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00)
“유진 경이 이번 의뢰의 적임자입니다.”
란테르고 백작의 말에 옆의 지벨 백작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조용히 동조했다. 북부의 치안이 극심하게 악화된 상황에서 백색 교단은 수습 성녀 레이나의 견문행 지역을 변경했으니, 그녀는 신속하게 여정에 나서야 한다.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가 영지 내에서 안 좋은 일을 당하게 된다면 지벨 백작은 물론이고, 루벤 왕국의 국왕 또한 여러 면에서 불이익을 당할 여지가 생길 정도로 심각한 부담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호위가 필요하다.
지벨 백작은 마음 같아서는 부족한 군사력을 쥐어짜 내서라도 다수의 기사로 호위대를 편성해 주고 싶었지만, 레이나가 다수의 인원이 호위로 붙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소수의 최정예 인원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북부의 혼란 속에서 레이나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2명 이상의 A랭크 실력자가 필요하다.
A랭크의 실력자는 용병 길드에서도 희소하고 강력한 전력으로 분류된다. 용병 길드에서도 그 수가 많지 않은 금패 용병들 중 일부는 웬만한 도시급의 지부장을 맡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처럼 하나의 지부를 관리하는 직위에 있는 금패 용병들은 직접 고용이 힘들기 때문에 자유롭게 활동하는 이들을 고용해야 한다.
지부장이나 용병 단장이 아닌 금패 용병들은 그 숫자가 적기도 하고 루벤 왕국뿐만 아니라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비용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수배를 위해 소요되는 시간이 많다.
당장 지벨 백작이나 루벤 왕국의 국왕이 유진 파티가 아닌 다른 금패 용병을 둘 이상 고용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적으로 남은 여유가 거의 없기 때문에 수습 성녀 레이나의 출발 일정에 맞출 수 없을 것이다.
“사정은 이해했습니다만, 의뢰를 받아들일지 결정하기 전에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예를 들자면 레이나 경의 최종 목적지 같은 걸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어디로 갈지 알아야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유진이 말했다. 그는 아직 레이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고 있다. 지벨 백작과 란테르고 백작이 경황이 없어서 그런지 자신들의 사정만 급하게 설명하고 의뢰의 세부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안하네. 우리가 너무 급했던 탓에 자네를 배려하지 못했군.”
지벨 백작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의 앞에 앉은 란테르고 백작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조용히 동조의 의사를 표했다.
“의뢰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게 보충하자면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인 레이나 경을 루메이 도시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겁니다.”
짧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서 란테르고 백작이 설명했다. 그와 동시에 유진의 눈앞에 퀘스트 정보 창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경쾌한 시스템 알림음과 동시에 흐릿하게 보이던 퀘스트 정보 창이 더욱 선명해졌다.
[돌발 퀘스트: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루메이 도시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라!
재앙의 시대가 다시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온갖 이상 현상들과 불길한 전조들로 인해 대륙 전 지역은 혼란으로 가득합니다. 그중에서도 대륙의 북쪽 지역에 인접한 루벤 왕국의 북부는 특히나 소란스럽습니다. 전쟁 군주의 침공과 오염된 정령들의 진군을 포함한 부정적인 사건의 연쇄는 루벤 왕국 북부의 치안을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마나 오염으로 흉포해진 몬스터들이 날뛰면서 영주들의 군사력은 약화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무장한 도적들의 창궐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백색 교단은 지벨 백작령보다 더 시급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루메이 후작령으로 수습 성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혼란스러운 북부에서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가 목숨을 잃는다면 필시 루벤 왕국의 국왕과 지벨 백작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은 노련한 금패 용병인 당신과 A랭크의 경지에 있는 당신의 파티원들에게 호위를 의뢰하고자 합니다. 북부의 혼란 속에서 목적지까지 수습성녀를 안전하게 호위하세요! 그것이 이번 의뢰의 주된 내용입니다!
보상: 5,000골드, 스킬 포인트 5,000. 메인 이벤트, ‘절명이 내리는 깊은 숲’의 시작, 루벤 왕실의 우호도 상승.]
“유진 경이 의뢰를 받아 준다면 국왕 폐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물론 합당한 보상 또한 약속하셨습니다.”
란테르고 백작이 말했다. 유진은 금패 용병이고, 그의 파티원들인 바이올라와 드레인 또한 A랭크의 경지에 오른 뛰어난 실력자들이다. 유진이 수습 성녀 호위 임무를 받아들인다면 그녀가 루벤 왕국의 영토에서 목숨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게 낮아질 테니, 지벨 백작은 물론이고 루벤 국왕 또한 심적으로 안도하게 될 것이다.
“의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진은 흔쾌히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파티의 의뢰 결정권은 전적으로 유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이올라와 드레인에게 따로 의견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띠링! 돌발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경쾌한 알림음이 귓가에 들려온다.
―돌발 퀘스트다!
―다음 메인 이벤트로 진행하는 교두보 역할인 것 같네요.
―ㄹㅇㅋㅋ.
―수습 성녀 호위! 재밌는 진행! 기대하겠습니다!
―‘절명이 내리는 깊은 숲’이라면 메인 이벤트 중에서도 결코 난이도가 낮은 편은 아닌데…… 방장님! 응원하겠습니다!
