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91)
선홍빛의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암살자의 일격을 피하지 못한 상급 마도사 테이나의 목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테이나 경!”
“쳐라!”
테이나가 힘 없이 쓰러지고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암살자에게 달려들었다. 테이나는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상이다.
쓰러진 채 경련하고 있는 걸 보아, 단번에 숨통이 끊어지지는 않은 것 같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하다. 테이나의 목을 벤 암살자는 기사 셋의 협공을 버티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테이나 죽었네요.
―암살이라고는 하지만 한 방에 죽어 버리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근데 쟤들 누구임? 어디서 보낸 놈들임?
―변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런 전개가 가능한가?
―대규모 업데이트로 달라진 거겠죠.
―그냥 불평하지 말고 시청합시다.
―ㄹㅇㅋㅋ.
시청자들이 의문을 품고서 채팅을 쳤지만 곧 다른 시청자들이 대규모 업데이트를 언급하며 의문을 일축했다.
채팅 창을 힐끗 확인한 유진은 옆에 서 있는 기사로부터 검을 전해 받았다. 날카로운 칼날에 마나가 모여 들더니 오러 블레이드가 형성되었다.
“살려 줘!”
“나, 난 귀족이야! 날 죽이면…… 크아아악!”
“도망쳐! 놈들이 온다!”
짙은 혼란이 연회장을 집어 삼켰다. 기사들은 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분전했지만 그들에 비해서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귀족들은 통제가 불가능했고, 그들은 기사들의 방어선을 벗어나 도망을 시도하다가 하수인들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어이가 없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날뛰느냐.”
란테르고 백작의 녹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무표정이 완전히 깨지고 진노의 감정이 깃들였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냉기를 머금은 칼날 바람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으아아악!”
“저쪽에 상급 마도사가 더 있다!”
“지벨 백작도 저기 있다!”
“모조리 죽여!”
하수인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들은 귀족들을 참살하는 걸 멈추고 지벨 백작과 란테르고 백작 그리고 유진 일행 등을 둥글게 포위했다.
“유진 경, 괜찮다면 조력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포위망이 좁혀지는 가운데, 란테르고 백작이 서늘한 냉기를 풀풀 풍기며 말했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돌발 퀘스트: 피로 물든 승전 연회.
지벨 백작이 인근 귀족들을 초대하며 야심 차게 준비한 승전 연회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앙심을 품은 맹약 기사단이 습격을 감행했기 때문이죠. 마침 이 자리에는 칙임 조사관 란테르고 백작도 있고 눈엣가시와도 같은 당신도 함께 있습니다. 맹약 기사단의 입장에서는 한 번의 공격으로 방해꾼 여럿을 사후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는 셈이죠. 이에 맹약 기사단의 평기사 디엘론은 자신이 모시는 스승의 지원을 받아서 지벨 백작의 승전 연회를 공격했고 란테르고 백작은 당신에게 조력을 청하고 있습니다.
보상: 3,000포인트.]
3,000포인트면 나쁘지 않은 보상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벨 백작과 란테르고 백작에게 협력하여 적극적으로 적들을 처치해야 한다.
어차피 나설 생각이었는데 포인트까지 보상으로 준다고 하니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질 뻔했다. 하지만 귀족들이 학살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실 웃을 수는 노릇,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어차피 나설 생각이었습니다.”
유진이 말했다.
―띠링! 돌발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알림음이 들려왔고 란테르고 백작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퀘스트도 수락했으니 이제 활약할 차례다.
“바이올라, 마법 지원 부탁해.”
“맡겨 줘.”
유진의 요청에 바이올라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레인, 네 역할은 바이올라의 호위다.”
진형이 갖춰져 있지 않은 혼란스러운 전장에서는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도사의 옆에 믿음직한 호위를 붙여 둘 필요성이 있다. 언제 어디서 적들이 마도사의 목을 노릴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란테르고 백작이 바이올라의 옆에 있는 이상 그의 호위인 A랭크 기사 벨키아 자작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연회장 습격에 투입된 맹약 기사단의 전력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지금 벨키아 자작과 소수의 기사로 바이올라의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다.“네, 주군. 최선을 다하여 지키겠습니다.”
드레인이 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예복 차림이었지만 다른 기사로부터 건네받은 장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신뢰할 수 있는 검사한테 바이올라의 호위를 맡긴 유진은 정면의 하수인들을 향해 곧장 달렸다.
‘정령기사의 힘을 시험해 볼 기회다.’
하수인들이 한발 늦게 전투 자세를 취했고 유진은 순식간에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액티브 스킬, ‘정령검’을 사용합니다.]
[오러 블레이드에 부여할 정령의 속성을 선택해 주십시오.]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생성되었다. 유진은 망설임 없이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화염.”
[오러 블레이드에 화염 속성의 정령을 부여합니다.]
검에 깃들인 오러 블레이드에 화염 속성의 정령이 부여되었다. 마도사들이 운용하는 속성 마나와는 다른 느낌이다. 정령기사가 사용하는 스킬답게 검에서 피어오른 불꽃은 정령의 힘에 더 가까웠다.
―정령기사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정령기사 플레이는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방장님의 고인물 무빙! 오늘도 기대합니다!
