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96)
덮개를 열자 안에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마도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굴의 심장’은 귀걸이 형태의 마도구였다. 영롱하게 빛나는 녹색의 마정석이 유진을 유혹하는 듯 일렁였다.
A랭크의 마도구 중에서도 공포 면역이라는 흔치 않은 기능을 가진 ‘불굴의 심장’은 진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었다.
루베니아 연대기와 관련된 각종 커뮤니티에서 고인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게임을 많이 플레이하고 다양한 종류의 루트를 클리어 하고 엔딩을 본 유진조차도 ‘불굴의 심장’을 보상으로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불굴의 심장이 흔치 않은 A랭크 마도구라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루벤 왕국의 왕실 2등 비고에 보관 중이라는 절대 변하지 않는 세계관 설정 탓에 왕실과 관련된 퀘스트를 완수하여 보상으로 받거나 루벤 왕국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으로 국왕으로부터 직접 하사받는 게 아니라면 ‘불굴의 심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전무에 가까울 정도로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국왕이나 왕실 퀘스트를 완수한다고 해도 비고에 보관 중인 마도구는 대부분 뽑기 운이 크게 작용하는 무작위 보상이기 때문에 유진이 고인물의 위치에 오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습득한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워낙 구하기 힘든 마도구라서 그런지 루베니아 연대기를 즐기는 몇몇 시청자들과 유저들 사이에서는 ‘불굴의 심장’이 유니콘의 뿔이나 다름없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유니콘의 뿔처럼 환상의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이걸로 유니콘의 뿔을 하나 얻었네.’
고급스러운 함 안에 보관된 ‘불굴의 심장’을 내려다보는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루베니아 연대기의 세계관에서는 ‘불굴의 심장’ 외에도 유니콘의 뿔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꽤 많았다.
“바로 착용해 봐도 될까요?”
“저한테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굴의 심장은 이제 유진 경의 것이니까요.”
란테르고 백작은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유진은 선명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불굴의 심장’을 착용했다.
진귀하고 성능이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다른 마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착용한 순간에는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잘 어울리는군요.”
란테르고 백작이 짧게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방장님! 축하해요!
―ㅊㅋㅊㅋ!
―유니콘의 뿔 하나 입수했네요.
―야호! 희귀템 획득!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고!
―ㄹㅇㅋㅋ.
“유진 경, 혹시 불굴의 심장에 전해지는 일화를 알고 있습니까?”
루베니아 연대기는 개발진의 영혼을 갈아 넣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방대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메인이 되는 스토리도 제법 탄탄한 편이고, 비교적 비중이 적은 캐릭터들의 설정도 잘 짜여 있다.
세계관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잡다한 설정들은 루베니아 연대기의 홈페이지에 업로드되어 있지만 워낙 분량이 많아서 그걸 다 읽은 유저는 극히 드물었고, 그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루베니아 연대기의 탄탄한 세계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두꺼운 종이책 기준으로 10권 이상의 분량을 자랑하는 설정 집을 꼼꼼하게 정독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유진은 루베니아 연대기의 게임 제작사에서 한정판으로 판매한 설정 집을 전권 보유하고는 있었다.
팬심으로 구매한 것이었지만 일단 가지고 있다 보니까, 전부 다 읽지는 못해도 유저들 사이에서 유명한 설정이나 인기가 많은 스토리가 기록된 페이지는 대부분 읽게 되었다.
“불굴의 심장과 관련된 일화라면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유진이 대답했다. ‘불굴의 심장’은 루베니아 연대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 간에서도 유명한 마도구였고, 유진이 주로 접속했던 커뮤니티 등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편이었기 때문에 관련된 일화를 찾아서 읽어 봤던 기억이 남아 있다.“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고대의 대륙 전쟁에서 가장 용맹했다고 전해지는 맹진의 기사, 론벨이 관련된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정확하게 알고 있군요.”
맹진의 기사, 론벨이 남긴 용기를 계승한 다섯 기사의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대륙 전쟁이 끝나기 전에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어 가던 맹진의 기사, 론벨은 자신이 목숨을 잃는다면 왕국의 패색이 짙어질 것이라 생각하여 친우였던 대 마법사 할리온에게 자신의 심장을 재료로 하여 마도구를 만들어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 5명에게 나눠 달라고 부탁한다.
뛰어난 대마법사였던 할리온은 론벨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는 론벨의 심장으로 5개의 마도구를 제작하여 왕국에서 가장 뛰어났던 기사 다섯 명에게 전달했고, 그들은 새로운 영웅이 되어 왕국을 지켰다는 내용이다.
이때 제작된 5개의 마도구 중 하나가 바로 ‘불굴의 심장’이라는 내용이다. 론벨의 심장을 재료로 하여 제작한 마도구는 4개가 더 있지만 대륙 전쟁이 끝나고 현재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대부분이 유실되었다는 설정이다.
개발진은 론벨이 남긴 다른 ‘심장’들도 모두 구현해 놓았지만 유저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존재를 확인한 것은 ‘불굴의 심장’이 유일했다.
