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93)
25장. 미확인 세계
A랭크의 경지에 오른 지벨 백작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던 하스토린을 일격에 쓰러뜨린 유진은 로웨스와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중인 평기사의 목에도 정령검을 쑤셔 넣었다.
“크아아아아아!”
정령검의 화염이 평기사를 집어삼켰다. 목을 관통당해서 치명상이었지만 키메라 개조를 받은 몸의 재생력 덕분에 일격에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전신이 불타기 시작하자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치다가 곧 죽음을 맞이했다.
“고맙습니다, 유진 경.”
로웨스가 거친 숨결을 토해 내며 감사를 표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편이긴 하지만 사리 분별을 못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귀족들을 보호하며 다수의 적과 전투를 치른 탓에 그는 지쳐 있었고 유진이 적절한 시점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홀로 평기사를 죽이더라도 죽음 못지아니한 결코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암흑 마법사는 제가 처치하겠습니다.”
유진이 말했다. 로웨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벨 백작 그리고 란테르고 백작 등과 합류했다.
“유진!”
“지원하겠습니다.”
로웨스가 물러나고 바이올라와 드레인이 합류했다. 둘은 유진의 옆에서 전투 자세를 취했다. 스태프와 붉은 오러가 맺힌 칼날의 끝이 디엘론을 겨눴다.
많은 마나를 소모한 것인지 바이올라는 지쳐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유진은 이미 그녀의 마나 소모가 극심하다는 걸 눈치챈 상태였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오케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바이올라의 옆모습을 보며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는 이어서 우측에 선 드레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군, 저는 멀쩡합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드레인은 평소에 비해서 유난히 창백했지만 바이올라보다는 훨씬 멀쩡해 보였다.
“너는 걱정 안 한다, 드레인.”
그는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다. 체력적인 한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모든 신체적인 능력이 인간에 비해 훨씬 우수하다. 그 역시 하수인들과 교전하면서 적지 않은 체력과 마나를 소모했지만 뱀파이어 특유의 신체 능력과 질긴 정신력이 그가 멀쩡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걱정 안 한다고 하니까, 드레인 의기소침해하는 거 보셈 ㅋㅋㅋㅋ.
―드레인 시무룩.
―바이올라만 걱정하는 것도 힘들다! 드레인 너는 혼자 커라!
―ㄹㅇㅋㅋ.
―드레인, 너는 튼튼하잖아.
―아 ㅋㅋㅋㅋㅋ 바이올라랑은 다르다고!
다소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는 드레인을 보며 시청자들은 즐겁게 채팅을 입력했다.
“이건…… 좋지 않군요.”
자신을 향해 무기를 겨누는 세 사람을 보며 디엘론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은색의 가면 아래 숨겨져 있는 얼굴은 긴장으로 인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디엘론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주위를 살폈다.
연회장을 공격하는 데 동원한 하수인들은 대부분 시체가 되어 있었고 여유가 생긴 기사들이 달려와 디엘론에 대한 포위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타니아가 붙여 준 평기사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사실상 연회장 습격 인원 중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전력’이라고 불릴 만한 자는 디엘론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승산이 없을 것 같군요. 하하하하! 정말 곤란하게 되었군요!”
디엘론은 어깨를 들썩이며 광인처럼 웃었다.
“놈! 순순히 항복해라!”
기사 중 누군가가 오러 블레이드를 겨누며 소리쳤다. 어느새 10여 명의 기사들이 디엘론을 향해 창칼을 겨누고 있었다.
“크큭! 크하하하하!”
광소가 터져 나왔다. 디엘론의 음성에서 광기가 묻어 나왔고, 그의 전신에서 불길한 암흑의 힘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놈이 술수를 부린다!”
“쳐라!”
“막아라!”
누군가가 막아야 한다고 고함을 내지르자 검을 겨누고 있던 기사들이 디엘론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진은 보았다.
은색 가면의 시야 구멍으로 보이는 디엘론의 눈꼬리가 휘어져 있다는 것을.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는 가면 때문에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머, 멈춰야…….”
디엘론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눈치챈 유진이 이를 기사들에게 경고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경고가 기사들에게 닿기도 전에 디엘론의 몸이 흉측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폭발하며 사방으로 암흑의 화염을 흩뿌렸다. 디엘론한테 달려들었던 10여 명의 기사들이 죄다 암흑의 화염에 휩쓸렸다.