시청자들이 채팅이 빠르게 올라갔지만, 이미 전투에 돌입한 유진은 채팅 창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온다!”
“막아!”
유진이 달려들자 하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가다듬었다. 하수인들의 틈에 섞여 있던 2명의 마도사가 스태프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실드!”
우렁찬 외침과 함께 순수한 마나로 만들어진 실드가 유진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전진을 지연시키기 위한 하찮은 술수였다.
“소용없다!”
유진이 화염 정령의 힘이 부여된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자 실드가 두 쪽으로 갈라지며 화르륵하고 불길에 휩싸였다.
“마도사의 실드를 일격에 베었다고?”
“다들 조심해! 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기사님들이 도착할 때까지 막아라!”
실드가 무력하게 무너지자 하수인들은 당황했다. 10초는 버텨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과신이었다.
기껏해야 중급 마도사 둘이 힘을 합쳐 형성한 마나 실드는 정령기사로 전직한 유진이 휘두른 검으로 인하여 단번에 절단되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전진을 3초도 지연시키지 못한 셈이 되었다.
―아 ㅋㅋㅋㅋ 실드로는 막을 수 없지!
―무다! 무다! 무다! 무다!
―너흰 도망칠 수 없다.
―ㄹㅇㅋㅋ.
들뜬 시청자들의 채팅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진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하수인 검사들을 향해 화염의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을 휘둘렀다.
“크학!”
검에 베인 하수인들이 뜨거운 불길에 휩싸였다. 그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갔다. 몇 명은 방어용 마도구로 마나 실드를 전개했지만 유진의 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역시 정령기사야.
―성능 확실하구먼.
―ㄹㅇㅋㅋ.
―방장님 멋져요.
―맹약 기사단인지 뭔지 별거 없네요.
시청자들은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적들을 압도하는 정령기사의 무위에 환호했지만 유진의 표정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마나 소모가 크다. 자주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군.’
화염 정령의 힘은 실드를 우습게 조각낼 정도로 위력적이었지만 마나 소모가 심했다. 마나 홀 수치가 아직 5,000이 안 되는 유진에게는 자주 사용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스킬이다.
‘잡졸들을 상대로 사용하는 건 비효율적이야.’
소 잡는 데 쓰는 칼을 닭 잡을 때 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유진은 화염 정령의 힘을 오러 블레이드에서 회수했다.
“오러 블레이드의 색이 변했다!”
“놈의 마나가 고갈된 게 분명합니다!”
“지금이 기회다! 쳐라!”
화염의 기운으로 붉은색이었던 오러 블레이드가 푸른색으로 바뀌자 하수인 검사들이 두 눈을 번뜩이며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고 오러 블레이드가 푸른 궤적을 그리자 하수인 검사들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으아아악!”
“가, 강하다!”
황급히 물러나는 하수인들의 머리 위로 바이올라의 화염 마법이 쏟아졌다. 유진을 공격하던 하수인 14명이 모두 죽었다.
멀리서 관전하던 디엘론은 분한 마음에 이를 꽉 악물었다. 연회장 습격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연무장 부근에서 폭발을 일으켜 영주성 경비대의 전력 대부분을 빼돌린 건 성공적이었지만 기사들이 연회장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디엘론은 처음에 수십 명의 하수인들을 1파로 투입하고 2파로 100여 명의 병력을 내보내서 연회장의 학살을 주도했다.
수십 명의 귀족을 죽였지만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주 목표인 지벨 백작과 란테르고 백작 그리고 벨폰 자작 등 북부의 주요 귀족들은 단 한 명도 처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하수인들에게 살해된 이들은 기사들과 어중이떠중이 귀족들이 전부였다.
“유진……이라고 했던가요? 이번에도 나를 방해하는군요.”
디엘론의 눈동자에서 섬뜩한 살기가 일렁인다. 유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하수인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있다. 그들은 유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바이올라와 드레인의 실력도 출중했다. 유진과 그의 일행만 없었다면 지금쯤 주 목표 3명 중 최소 하나는 죽였을 것이다.
“슬슬 우리도 개입해야 하지 않겠나?”
묵빛의 가면을 쓴 남자가 디엘론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그는 맹약 기사단에서 평기사 계급의 단원으로 디엘론을 지원하기 위해 그의 스승이자 간부직인 타니아가 파견한 인물로 이름은 하스토린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총 5명의 평기사가 타니아의 명령으로 디엘론을 돕고 있었다.
디엘론이 하스토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서로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하스토린은 디엘론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디엘론 경, 무엇을 망설이는가?”
“하스토린 경, 저는 지금 망설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최적의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죠.”
“그렇다면 디엘론 경, 경이 생각하는 최적의 시기는 언제인가? 지금 동원한 단원들의 피해가 극심하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서둘러 개입해야 하네.”
하스토린의 말에 디엘론은 두 눈을 감았다. 은색 가면의 시야 구멍 사이로 디엘론의 감긴 두 눈꺼풀이 보였다.
“디엘론 경.”
침묵이 이어지자 하스토린이 과중한 힘이 실려 있는 무거운 음성으로 재촉했다. 그러자 디엘론이 감겨 있던 두 눈을 떴다. 암흑이 머물러 있는 것 같이 공허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연회장 방향에서 멈췄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디엘론이 결단을 내렸다.