱉기는 했지만 딱히 엘란을 말린다거나 주의를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뒤에서 관찰하는 방관자의 입장에 가까운 태도였다.

“레이나 님의 호위 책임자는 접니다. 이 부분은 확실하게 인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에 가깝다. 솔직하게 말해서 불쾌함에 가까운 기분이 들었지만, 유진은 내색하지 않았다.

엘란의 태도가 강압적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야에서 볼 때 유진은 굴러온 돌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혹시라도 호위 책임자 자리를 넘본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대놓고 기선 제압을 목적으로 기세를 쏟아 내는 엘란의 태도에 바이올라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유진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직접적으로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호위 책임자 자리를 빼앗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심해도 됩니다, 엘란 경.”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어도 될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저도 국왕 폐하께서 직접 제게 명하신 만큼 일정과 이동 경로 그리고 호위 계획 등에서 의견을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한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듣고 싶습니다.”

유진이 말했다. 엘란의 경계심의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의 계획이라…….”

엘란은 턱을 긁적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동자는 유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깔보는 듯한 시선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유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뭐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 드리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안내 부탁하겠습니다.”

“교단의 중앙청에서 최대한 빨리 루메이 도시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중앙청의 지시에 응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이동해야 합니다. 일정이 긴박하기는 하지만 루메이 도시까지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으니까 늦장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시간이 오래 소요되지는 않을 겁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는 엘란. 그의 설명이 끝났을 때 유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란을 향해 슬쩍 시선을 옮겼다.

―지금 루벤 왕국 북부는 대혼란인데, 정비된 도로를 따라 이동하자고 하는 거임?

―루베니아 연대기를 여러 번 플레이한 유저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엘란은 백색 교단에서도 생각이 깊지 않은 거로 유명합니다.

―이런 꼴통! 이 시국에 도로 타고 루메이 후작령으로 가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정말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ㄹㅇㅋㅋ.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현재 북부의 치안은 극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전원 A랭크의 실력자로 이루어진 유진의 파티가 호위로 합류한다고는 해도 맹약 기사단이라는 배후의 암흑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는 게 밝혀진 상황에서 습격에 취약한 도로를 통해 이동한다는 계획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엘란 경,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정비된 도로를 따라 루메이 도시로 이동한다는 게 계획인 것 같은데 정확합니까?”

“네, 틀린 부분 없이 아주 정확하게 들으셨습니다.”

“하아.”

잘못된 부분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엘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유진은 극한의 답답한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방장님의 한숨에서부터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극한의 답답함 ㅋㅋㅋㅋㅋ.

―인정합니다.

―ㄹㅇㅋㅋ.

―많이 답답하실 것 같아요.

시청자들도 유진에게 공감했다. 유진은 심호흡과 함께 답답함으로 가득한 속내를 일부 정리하고는 엘란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엘란 경, 지금 루벤 왕국 북부의 치안은 절망적인 수준까지 추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이상 현상 관측에 따른 북부의 치안 악화에 대해서는 저도 보고로 전달받았습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습격을 받을 가능성이 큰 도로를 따라 이동하자고 주장하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교단의 중앙청에서 정한 날짜가 되기 전에 루메이 도시에 도착해야 합니다. 일정을 준수하려면 정비된 도로를 이용하여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야 합니다.”

엘란이 설명했다. 그는 자비의 여신을 숭배하며 백색 교단을 따르는 성기사였기 때문에 교단 중앙청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노스로드 숲을 통해 은밀하게 이동하는 게 좋을 겁니다.”

노스로드 숲은 지벨 도시의 북쪽에서 시작되어 유젤키아 도시 인근을 거쳐서 루메이 후작령의 초입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숲이다. 숲의 면적이 워낙 넓고 지형이 험준하기 때문에 이동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분명한 단점이 존재하지만 이동 경로가 외부에 들키지 않고 추적당할 우려가 적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노스로드 숲에는 몬스터들의 서식지와 부락 등이 많지만, 유진은 숲 내부의 몬스터들보다 수습 성녀를 노리는 ‘인간’들의 세력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도로를 활용하자는 엘란의 의견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의견 충돌이로군요.”

엘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진과 다르게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바이올라의 심기도 불편해 보였다.

“유진 경은 노스로드 숲을 통해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엘란 경.”

“하지만 저는 도로를 따라 신속하게 이동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처럼 정반대의 의견이 충돌했으니, 더 이상의 다툼을 막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방법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여유로워 보이는 엘란의 모습에 유진은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외면하려 했지만 그의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레이나 님에게 결정을 맡기도록 하지요.”

엘란이 말했다. 그는 백색 교단의 소속으로 현재 일행 중에서 가장 상급자라고 할 수 있는 수습 성녀인 레이나에게 결정권을 넘겨 버린 것이었다. 숨이 막히는 전개에 유진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는 것을 포기하고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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