“크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기사들이 쓰러졌다. 바이올라와 란테르고 백작이 마법으로 물을 소환하여 진화에 나섰지만 암흑의 마나로 만들어진 검은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띠링! 돌발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디엘론의 죽음과 함께 돌발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음이 들려왔지만 유진의 얼굴은 여전히 돌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성공적으로 퀘스트를 완료했다고 말하기에는 오늘 이곳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유진은 두 눈을 감고서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 * *
검은 로브를 입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가 낡은 오두막에 들어섰다. 후드 밖으로 흘러내린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과 가녀린 체형을 보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타니아 경이시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낡은 외견과는 다르게 오두막 내부는 넓었다. 문이 열리고 타니아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한 검은 가면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다들 도착했어?”
타니아가 후드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검은색의 가면과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불참하신 간부님들도 계시지만 회의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은 채워졌습니다.”
“준비는?”
“통신 마법진이 준비됐습니다. 바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수고했어.”
남자의 대답에 타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두막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중앙에는 피로 그려진 통신 마법진이 위치해 있었고, 그 앞에 목제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다른 가구는 없었다.
“천 년 맹약의 뜻으로.”
붉은 마법진 앞에 선 타니아가 진중한 음성으로 읊조리자 그녀의 몸에서 암흑의 마나가 흘러 나왔다. 이윽고, 통신 마법진이 마나를 받아들이면서 사람의 형체를 한 다섯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체형이나 옷차림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다들 모였군.
누군가의 실루엣이 과장된 동작으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다들 모였다는 발언에 다른 실루엣이 반응했다.
―지부장님? 전부 모였다고 하기에는 숫자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만?
여성의 목소리였다. 가녀리다는 표현보다는 날카롭다는 게 더 어울렸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부장이라고 불린 남자의 발언을 가볍게 지적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지벨 도시 공략이 실패했다.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디엘론 경이 실패한 것 같더군요.
지벨 도시 공략이 실패했다는 지부장의 말에 장신의 남성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는 디엘론의 실패에 대해 언급했고 타니아는 회의에 참석한 간부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걸 느끼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디엘론이 타니아의 직속 부하이자 제자라는 사실은 간부들 사이에서 비밀이 아니었다.
―지벨 도시 공략은 천 년 맹약을 이행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결국 실패한 모양이군요.
―처음부터 디엘론 경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간부한테 맡겨야 했습니다.
―아무튼 지벨 도시 공략은 최종적으로 실패했고, 디엘론 경은 최후의 병력을 집결시켜 마지막으로 지벨 백작의 목숨만이라도 끊어 놓으려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제 휘하의 정보원들이 확인한 결과, 디엘론 경은 마지막에 자폭했다고 하더군요.
회의에 참석한 간부들은 신이 나서 디엘론의 실패에 대해 떠들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타니아는 이를 꽉 악물었다. 당연히 그녀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디엘론이 그녀의 제자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벨 도시 공략에 디엘론은 추천한 인물 또한 타니아 그녀였기 때문에 이번 실패에 대해 언급하는 간부들의 속내는 타니아의 입지를 좁히려는 의도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지부장님, 지벨 도시에 대한 공략이 실패했으니 북부를 장악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 내용을 수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루메이 후작가와 지벨 백작가가 견고하게 버티고 있다면 북부를 완전한 혼돈으로 몰아넣는 건 힘듭니다. 둘 중 하나를 완전히 박살 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야 승산이 있습니다.
―저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루메이 후작가는 건재합니다. 따라서 지벨 백작가를 노리는 게 현명하고 효율적이라고 판단됩니다.
간부들이 머리를 맞대고 진언했다. 지부장이라 불린 남자는 팔짱을 끼고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뭔가를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지벨 백작가를 끝장내야 합니다.
―타니아 경에게 책임을 묻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는 좋은 생각이라고 판단됩니다만.
누군가 타니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하자 간부들이 일제히 타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실루엣 형상을 하고 있어서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읽기는 쉽지 않았지만, 타니아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더러운 속내를 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타니아 경, 뭐라 할 말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말해 보시지요. 경청하겠습니다.
―설마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아닐 테죠. 디엘론 경이 지벨 도시 공략에 재를 뿌리는 바람에 저희 북부 지부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디엘론을 탓하는 분위기였다. 다들 타니아를 견제하면서도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고 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분위기는 장신의 간부가 타니아를 탓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변했다. 이제 간부들은 직접적으로 타니아를 탓하고 있었다.
―타니아 경? 어째서 말씀이 없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됩니다만……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 보시죠.
―디엘론 경이 남긴 업보를 청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부들이 타니아를 공격했다. 지부장은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최소한 당장 개입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공격은 점차 노골적으로 변했고 결국 참다못한 타니아가 간부들의 실루엣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책임지고 지벨 백작을 죽일게. 그러니까, 다들 그만들 해.”
타니아의 발언에 간부들의 공격이 멈췄다. 그들은 서로의 실루엣을 보며 한 차례 시선을 교환했다.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이번에는 잠자코 있던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백한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