―절명의 숲에서 주로 진행하는 메인 이벤트라서 난이도가 낮은 편이 아니라, 그냥 높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습니다.
―이거 리얼입니다. 타 스트리머 방송에서 봤는데, 고인물 기준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편입니다.
다음 메인 이벤트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시청자들은 메인 이벤트 중에서도 난이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절명이 내리는 깊은 숲’에 대해 우려를 표했으나, 루베니아 연대기의 고인물 중에서도 썩은 물 수준에 진입한 유진은 현시점에서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없다는 현실을 알고 있었다.
플레이어의 선택과 여러 변수의 작용에 의하여 이야기의 전개가 조금씩 변하는 루베니아 연대기를 셀 수도 없이 많이 플레이한 유진은 다양한 루트와 메인 이벤트들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진행할 수 있는 메인 이벤트 중에서는 루메이 후작가와 절명의 숲이 관련된 루트 진행이 그나마 난이도가 낮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선택이 번복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수습 성녀 신분이지만, 루베니아 연대기의 세계관 설정상 뛰어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는 덕분에 대부분의 루트에서 정식 성녀로 승격되는 레이나와 미리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없었다.“유진 경! 정말 고맙네!”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유진의 말에 지벨 백작은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했다. 그가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를 호위하겠다고 결정했으니, 이제 당분간 큰 걱정은 덜었다.
* * *
맹약 기사단의 루벤 북방 지부를 이끄는 9명의 간부 중 하나이자 환술사라고 불리는 타니아는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인 레이나를 살해하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충신 돈바스를 포함한 맹약 기사단의 평기사 여럿과 수백 명에 달하는 하수인 계급의 전투원들을 지벨 도시에서 루메이 후작령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유젤키아 도시와 인근 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대기 명령을 내렸다.
이들 중 돈바스는 맹약 기사단 내부에서도 자신을 따르는 평기사 셋과 함께 유젤키아 도시에서 거점을 마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을 따르는 직속의 하수인들 중 100여 명이 유젤키아 도시의 거점에 합류했다.
북부의 치안이 악화되면서 지벨 백작은 물론이고, 북부를 다스리는 영주들 대부분이 일정 규모를 초과하는 무장 병력을 보유한 집단들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강화했지만 돈바스는 맹약 기사단에서 이름만 가지고 있는 상단으로 위장한 덕분에 휘하 하수인들의 무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북부의 치안이 개판이었기 때문에 상단에서 용병들을 고용했다는 걸로 어느 정도 변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단 용병들의 무장 해제는 막을 수 있었지만, 대규모 인원을 무장할 만한 무기들과 장비들을 노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검문과 조사를 피해 상단 지부로 위장한 건물의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이제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가 루메이 후작령의 경계를 넘기 위해 근방에 접근하거나, 유젤키아 도시에 진입하게 되면 비밀리에 준비한 무기로 무장한 하수인들의 군대가 그녀를 습격할 것이다.
“돈바스 경, 타니아 경으로부터 마법 통신 요청입니다.”
상단 지부 건물의 지하에서 무기들과 장비들을 점검하고 있던 돈바스는 부관의 보고에 철제 보관함을 뒤적이고 있던 손을 멈추고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철제 보관함의 덮개를 닫고서 부관이 서 있는 출입문 방향을 향해 느긋한 움직임으로 몸을 돌렸다.
“타니아 경께서?”
“네, 직접 연락을 당부하셨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언급이 없으셨으나, 상당히 다급해 보이셨습니다.”
“지금 즉시 연락 마도사를 이쪽으로 호출하도록.”
장거리 통신 마법을 사용하려면 연락 마도사의 존재가 필수였다. 돈바스의 지시에 그의 부관은 허리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부관이 물러나고 5분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노크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리고 어두운 회색의 로브를 입은 연락 마도사가 걸어 들어왔다.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얼핏 드러난 턱선이 갸름하고 목젖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성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돈바스 경,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붉은 입술이 열리고서 미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돈바스는 그녀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장거리 마법 통신이 필요하다.”
“좌표를 말씀해 주시면 바로 연결하겠습니다.”
“여기 적힌 좌표로 통신 연결하면 된다.”
돈바스는 혁대에 걸려 있는 가죽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연락 마도사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연락 마도사는 돈바스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리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바닥에 통신 마법진을 그렸다.
좌표를 입력하자 대기하고 있던 타니아의 연락 마도사와 통신 마법이 연결되었다. 푸른색의 통신 마법진 위로 타니아 측 연락 마도사의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돈바스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즉각 타니아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하고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3분이 지나기 전에 마법진 위에 새로운 환영이 나타났다. 보고를 위해 자리를 비운 연락 마도사가 아니라 돈바스의 직속 상관이자 맹약 기사단의 간부를 맡고 있는 타니아였다.
타니아가 직접 통신 마법진에 설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그 순간이 짐작보다 일렀기 때문에 돈바스는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표정을 서둘러 수습하고는 자신의 직속 상관에 대한 최선의 예를 갖췄다.
―디엘론의 실패가 내 예상보다 치명적이었던 모양이야.
타니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