―갑자기 옛날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그 누구도 란테르고 백작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마도구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물론 난 전설 따위는 믿지 않아.
―ㄹㅇㅋㅋ.
―정보 하나, 란테르고 백작은 은근히 옛날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
시청자들의 채팅이 빠르게 올라왔다.
“국왕 폐하께서는 유진 경의 용기가 꺾이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왕실의 2등 비고에 보관된 무수히 많은 마도구 중에서도 불굴의 심장을 하사하는 것으로 결정하신 겁니다.”
나름 이유가 있는 선정이었다.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란테르고 백작이 전한 루벤 왕국 국왕의 바람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유 기사는 일반적인 기사와는 다르다. 작위를 수여 받았다고는 하지만 모시는 주군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용병에 가까운 성격과 특징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일반 기사에 비하면 예우가 덜하기는 하지만 모시는 주군이 없기 때문에 영주나 국왕에게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다.
주군을 모시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군주에게 일정 이상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자유 기사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자유 기사 중에서 왕국에 대한 충심이 유난히 깊은 이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들 또한 전쟁이나 토벌이 발생하면 적절한 대가를 받고서야 움직이는 걸 보면 일반 기사와는 확실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맹약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수께끼의 집단이 나타나 루벤 왕국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루벤 왕국의 국왕은 맹약 기사단과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유진이 그 뜻을 꺾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자유 기사에게 충성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귀한 A랭크의 마도구를 하사하고 그를 회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제가 맹약 기사단과 계속 싸우길 원하시는군요.”
유진의 말에 란테르고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곧 무언의 긍정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화해를 원하더라도 맹약 기사단은 계속 죽이려 할 테니까요.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 리 없죠.”
증오의 연쇄는 계속될 것이다. 맹약 기사단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당장 알 수 없었지만 유진은 그들의 계획을 여러 번 방해했다.
그가 유렌을 죽였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지만 적어도 오염된 정령들의 진군과 연회장 습격 등을 막아 낸 것은 유진이 분명했기 때문에 맹약 기사단에서 이를 바득 갈고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을까? 란테르고 백작은 유진을 향해 말없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혼란은 언제나 가장 평화롭다고 생각하여 긴장의 끈을 놓고 방심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오래전, 재앙의 시대가 찾아왔을 때 마왕이 강림했고, 그를 따르는 군대가 대륙을 침략했다.
2개의 제국과 5개의 왕국은 힘을 합쳐서 마왕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대륙에서 몰아냈으나, 세월이 흘러도 재앙의 시대에 각인된 악몽은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재앙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 현상이 대륙 전 지역에서 조금씩 발생하고 있었다.
현재 대륙의 전 지역, 그중에서도 특히 루벤 왕국의 북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마나 오염 현상도 재앙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대표적인 전조 현상 중 하나였다.
오염된 마나로 인해 정령들이 중독되는 것은 재앙의 전조가 시작한 시점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흐름이었지만, 2개의 제국과 5개의 왕국이 멸망하고 마왕의 통치를 희망하는 맹약 기사단에 의해 그 시기가 많이 앞당겨졌었다.
기존의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지벨 백작이 죽거나 도시가 점령되었겠지만 아쉽게도 유진의 활약으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맹약 기사단에서 간부 승급을 앞두고 있던 디엘론이 전사하였고, 북방 지부의 간부 중 한 명으로 지벨 백작령의 혼란 야기와 도시 장악 계획을 주도하던 타니아는 일부 세력을 잃고서 맹약 기사단 내부에서의 입지가 좁아졌다.
결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지만 이대로 주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니아는 맹약 기사단 루벤 북방 지부의 일원으로서 왕국의 북부에 대한 혼란을 가속화하고 각 도시에 대한 장악 시도를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멈춘다면 루벤 북방 지부의 다른 간부들에게 실적을 추월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사단 내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상실할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는 실각하게 될 수도 있다. 타니아는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디엘론의 죽음 이후로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제압하고 수하들의 태세 재정비를 끝낸 타니아는 직속의 평기사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돈바스를 호출했다.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낡은 오두막 앞의 황량한 공터에 앉아 있는 타니아를 향해 검은색의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쓴 칠흑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맹약 기사단의 평기사이자 타니아의 직속 부하인 돈바스였다.
“돈바스, 네게 맡길 일이 있어.”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돈바스는 기사도를 신념으로 삼는 전형적인 기사였다. 비록 마왕군 강림을 앞당기기 위해 맹약 기사단의 이름으로 움직이며 본인이 왜곡한 기사도를 따르지만 그는 스스로를 명예로운 기사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주군으로 섬기는 타니아에게도 충직하게 행동했다.
“지금 지벨 도시에는 백색 교단의 수습 성녀가 견문행 중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레이나 홀리워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조만간에 루메이 후작령으로 이동할 거라는 첩보가 들어왔어.”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일단은 유젤키아 도시로 가서 대기해.”
지벨 도시에서 루메이 후작령으로 가려면 유젤키아 도시를 지나가야 한다.
“자세한 지령은 나중에 전달할 테니, 하수인들을 집결시키고 공격을 준비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